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핑크&핑크&핑크&핑크(3)
* * *
‘...저...정말 거의 다 왔어요.’
주변 풍경이 익숙해질수록 아이리스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하고 손이 덜덜 떨렸다.
그냥 고향을 가는 것뿐인데 유진군이랑 같이 간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긴장될 줄은 몰랐다.
아이리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까지.
‘...정신 차려요!’
아이리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마음을 진정시킬 생각으로 쳐다본 건데 진정되기는커녕 이러다 터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장이 뛰어댄다.
‘...엄마에겐...뭐...뭐라고 설명하죠...’
정확히는 엄마가 아니라 원장님이지만, 아이리스는 그녀들을 친엄마처럼 여기고 있었다.
‘...오...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남자를 데리고 왔다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아니...그보다...유진군을 뭐라고...소개해야 하나요...’
아이리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일단 가장 무난한 선택지는 교사와 학생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럼 왜 유진군이 이 먼 곳까지 따라왔냐는 질문이 따라붙겠지만, 봉사활동이든 자선사업이든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었다.
‘...그래도...그렇게 보이기 싫은걸요.’
솔직히 말해서 아이리스는 유진과의 관계를 좀 자랑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은 뭐하나 빠질 것 없는 일등 남편감 아닌가.
자랑하고 싶은 건 당연한 여성으로서... 아니, 암컷으로서 욕구였다.
물론, 카르네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그동안은 생각만 했다.
그러나 카르네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이라면 어느 정도는 꽁냥거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욕망이 들끓었다.
‘...그...그럼 연인이라고...?’
문뜩 스친 생각에 아이리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 유진과의 관계를 가장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면 연인이 맞다.
조금 전까지도 한참 연인다운 행위를 했으니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나이였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유진와 아이리스의 나이 차이가 제법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
아이리스는 자신의 연적, 릴리스와 비앙카를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들이 얼마나 적극적인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나이가 많다고 뒤로 물러나 있다가는 정말 뒤처질 뿐이다.
오히려 나이가 많은 만큼 적극적으로 들이대서 유진군을 쟁취해야 했다.
‘...차...차라리....야...약혼자는...’
잠깐 고민한 아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리스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갔다.
분명 유진군이 결혼하자고는 말했고,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결혼할 예정이지만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소개하는 건 너무 주책맞지 않은가.
‘....아아...모...모르겠어요! 그냥 확 도장 찍어버려요?!’
양손으로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린 아이리스가 불타는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
[사테르 고아원]
사테르 고아원 주변을 둘러본 나는 제법 놀랐다.
대부분의 고아원과는 달리 사테르 고아원은 겉보기에도 상당히 규모가 크고 시설 역시 카르네아 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아카데미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고급이었다.
“이쪽이에요. 유진군.”
아이리스의 안내를 따라 고아원 내부로 들어가자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리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여긴 하나도 안 달라졌네요.”
“아이리스가 어릴 때도 저랬나요?”
“후훗. 글쎄요? 유진군 생각에는 어때요?”
“음... 의외로 애들을 때리고 다녔을 거 같기도 하고..”
“....유진군! 저를 그렇게 보고 있었어요?!”
아이리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부를 거닐고 있으니 등 뒤에서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아이리스...?”
“...엄....원장님!”
목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본 아이리스는 거짓말처럼 환하게 미소지으며 달려가 안겼다.
“후후훗. 이제는 엄마라고 불러주지 않는 거니?”
“...하하...워...원장님도...어..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그러세요.”
“어머, 언제적이라니? 분명 재작년에 왔을 때도 엄마라고...”
“...그...그만...! ....유진군...아니에요!...엄...원장님이 놀리는거에요!”
엄마라고 부르기보다는 누나라고 불러야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젊은 외모.
사테르 고아원의 원장은 머리카락 색은 아이리스보다는 진하고 릴리스보다는 연한 분홍색을 띠었고 왼쪽 아래에 찍힌 눈물점이 시선을 끌었다.
“.....”
...이런 생각을 하면 엄청난 실례인 건 알지만, 전체적으로 굉장히 음란한 분위기를 지닌 여성이었다.
“아, 아이리스 그런데 이쪽에 훤칠한 남성분은 누구니?”
분홍 머리카락의 탓인가 노출된 부위가 거의 없을 정도의 옷을 입고 있는 데다 딱히 이상한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서 야하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그...그러니까...”
나는 우물쭈물하는 아이리스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리스와 교제 중인 유진이라고 합니다.”
“...!”
교제 중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아이리스의 손에 힘을 꽉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머나, 마침내 아이리스가 좋은 남편감을 데려왔네요.”
“나...남편이요?”
“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생각입니다.”
“유...유진군!”
아이리스가 입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지만, 나는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우후후, 둘이 보기가 참 좋아요.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엘라리스라고 합니다. 사테르 고아원의 원장을 맡고 있어요. 잘 부탁드려요.”
엘라리스가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기에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붙잡는 순간, 엘라리스는 한 발자국 다가오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후후훗...정말로...정말...좋을 거 같네요.”
“...네...감사합니다...”
뭔가 이상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감기는 반달 눈웃음과 코끝을 스치는 농염한 여인의 체향,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는 손바닥의 감촉까지.
첫인상 탓인가 그저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 마치 뱀이 손을 휘감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워...원장님?”
이상함을 느낀 건 아이리스도 마찬가진 것 같았다.
아이리스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때야 엘라리스가 내 손을 놓아주었다.
“어머나 이런 실례를 ...이런 남자는 오랜만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네.”
나는 조금 전까지 엘라리스가 붙잡고 있던 손을 바라보았다.
“....”
손등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엘라리스가 떨어지기 전에 손톱으로 살짝 그은 것이다.
실수는 아니다.
손톱을 긁으면서 엘라리스가 윙크를 하는 걸 봤으니까.
‘...왜?’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눈치는 있다.
이런 행위가 한밤중에 술집에서 발생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유혹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술집도. 한밤중도 아닌, 대낮의 고아원이란 말이다!
아무리 핑크머리라고 해도 처음 본 남자를... 그것도 딸처럼 여긴 아이리스가 남편감으로 데리고 남자를 유혹하지는 않을 거 아닌가.
‘...진짜 모르겠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
사테르 고아원을 한참 돌아다니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었다.
‘...수상할 정도로 분홍 머리가 많다.’
고아원장인 엘라리스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고아들... 아니, 어린애 중에서도 유난히 분홍 머리가 많았다.
“와! 잘생긴 오빠다!”
“오빠 안아줘요!”
“저는 목마 태워줘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분홍 머리를 가진 애들은 나를 보면 졸졸 따라와서 뭔가를 해달라고 했다.
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기에 해주고는 있지만,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 저기 원장님이 계시네요. 잠시만요. 제가 가서 불러올게요.”
“...?”
그렇게 애들이랑 놀아주던 와중 엘라리스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장은 엘라리스일텐데 원장님이 있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그러자 아이리스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엄...아니, 원장님은 쌍둥이신데 두 분이 원장직을 같이 하세요.”
“...아이리스 그냥 엄마라고 부르는 게 편하지 않겠어요?”
“유...유진군!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 나이가 몇인데 어..엄마라고 불러요!”
“안녕하세요.”
눈물점이 왼쪽이 아닌 오른쪽 아래에 찍힌 것을 제외하면 엘라리스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클라리스라고 합니다. 동생과 같이 사테르 고아원의 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유진입니다.”
“네, 동생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아이리스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이라면서요?”
“...워..원장님...”
“아이리스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요. 이런 남성과 만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죠.”
“그래요 아이리스. 이렇게 맛...멋있는 남성은 만나기 쉽지 않다고요?”
“....”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칼리오페라는 성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평가가 좋은지 모르겠다.
물론 객관적으로 봐서 내 외모가 훌륭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외모만으로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은 적은 없었다.
‘왜지?’
내가 이 수상한 고아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려던 순간.
“...선...생님...?”
익숙한 핑발의 목소리가 들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