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 리아나 루멘하르크 (2)
* * *
“루시아님, 오늘도 완벽한 연설이었습니다.”
“....”
“그에 비해 상대 쪽은...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뭐라 말씀드리기도 창피합니다. 하하하.”
루시아와 함께 걷던 페드로 롱기스트가 경박하게 웃었다.
둘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페드로가 루시아의 뒤를 졸졸 따라간 것에 불과했지만.
페드로는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한 것인지 계속해서 루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첫 재판장에서 칼리오페의 삼남이 평민을 옹호했을 때는 머리가 어떻게 된 줄 알았지만, 지금와서 보니 차라리 잘됐습니다.”
대립의 계기가 된 평민 하나쯤이야 이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이번 기회에 제국을 좀 먹던 곰팡이들을 죄다 도려낼 수 있게 됐으니까요. 하하하.”
사과를 받는다고 넘어갈 수 있을 상황은 한참 넘어섰으니까.
이제는 카르네아에 존재하는 ‘평등’이라는 악습을 뿌리째로 뽑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동안 천한 것들이 주제를 모르고 나대던 게 이상했던 거지.’
페드로의 입술이 비틀렸다.
성공 여부를 떠나서 페드로는 평민들이 귀족에게 대든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건 페드로의 생각만이 아니다.
대다수의 귀족들은 그들이 카르네아에서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여겼다.
모두가 평등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귀족들이 피는 고귀하고, 평민의 피는 천하다.
당연한 상식이지 않은가.
카르네아의 교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평등’한 모습을 보여주던 것도 이제 끝낼 때가 왔다.
‘...귀족의 권위를 침범한 평민들에게 주제를 알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거슬리는 두 이름이 있었다.
리아나 루멘하르크와 유진 칼리오페였다.
페드로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중간한 귀족이었다면 힘으로 찍어 눌렀을 텐데.
하필이면 상대가 황가와 칼리오페 가문이었다.
‘후계 다툼에서 밀려난 주제 욕심만 득실거리는 군...’
페드로는 평민들의 권리를 위해서 귀족들과 맞선다는 대의명분을 믿지 않았다.
유진과 황녀가 이런 연극을 하는 이유는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일 뿐이다.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황녀가 후계 싸움에서 패하고도 살아남았던 이유는 권력에 욕심을 내지 않고 쥐죽은 듯이 살아갔기 때문이다.
‘황좌라는 권력에 이성을 잃은 건지...’
하지만 황제 폐하의 죽음을 앞둔 이 순간.
황녀는 평민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황좌를 노리는 듯했다.
귀족들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열등한 평민들이지만 숫자만큼은 귀족들보다 많았으니까.
‘유진 칼리오페도 마찬가지다.’
삼남인 유진 칼리오페도 이번 소동을 기회 삼아, 다시금 칼리오페 내부에서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진과 황녀가 동시에 평민파의 수장이 될 수는 없다.
머리는 언제나 하나뿐이니까.
저들도 이대로 싸움을 이어가다가는 귀족파를 상대하기 전에 자멸한다는 걸 알 것이다.
하지만 밀려나는 순간 권력도 목숨도 잃는다.
그렇기에서 서로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대립 하는 것이다.
이것이 페드로가, 아니 대부분의 귀족들이 예상하는 유진과 황녀의 목적이었다.
“황녀 전하와 그 삼남이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워대는 바람에 아랫것들이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이 아주 가관이더군요. 하하하.”
연설장의 모습을 떠올린 페드로가 크게 웃었다.
초반에 황녀가 펼치던 연설을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여신의 아래에 만물은 평등하다는 여신교의 교리를 평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내세우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고귀한 핏줄을 이은 황녀가 저런 말을 하니 혹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몇몇 귀족들조차 그 연설 때문에 전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설장에 난입한 유진 때문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솔직히 말해서 유진의 연설은 황녀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확성 마법과 추종자를 동반한 강렬한 선동에 감성을 자극하던 황녀의 연설은 힘을 잃었다.
그 결과, 황녀에게 설득되어가던 평민들은 역시 유진과 황녀중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할지 갈등했다.
‘...그에 반해 귀족파의 머리는 하나다.’
루시아라는 압도적인 리더를 가진 귀족파는 대립하는 평민파의 모습을 비웃으며 더욱 단합 할 수 있었다.
“....”
페드로의 수다에도 루시아는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루시아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겠지만.
승리의 기쁨에 취해 눈이 멀었는지 페드로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그래도 뭐 가문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낙오자니까요. 어미가 멸문한 가문 출신이라 그런 걸까요. 하하.”
“...그렇군요.”
소름 돋게 차가운 루시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페드로도 마침내 루시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
‘...왜지?’
오늘은 적이 알아서 자멸한 기분 좋은 날이다.
물론, 연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분위기는 유진에서 다시 황녀 쪽에 기울었다.
아무리 선동을 하더라도 연설 내용은 황녀 쪽이 훨씬 완벽했으니까.
분명 언젠가는 황녀가 평민들의 수장으로 지목될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 귀족파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반귀족파에서 수장이 확정되었을 때쯤 이미 귀족파는 평민파를 쓰러트릴 모든 준비가 끝났을 것이다.
그때, 페드로의 눈에 루시아가 왼쪽 손목을 쓰다듬고 있는 게 들어왔다.
‘저것 때문이군.’
페드로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늘 연설이 끝나고 말다툼을 벌이던 도중 루시아의 손목이 유진에게 잠깐 붙잡혔었다.
루시아는 곧바로 뿌리치기는 했지만, 남성과의 접촉을 꺼리는 루시아의 성격상 그 일은 상당히 불쾌했을 터.
‘...내가 눈치가 없었군.’
계속 유진을 언급하는 바람에 루시아에게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 모양이다.
페드로는 피식 웃으며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아까 붙잡힌 손목이 아픈 것입니까? 제가 한 번 봐 드리죠.”
페드로가 루시아의 손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루시아에게 함부로 손을 댄 남자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페드로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불쾌한 기억을 덮어 써주지.’
허나, 롱기스트 가문의 후계자인 자신이라면 루시아가 받아 줄 것이라 여겼다.
페드로는 자신이 루시아의 짝이 되기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자아도취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그러했다.
황가와 대가문을 제외하고는 롱기스트 가문에 비할 만한 가문은 제국에 몇 개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롱기스트 가문의 장남이자, 차기 가주다.’
후계자 자리를 경쟁하던 형제들은 ‘불의의 사고’를 만나 죄다 병신이 되거나 뒤졌으니까.
누군가는 잔혹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페드로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냉정함이라 여겼다.
꽉─
그렇게 페드로가 루시아의 손목을 붙잡는 순간.
루시아의 몸이 갑작스럽게 멈춰섰다.
“...버러지가.”
그리고 페드로는 곧바로 후회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살기가 루시아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감히....님의..흔적을...”
“루...시아님?”
예상치 못한 루시아의 반응에 페드로가 손목을 놓으며 뒷걸음질 쳤다.
루시아가 남성의 신체접촉을 극도로 꺼린다는 건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루시아님. 지...진정하십시오. 제가 실수했습니다.”
페드로가 양손을 내밀며 루시아를 진정시켜보려 하지만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날카로운 검이 되어 페드로를 겨누었다.
‘...위..위험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페드로가 검을 뽑아 들었지만, 태풍 앞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맞선 것처럼 몸이 떨려왔다.
근거리에서의 싸움이라면 몇 단계 위의 마법사도 검사가 제압할 수 있을 터인데...
지금 페드로는 루시아에게 일말의 승기도 느낄 수 없었다.
‘...이..이게...루시아 우르엘라...’
페드로의 실력도 상위권에 속해있지만, 루시아와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숨이 막히는 압박 속에 루시아가 다가오자 페드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이..이러시면 안될겁니다! 로..롱기스트 가문은 우르엘라에게 꼭 필요한 가문입니다.”
겁을 먹기는 했지만, 아직 페드로의 머릿속에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루시아가 자신을 죽일 리 없다.
적어도 카르네아에서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우습게 여기듯 루시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촤악—
페드로의 뺨이 갈라지며 핏물이 흘렀다.
“...피...피가..!! 이..이게 무슨 짓..”
“입 다무세요. 강간범.”
루시아의 말에 페드로가 비명을 질렀다.
“...가...강간이라니! 그게 무슨...!”
그저 손목을 한 번 잡았을 뿐인데 단숨에 강간 누명을 쓰게 생겼다.
“거짓말! 거짓말입니다! 제..제가 언제 그런 짓을...”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만드는 게 진실이니까.”
오만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루시아는 ‘가장 공평한 저울’이자 우르엘라의 차기 가주니까.
촤악—
페드로의 반대쪽 뺨도 갈라졌다.
“강간범에게 저항하다가 실수로 죽여버렸다... 뭐, 과잉대응으로 구설수는 좀 나돌겠지만,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요?”
“...제...제가...죽으면...로..롱기스트 가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페드로의 발악에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글쎄요? ...당신 형제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 순간 페드로의 머릿속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형제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그들이 우르엘라 가문에 대항하면서 이번 일을 파헤쳐줄까?
‘...그럴리 없다.’
오히려 차기 가주자리를 얻을 기회라고 생각해 최선을 다해 일을 덮을 것이다.
쿵—
“...사...살려주십시요..루시아님...”
상황을 다시 파악한 페드로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루시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고했다.
“...두 번째 기회는 없어요. 다시는 제 몸에 손을 대지 마세요. 페드로 롱기스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