소설리스트

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14화 (214/354)

〈 214화 〉 리아나 루멘하르크 (4)

* * *

[이틀 후. 정오. 그때 폭동이 일어날 거에요.]

펜 속에 녹음된 리아나의 고매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황녀 전하께서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평민파의 지지율을 내게 빼앗긴 만큼 폭동의 발생 시기가 늦어지리라 생각했지만...

리아나의 계획에는 별다른 차질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리아나가 그렇게 쉽게 막힐 계획을 세울 리 없지. ...그보다 녹음 된 게 5시간 전쯤이니까 폭동까지는 이제 34시간 정도 남았나.’

예상보다 리아나의 움직임이 빨랐지만, 폭동이 시작되는 정확한 시간을 파악한 이상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재생 기능을 끄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녹음기가 없었다면 손도 못 쓰고 폭동에 휩쓸릴 뻔했다.

비비안 때도 그렇고 트리스티아가 만드는 도구에는 언제나 큰 도움을 받는다.

‘일이 마무리되면 한 번 트리스티아를 찾아가야겠네.’

그동안 바빠서 어쩔 수 없다고는 한들 너무 방치해두었다.

사실, 트리스티아 뿐만이 아니라 루시아, 비앙카, 비비안, 릴리스, 아이리스...

이외에도 그동안 방치된 여성진은 분명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아주 쪽쪽 빨리겠네.’

잠시 딴생각을 하던 내가 쓴웃음을 흘렸다.

저런 걱정은 일이 전부 잘 해결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코앞에 다가온 폭동을 어떻게 막아낼지가 중요했다.

나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멜피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요. 멜피사.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아...아닙니다. 공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솔직한 감사에 멜피사가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멜피사의 얼굴은 아직 감정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얼굴을 붉히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에요. 멜피사가 없었더라면... 상상만으로도 힘드네요.”

내가 멜피사에게 부탁한 건 리아나의 명령으로 곁을 떠나게 된다면 방안에 녹음기를 설치해달라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녹음기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도청기를 설치했으면 좋았겠지만 리아나가 상대인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마력이 얌전히 내장되어있는 녹음기와 달리, 도청기는 소리를 전송하기 위해 마력도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움직임은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전자파처럼 미세하기 짝이 없어 웬만큼 민감하지 않고서야 존재 자체를 느낄 수 없겠지만...

‘리아나라면 반드시 눈치챘겠지.’

나는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욕심을 억눌렀다.

녹음기가 들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행운이었다.

“멜피사, 미안하지만 부탁할 게 있는데.”

“아닙니다. 공자님. 저 따위에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명령만 내리십시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대답하는 멜피사.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게 참으로 듬직했다.

“일단 루시아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고 인원 배치를 어떻게 할지 조언을 구하세요. 또한, 루시아가 뭔가를 명령하면 내게 보고 할 필요 없이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명령과 동시에 고개를 숙인 멜피사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부터는 멜피사도 마르잔처럼 루시아의 수족이 되어 인원을 배치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사실상 루시아에게 전권을 위임한 셈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여태까지 황녀와 수 싸움을 할 수 있던 건 충분히 고민하고 검토할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매분 매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리아나와 같은 곳을 볼 수 있는 건 루시아뿐일 것이다.

물론, 루시아에게 모든 걸 넘겼다고 폭동이 발생할 시간까지 놀고 있을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확정된 만큼 내게는 중요한 문제를 밝혀낼 여유가 생겼다.

리아나의 자살 이유

나는 그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

찌지직─

“이것도 아니야.”

내가 반으로 찢은 종이를 대충 꾸겨서 뒤로 던졌다.

이미 바닥에는 몇백 개나 되는 종이뭉치가 널브러져 있었지만,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그림자를 확인해봤지만, 예전처럼 ‘검’이 나를 부르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은 건 다 보여줬다는 건가.’

더럽게 제멋대로라고 생각했지만, 1회차의 내가 남긴 물건이라 생각하면 누워서 침 뱉기밖에 되지 않았다.

“...하아.”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꿈속 세계에서 리아나는 분명 죽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리아나의 자살은 누군가의 강요로 이루어진게 확실하단 말이다.

하지만...

‘리아나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 있는 존재라...’

과연 그런 존재가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아카조교사’에서 리아나 루멘하르크는 일종의 치트키 같은 존재였다.

이 세계관을 통틀어서 리아나보다 강한 존재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니까.

만일 리아나가 이쪽 편에서 싸웠더라면 사도들조차 별다른 위협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기어오는 공포’ 정도는 간단히 제압했을 테고, ‘되살아난 타락’도 얼마 가지 않아서 쓰러트렸겠지.

아, 1회차의 내 시체를 통해 부활한 이번 회차의 ‘되살아난 타락’만큼은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100번 중 99번은 ‘되살아난 타락’이 패배할 것이다.

남은 한 번도 간신히 무승부나 될지 모르겠다.

‘...그런 리아나가 싸움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게 만드는 존재라면...’

떠오르는 게 없지는 않지만 말도 안되는 일이다.

‘최종보스에게 의지는 없으니까...’

최종보스는 일종의 현상 같은 존재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는 것처럼.

그것에는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세계를 멸망시킬 뿐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은 말했다.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나서 남는 것이 아무리 믿기 힘들다 해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내가 이마를 붙잡은 채 하나의 가설을 떠올리고 있을 때.

벌컥─!

“...고..공자님...큰일났습니다!”

멜피사가 방안에 들이닥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

무언가 손끝에 잡힐 듯한 상황에서 방해받은 터라 상당히 불쾌했다.

하지만 멜피사의 얼굴에 당황이 드러날 정도면 긴급사태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 예상처럼 멜피사가 내뱉은 말은 끔찍했다.

“폭동이 시작됐습니다!”

“...뭐?”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밖에서 굉음과 함께 고함이 들렸다.

“귀족들에게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라!”

“여신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창문 밖을 확인해보니 무리를 지은 평민 세력이 마법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정오까지는 열두 시간 가까이 남았는데 왜 갑자기!’

설마 녹음기가 설치된 걸 알고 그걸 역이용해서 거짓 정보를 뿌린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황녀가 머무는 방은 황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결계가 쳐져 있다.

그리고 황녀를 제외하고 출입을 허락받은 인간은 멜피사 뿐.

이런 상황에서 녹음기의 존재를 의심한다는 건 멜피사의 배신을 의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만일 리아나가 멜피사의 배신을 눈치챘다면 이렇게 멜피사가 돌아다닐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폭동 시간을 안다는 걸 알아챈 거지?’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깨물던 나는 문뜩 무언가를 깨닫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

리아나는 계획이 누출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믿은 것이다.”

리아나는 그저 나를 믿은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계획을 실행한다면 반드시 내가 움직일 것이라고.

그렇기에 리아나는 그녀의 계획을 갑작스럽게 당겼다.

물론, 갑작스럽게 일이 시작된 만큼 평민파들은 계획했던 만큼 완벽한 움직임은 보여주지 않겠지만...

‘...문제는 이쪽도 마찬가지다.’

루시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인원을배치할 시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했다.

분명 지금도 한창 배치 도중이었을 것이다.

“멜피사, 루시아의 인원 배치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그게...공자님... 아직 절반 정도만 완료되었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다.

배치된 인원이 절반이라 해도 평민들의 수가 귀족들의 수에 30%에 불과한 만큼 인원수로 따지면 비슷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루시아가 빨리 인원 배치를 마무리하길 기대하는 수 밖에...’

주먹을 꽉 쥔 나는 멜피사에게 명령했다.

“알았습니다. 내가 나가서 최대한 폭동을 지연시켜볼 테니 그동안 멜피사는 다시 루시아에게 가보세요.”

루시아에게는 따로 명령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쯤 루시아라면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고 있을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루시아가 인원 배치를 완료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뿐.

“그게...무리입니다. 공자님. 루시아님에게 갈 수 없습니다.”

멜피사의 대답에 불안감이 몸을 덮쳤다.

나는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멜피사를 쏘아붙였다.

“무리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루시아님이 계시는 기숙사는 현재 황녀 전하께서 치신 결계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지금 기숙사는 황녀 전하의 허가 없이 누구도 나올 수도 밖에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체크메이트 선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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