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부부사기단 (2)
* * *
“...황녀 전하께서 끼어들었군.”
“네, 말씀하신대로. 황녀 전하께서 나서서 부당한 요구는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며 제이빗에게 사과하지 않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마르잔의 추가 설명을 듣자 두통이 심하게 올라왔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이마를 붙잡았다.
“당연히 롱기스트 가문 쪽에서는 길길이 날뛰었겠고...”
믿기 어렵겠지만 황녀의 정치적 기반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리아나 본인이 권력에 관심 없는게 컸고.
황제가 병상에 누워있는 지금.
사실상 차기 황제와 다름 없는 황태자가 리아나에게는 어떠한 권력도 돌아가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리아나의 광기를 알고 있는 황태자로선 귀족들의 접근을 막아, 리아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이지만...
속사정이야 어떻든 세간에서 보기에 리아나는 황태자의 견제로 팔다리가 잘린 상태다.
그런 리아나가 잘나가는 귀족에게 시비를 건다...?
롱기스트의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을 발판 삼아 황녀가 내정에 간섭, 정치에 복귀하려 한다고 오해한 것이다.
‘...귀족들은 황녀의 계획을 모르니 어쩔 수 없나.’
사실 누가 상상이라도 하겠는가?
황녀가 평민과 하급 귀족들의 대표가 되어 내전을 일으켜, 제국을 반으로 쪼갤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내정 간섭을 통한 정치 생명 회복 쪽이 훨씬 더 현실성이 높았다.
어찌 됐건 롱기스트 가문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상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리아나를 견제함으로서 차기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것도 있고, 또한 아무런 권력이 없는 황녀에게 밀려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롱기스트의 정치적 위치가 위태롭게 되니까.
“...하아.”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 이 세계는 내가 알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뒤틀려버렸다.
‘...하지만, 시발점이 바뀐 건 나쁘지 않다.’
황녀 전하께서 이번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려고 하는지 몰라도 마차 사고에 평민 아이가 치어 죽은 것에 비하면 귀족 얼굴에 상처가 난건 아주 사소한 일이다.
타오르는 불씨의 크기 자체가 다르단 말이다.
물론, 리아나에게 불씨의 크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아름다운 외모에 몇 번이고 속아 넘어갈 뻔했지만, 리아나는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재앙이다.
황녀가 이 사건을 이용하기로 한 이상, 이 사건은 반드시 부풀려지게 된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하는 건 하나.
‘최대한 불꽃의 크기를 작게 만드는 것.’
주먹을 꽉 쥔 나는 마르잔에게 물었다.
“황녀 전하께서 요구한 건 뭐지?”
“재판을 통해 누구의 잘못인지 정확하게 가리기 원한다고 합니다. 롱기스트 가문도 이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하, 그야 당연히 받아들였겠지.”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롱기스트의 얕은 생각이 훤히 보이는 듯하다.
말했다시피 롱기스트 가문은 대가문을 제외하고 가장 이름 높은 가문 중 하나이다.
재판이 시작되는 순간 제이빗의 패배가 확정되었다고 봐도 상관없다.
그야 그럴 것이 재판관도 사람이다.
아무리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있어도 롱기스트 가문의 압박을 견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압박할 필요조차 없다.
재판장을 압박하는 건 위치가 애매한 가문이나 하는 일이다.
롱기스트 가문쯤 되면 먼저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재판관이 알아서 길 테니까.
그런데도 황녀가 재판을 요구한 이유는 간단하다.
재판에서 이기든 지든 황녀는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이기면 부당한 핍박을 재판을 통해 승리하게 만든 황녀로서 평민들과 하급 귀족들의 지지를 얻다.
만일 지더라도 무엇보다 공평해야 할 재판조차 귀족들의 압력에 굴해서 부정한 판결을 내렸다고 호소할 수 있을 테니까.
어느 쪽이든 황녀는 평민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그때, 마르잔의 입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쏟아졌다.
“...또한, 황녀 전하께서는 재판관의 역할로 루시아님을 지명하셨습니다.”
“시발...”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올 정도로 열이 받았지만, 루시아가 지명된 것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우르엘라 가문은 롱기스트 가문에 압박에도 넘어가지는 않을 대가문이며 루시아의 별명은 ‘가장 공평한 저울’ 이니까.
이렇게 재판관으로 적절한 상대는 따로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관과 할 수 없는 사실이 존재했다.
‘...롱기스트가 제국 서부에 위치 한다는 것.’
서부의 지배 가문은 당연히 ‘우르엘라’가문이다.
즉, 롱기스트 가문은 우르엘라 가문의 기수 가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공평하게 판결을 내린들 만일 재판 결과가 롱기스트 가문 쪽에 유리하다면 황녀는 반드시 이 부분을 공격하겠지.
“루시아. 아직도 생각은 변함이 없나?”
“...네, 아무래도 제이빗이 사과를 하고 끝내는 게 맞다고 봐요.”
“설령 제이빗이 비겁한 수를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네, 일을 크게 키울 사건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주인님이 바라신다면 재판 결과를...”
나에 대한 루시아의 복종심은 신념을 굽히기 충분했지만 그걸 원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너는 네 생각대로 판결을 내려라.”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재판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내전을 막는 것이다.
만일 루시아가 내 명령에 따라 롱기스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롱기스트 가문은 반드시 불만을 품게 된다.
‘...황녀는 그 부분을 놓치지 않겠지.’
리아나는 롱기스트 가문을 현혹해 우르엘라 가문에 반기를 들게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여기까지 내다보고 루시아를 재판관으로 고른 황녀의 생각은 그저 놀랍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과대평가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황녀의 위험성은 이것조차 과소평가에 가까웠다.
“...알겠습니다. 그럼, 사과를 요구하는 쪽으로 가겠습니다. 주인님.”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이 공평과 평등을 착각한다.
허나, 확실히 말해 공평과 평등은 다르다.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똑같이 밥을 나눠주는 게 평등이라면 공평은 가난한 자에게 좀 더 많은 밥을 나눠주는 게 공평이다.
루시아는 ‘가장 평등한 저울’이 아니라 ‘가장 공평한 저울’이다.
상대의 입장과 상황을 봐서 그에 알맞은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다.
루시아,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애초에 이 사건은 크게 키울 사건이 전혀 아니다.
제이빗의 사과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사소한 일이었단 말이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지금이라도 제이빗이 사과하는 것이지만...
“...제이빗에게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네, 이미 황녀전하의 하수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게 옳아요.”
황녀의 화술은 악마의 속삭임에 가깝다.
사실 제이빗을 홀리는 데는 화술조차 필요 없을지 모른다.
황녀의 외모는 나를 제외한 남자라면 누구라도 홀려버릴 정도로 아름다우니까.
“....”
그러자 루시아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아니에요. 주인님.”
평소랑 다르게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루시아.
그 모습에 내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자 마르잔이 말을 꺼냈다.
“...예상 재판 날짜는 초청제가 끝난 다음 날입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빠르게 일정이 잡혔다.
아무래도 초청제 중에는 시선이 많이 몰리다 보니 재판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초청제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재판을 열다니.
‘...저쪽도 급한 건가.’
하긴, 생각해보면 시나리오가 빨리 진행된다는 건 그만큼 상대 쪽이 준비해놓은 계획을 빨리 망가뜨렸다는 뜻.
뒤틀린 시나리오가 꼭 나에게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나보다.
‘상황은 나쁘지만, 최악은 아니다.’
이번 재판은 어디까지나 예상치 못한 사태로 발생한 일이다.
아무리 황녀가 개입했다고 한들, 마차 사고처럼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는 일이 아닌 만큼 허점 또한 드러날 것이다.
‘...루시아가 재판장으로 선택된 것도 어찌 보면 잘된 일이다.’
지금까지 나와 루시아가 불화를 유지하던 건 마차 사고 때 서로 극단적인 대립을 보여주며 제국의 분열을 이끄는 인물들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번 재판도 조금 빨라졌을 뿐, 루시아와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내가 말했다.
“...나 또한 참관인으로 재판에 들어가겠다.”
이래 봬도 칼리오페의 일원이다.
참관인 자격 정도는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다.
“아... 그럼 이제부터는 주인님의 방에도 못 오겠네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생각했는지 루시아가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재판이 시작된 순간부터 나와 루시아의 관계는 절대로 밝혀져서는 안 된다.
대립하는 게 연기였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귀족과 평민 양쪽에서 공격받을 테니까.
잠시후, 생각을 정리한 듯 루시아가 짧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전해야 하는 말은 마르잔을 통해서 하겠습니다. 주인님.”
“흐엣? 저...저 말입니까.”
마르잔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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