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핑크&핑크&핑크&핑크(4)
* * *
부러진 나무, 박살 난 바위, 그리고 마물들의 시체까지.
난장판이 된 숲 한가운데에서 비앙카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아...하아..”
잠시 후, 호흡을 가라앉힌 비앙카는 손을 감싸고 있는 피투성이의 붕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붕대 갈아야겠네.”
붕대를 벗기니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주먹질하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린 손이 보였다.
이 상처가 완전히 낫고 나면 주먹에는 한 줄의 흉터가 더해지겠지만, 딱히 감흥은 없었다.
이런 일로 아파하거나 슬퍼하는 단계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왔다.
죽음을 눈앞에서 느낀 이후, 비앙카는 한 꺼풀 벗은 듯이 성장했고 어느덧 학년 3위의 자리까지는 올라왔다.
사실 말이 3위였지 1위와 2위 역시 결투가 아닌 목숨을 빼앗는 사투(死)라면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비앙카는 그렇게까지 해서 올라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카르네아의 순위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과거 베아트리스 가문의 부흥만을 생각하던 비앙카라면 있을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는 좋은 성적을 받는 게 필수적이었고, 좋은 성적이란 곧 순위였다.
‘...이젠 아니야.’
이제 비앙카에게 있어서 가문의 부흥보다는 유진의 곁에서 싸울 수 있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렇기에 비앙카는 차라리 유진이 떠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진의 곁에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 비앙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진이 없는 지금에서야 숲에 들어올 결심을 한 거 아닌가.
“...개새끼.”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데이트 신청을 거부하고 양호 선생이랑 단둘이 떠난 건 생각 할수록 열이 받는다.
한숨을 길게 쉬며 마음을 다스린 비앙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 더 할 수 있어.’
그날 자신이 할 수 있던 것은 유진 대신 죽어주는 것뿐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시간을 몇 번이고 되돌려도 비앙카는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비비안이나 루시아였다면.’
그 장소에 있는 게 내가 아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야.’
그날 느꼈던 절망감을 곱씹은 비앙카가 고개를 저었다.
‘...양보하지 않을 거야.’
자신에게는 루시아처럼 굉장한 권력도 비비안처럼 엄청난 마법도 릴리스처럼 뛰어난 고유능력도 없다.
가진 거라곤 피투성이가 된 이 두 주먹뿐.
...그래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 자식의 옆에 서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 주저앉아 있을 시간은 없다.
입으로 붕대를 당겨 묶은 비앙카는 숲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
“선...생님?”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까지 밭일하다 왔는지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채소가 잔뜩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는 릴리스가 보였다.
“릴리스...?”
“선생님...!”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그대로 달려와 안기는 릴리스.
“선생님...! 선생님...!”
릴리스는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내게 찰싹 달라붙어 고개를 마구 뺨을 비벼댔다.
“....”
기껏해야 며칠 안 만났을 뿐인데, 누가 보면 한 몇 년을 떨어져 있다가 만난 사이인 줄 알 것 같았다.
“릴리스가 왜 여기 있어요?”
“여기가 저 릴리스의 고향이니까요!”
릴리스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그 말을 듣고 나니 아이리스와 릴리스의 출신지가 같았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선생님이야말로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후후훗, 아뇨!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아닌 척을 했지만, 사실은 저 릴리스를 보고 싶었던 거네요! 그래서 여기까지 쫓아온 거죠!”
릴리스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쭉 펴자,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가슴이 출렁거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분홍 머리를 계속 보다 보니 릴리스가 살짝 보고 싶었던 맞지만, 릴리스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머나, 유진씨는 릴리스하고도 아는 사이인가요?”
“릴리스, 유진씨하고는 무슨 관계인가요?”
클라리스와 엘라리스의 질문에 릴리스는 내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유진님은 저 릴리스의 선생님이에요!”
“어머, 선생님이요? 유진씨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선생님이라니. 유진씨는 보기보다 나이가 있으신가 봐요?”
“....”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아, 진짜 선생님은 아니고 아카데미 선배인데 릴리스에게 야한짓을 알려줘서 선생님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기에는 내가 아무리 뻔뻔해도 쉽지 않았다.
“리...릴리스!”
“어머나! 선생님도 계셨네요!”
아이리스의 커다란 외침에 릴리스는 그때야 아이리스의 존재를 알아챈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있었어요! 그...그리고 유진군한테 떨어져요!”
“에? 왜요? 선생님, 저 릴리스가 왜 떨어져야 하나요?”
비꼬는 게 아니라 순수한 의문을 담은 릴리스였지만 지금 아이리스에겐 도발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냥! 빨리 떨어지라고요!”
“...에?”
평소와는 다른 아이리스의 태도에 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떨어졌다.
“그런데 선생님과 선생님이 같이 있으니 어느 선생님을 부르는지 헷갈리네요!”
“여기선 그냥 선배라고 부르세요.”
“저...정말 그래도 되나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는 릴리스를 보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단 한 번도 릴리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시킨 적이 없었다.
자기가 먼저 부르겠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뒀을 뿐.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릴리스와 유진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리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에요 도대체!’
아이리스는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다.
유진군과 고향에 온 건 유진군을 엄마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가 가장 컸다.
‘그런데...!’
왜 갑자기 릴리스가 나타난단 말인가.
미웠다!
저 귀여웠던 릴리스가 오늘따라 너무 미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릴리스에게 삐진 티를 내자니 자기가 너무 쪼잔해 보였다.
릴리스가 알고서 방해한 것도 아니고 릴리스의 입장에서는 그냥 고향에 왔는데 마침 유진이 방문했을 뿐이니까 말이다.
“....미워요. 진짜.”
결국, 아이리스의 원망이 향한 건 유진이었다.
화풀이건 알지만, 화를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아이리스의 따가운 시선과 릴리스의 몽글거리는 시선을 양쪽에 받은 내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릴 때쯤.
짝—
클라리스와 엘라리스가 동시에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럼 우리 다 같이 식사나 함께할까요?”
***
음식은 가짓수는 적었지만, 재료도 신선했고, 맛도 훌륭해 보였다.
훌륭했다가 아니라 보였다인 이유는....
음식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신경이 다른 곳에 팔렸기 때문이다.
“....”
그동안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오니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후후훗. 유진씨 많이 먹어요.”
“...‘몸’에 좋은 거로 준비해봤어요.”
식탁보에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지만,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클라리스와 엘라리스는 약속이라도 한 듯 발끝으로 내 장딴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이리스와 릴리스도 식사하면서 각각 한 손으로는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고 있었다.
“....”
나도 안다.
이런 상황에서 발기하면 안 된다는 건.
그러나 알고 있지만...
‘...이걸 어떻게 견디냐고.’
말 그대로 사방에서 오는 육체적 자극과 네 명의 핑발이 뿜어내는 음란 페로몬에 의지와 상관없이 서서히 발기하고 있었다.
그때 엘라리스가 여우 같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보니 아이리스. 유진씨하고 관계는 잘 맺고 있니?”
“...케흑...!콜록..!콜록!...어...엄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원장님이라 부르던 것도 잊고 엄마라고 소리치는 아이리스.
“....”
하지만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아이리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타이밍에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고?’
아니다.
아직 확신은 이르다.
아무리 머리가 분홍색이고 은근슬쩍 추파를 던져오지만, 그대로 밥을 먹는 도중에 갑자기 섹스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엘라리스가 말한 관계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의미가...
“어머,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연인 사이라면 섹스 정도는 당연히 하는 거 아니니?”
이어지는 클라리스의 말에 내 자그마한 희망이 박살 났다.
“클라리스 엄마까지!...지...지금 학생들 앞에서 도대체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 릴리스는 아무 상관 없어요!”
“제가 상관있어요!”
릴리스의 난입에 아이리스가 비명을 꽥 질렀다.
“어머, 아이리스 식사 중에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안 되지 않니?”
“어...엄마가 먼저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잖아요!”
“그럼 식사 중에 엄마 앞에서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는 건 말이 되고?”
“양쪽에서 사이좋게 만지던데?”
설마 들킬 줄은 몰랐는지 아이리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봐...봤어요?”
“당연히 봤지.”
“그렇게 대놓고 하는데 어떻게 모르겠니.”
“...죄..죄송해요. 워...원래는 안그러는데...”
“뭘 그렇게 죄송해하니? 우리 같은 음마족에게는 당연한 일인데.”
“신경쓰지말고 계속 해도 된단다.”
“...?”
엘라리스, 아니 클라리스의 입에서 상상도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