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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13화 (213/354)

〈 213화 〉 리아나 루멘하르크 (3)

* * *

“후후훗♬ 유진이는 언제나 재미있다니까.”

리아나 루멘하르크가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손에는 누군가를 닮은 검은 머리 인형이 들려있었다.

유진이 반격할 것쯤은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연설의 시간과 장소를 대놓고 공표했는데 반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그렇지만 유진이 어떤 연설을 가져오더라도 확실히 눌러버릴 수 있을 만큼 철저히 준비했다.

“무슨 짓을 할까 했는데... 설마 판을 깨버릴 줄이야♪”

그러나 유진의 대응은 리아나의 예상을 넘어섰다.

무대 위에서 이길 수 없다고 무대 자체를 박살 내다니...

유진은 역시 나를 즐겁게 해주는 법을 아는 남자였다.

리아나는 절대 그렇게 거칠고 조잡한 대응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와 정면에서 싸워도 이길 수 있는데 그런 방법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리아나는 자신보다 강자를 이길 수 없다.

지금까지 리아나가 패배하지 않았던 건, 단순히 리아나보다 강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은 달랐다.

자신이 약자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을 쳐서, 결국 내게서 승리를 쟁취 한 것이다.

“유진아~ 다음에는 뭐 하고 놀까? 후훗♬”

인형을 뺨을 쿡쿡 누르며 웃던 리아나가 갑작스레 표정을 굳혔다.

“...아아, 기분 좋았는데. 꼭 이럴 때 찾아온단 말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리아나가 거울 앞에 서서 말했다.

“나오세요.”

리아나의 말에 거울이 일렁거리면 붕대로 둘둘 감은 ‘일그러진 욕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 전하.]

‘일그러진 욕망’의 호칭을 들은 리아나는 굳었던 표정을 풀며 피식 웃었다.

“한 번 혼나고 나니 이젠 제대로 부르네요. 역시 혼을 내야 알아듣는 걸까요?”

리아나의 도발에 ‘일그러진 욕망’이 이를 갈았다.

[...날 너무 자극하지 마라. 지금도 간신히 참아주고 있으니까.]

“어머,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데요? 한 번 해보시죠.”

그 말을 끝으로 리아나와 ‘일그러진 욕망’이 서로를 노려보았지만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일그러진 욕망’이었다.

[...말싸움하고 있을 생각은 없다. 그보다 언제까지 놀고 있을 셈이지? 이쪽은 모든 준비가 끝났다.]

붕대 사이로 ‘일그러진 욕망’의 눈이 번쩍거렸다.

사실 카르네아의 폭동 자체는 제국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할 것이다.

일단 밸런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카르네아의 학생 중 평민의 수라고 해봤자 30%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수뿐만이 아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나면 평민 학생의 대부분은 4반과 5반에 포진되어있다.

결국, 숫자도, 힘도 귀족파에 비해 한참 부족하단 말이다.

‘...길어봐야 하루 정도면 완전히 제압되겠지.’

그걸 알면서도 ‘일그러진 타락’이 카르네아의 폭동을 재촉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카르네아의 방어시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하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르네아에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너를 데리러 갈 수 없다.]

‘일그러진 욕망’의 능력은 그 이름처럼 공간을 일그러트린다.

전투에서도 상당히 유용한 능력이지만, 그 진가는 거리의 제약이 사라진다는 데 있다.

그가 힘을 제대로 사용한다면 제국의 끝에서 끝까지 한순간에 오갈 수 있으니까.

다만, ‘일그러진 욕망’의 능력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전송할 수 있겠지만, 리아나처럼 강대한 힘을 가진 인간을 전송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집중과 시간이 필요하다.

만일 ‘일그러진 욕망’이 카르네아 부지 안에서 리아나를 전송시키려고 한다면.

카르네아 측에선 반드시 눈치채고 방해하러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집중 상태의 나는 무방비로 당하고 만다.’

결국, ‘일그러진 욕망’이 리아나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침입한 것을 들키더라도 카르네아에서 대응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카르네아에 폭동을 일으키려는 진짜 목적이었다.

“참을성 없는 남자는 인기가 없는데 말이죠~. 하긴, 얼굴을 붕대로 감싸고 있는 것만 봐도 인기가 없는 건 알겠어요.”

리아나가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일그러진 욕망’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내가 너를 황녀 전하로 부르는 건 널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도 최소한의 존중을 보이는데 어떤가?]

“존중하고 있잖아요? 내가 당신을 존중하지 않았다면 격이 떨어지는 당신이 저와 대화라도 나눌 수 있었을 것 같나요?”

[황녀...!!]

‘일그러진 욕망’이 소리침과 동시에 거울에 거미줄처럼 금이 생기며 갈라졌지만, 리아나는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기다려요.”

[얼마 남지 않은 건 내 참을성이다. 정확한 날짜를 말해라.]

“하아... 끝까지 재촉하네요. 정말 멋없는 남자라니까요.”

[헛소리는 더 들어주지 않겠다!! 정확한 날짜를...]

“이틀 후. 정오. 그때 폭동이 일어날 거에요.”

리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유진과 놀고 싶었지만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았다.

‘아쉽네...’

지금까지 유진이 자신을 잘 붙들고 늘어지기는 했었다.

생각보다 많은 평민이 내가 아닌 유진을 지지했으니까.

...그러나 앞으로 이틀 뒤,

폭동이 일어나는 건 확정사항이다.

유진이 뺏어간 지지율 정도로는 이 폭동을 멈출 수 없다.

“시간을 잘 맞춰서 오도록 하세요. 기다리는 건 질색이니까.”

리아나의 말은 명령에 가까웠지만 ‘일그러진 욕망’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붕대 아래에 감춰진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틀이라.’

이틀 정도라면 아직 참아 줄 수 있는 범위다.

현재 제국 곳곳에 숨어 있던 반란세력은 ‘일그러진 욕망’의 능력을 통해 한 지역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모여 있을 뿐,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리아나 루멘하르크’라는 황실의 핏줄이 필요했다.

귀족의 멸망을 꿈꾸는 반란군들이 그 가장 꼭대기에 있는 리아나를 원하는 게 모순적이지만, 그만큼 황실의 피는 특별했다.

리아나가 반란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란군의 정당성을 주장 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물론, 반란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리아나를 꼭두각시 삼아 제국을 다스릴 생각을 하는 것 같지만....

‘멍청한 놈들이지... 저게 제어 가능하다고 보는 건가?’

리아나와 눈을 마주친 ‘일그러진 욕망’이 흠칫 떨리던 몸을 간신히 억눌렀다.

어떻게 인간이 저런 힘을 품고 있는지 납득 할 수가 없었다.

리아나 루멘하르크의 힘은 노력이나 재능으로 설명할 영역을 한참 넘어섰다.

분명 맹약으로 목줄을 걸어놓았건만 지금도 보고 있자니 소름 끼칠 정도다.

‘마치 그분을 보는 것 같은...’

잠깐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일그러진 욕망’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무리 황녀가 괴물 같다 할지라도 그분과 비교하다니 어리석은 짓이다.

리아나가 재앙이라면 자신의 주인은 그 재앙조차 집어삼킬 존재이니까.

[...이틀 후, 찾아가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그러진 욕망’이 거울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

“...아아~, 좋았던 기분이 싹 사라졌네.”

다시 침대 위에 엎어진 리아나가 인형의 양 볼을 쭉 잡아당기며 투덜거렸다.

“마지막 정도는 좀 즐길 수 있게 해주면 좋겠는데...”

리아나에게 있어 이 모든 순간은 최후의 만찬과도 같았다.

그녀가 세운 계획의 끝은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어졌으니까.

수많은 영웅전에서 나왔던 것처럼 누군가를 위해서 고귀한 희생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리아나는 타인의 목숨이 자신의 것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리아나가 죽음을 택한 건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리아나 루멘하르크는 죽는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길어 봤자 일 년 사이 리아나는 죽게 된다.

병 따위를 앓고 있는 건 아니다.

리아나의 완벽한 육체는 태어나서 감기조차 한 번 걸린 적 없을 만큼 튼튼했으니까.

리아나가 말하는 죽음은 정신적인 죽음이었다.

─지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아 챈 것처럼 달군 칼로 머릿속을 헤집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점점 심해지고 있어...’

리아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평범한 고통이었다면 리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겠지만, 이건 리아나의 인격이 사라져가며 남기는 절규와도 같았다.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본래라면 끊임없는 살인 충동과 권태감으로 리아나의 인격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소멸했어야 하니까.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리아나의 지나치게 우수한 두뇌와 직감의 탓일까.

아니면 그녀의 정신이 살인 충동과 권태감을 견뎌 낼 정도로 견고했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리아나는 깨닫고 만 것이다.

...자신의 육체는 누군가를 위한 그릇이라는 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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