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불치병은 불치병인데... (3)
* * *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릴리스는 눈치가 없는 편이다.
그것도 조금 심각할 정도로 말이다.
‘아...’
하지만 그런 릴리스조차 지금은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는 걸 알았다.
눈물을 펑펑 쏟고 있는 비앙카와 비비안, 그리고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선생님.
어떻게 봐도 이건 끼어들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새...생각해보니 저 릴리스 보지가 별로 안 안타까운...”
“릴리스!”
문을 닫고 나가려던 순간 선생님에게 손목이 붙들렸다.
‘선...선생님 설마 이 상황에서..!’
선생님의 성욕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 있지만, 설마 이 상황에서 발정할 줄은 몰랐다.
“...서..선생님...지...지금은...괘...괘찮다니까요. 나...나중에 다시 올게요.”
솔직하게 말하면 손목을 잡힌 것만으로도 애액이 넘쳐흐를 정도로 한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펑펑 울고 있는 저 둘 앞에서 섹스하기에는 성녀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많이 잘못된 것 같았다.
그러자 선생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성녀님 비앙카가... 아픕니다.”
“...네? 어디 가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앙카의 말로 들어서는 목숨이 위험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맹하게 풀려있던 릴리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릴리스가 능력을 각성한 그 날.
여신상의 아래에서 릴리스는 다짐했다.
비록 여신님께서 내리는 빛처럼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을 순 없을지라도 자신의 손이 닿는 범위라면 누구라도 구해내겠다고.
“그걸 먼저 말해주셨어야죠.”
조금 전까지 떨고 있었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당당하게 방안에 들어서는 릴리스.
“...쓰...쓸데 없는 짓 하지마.”
릴리스가 다가올수록 비앙카는 뒤로 물러났다.
무서웠다.
저 성녀님에게 치유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게 무서웠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순간 릴리스가 비앙카를 부드럽게 껴안으며 속삭였다.
“...금방 끝날 테니까요.”
후우웅—
릴리스가 눈을 감은 채 치유력을 쏟아붓는다.
그렇게 잠시 집중하고 있던 릴리스가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비앙카님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요?”
치유의 힘을 몸 안에 흘리면 상처 부위나, 병이 있는 곳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비앙카의 몸은 보지가 살짝 까진 것 말고는 다친 곳이 없었다.
“흐윽...그럴 줄 알았어....소...소용 없다고...말했잖아...”
성녀의 말을 들은 비앙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몸이 반 토막 날 뻔한 그 날, 비앙카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죽어가는 자신을 감싸는 릴리스의 엄청난 마력을 말이다.
그만큼의 마력을 쏟아 넣어도 치유할 수 없었던 게 지금 와서 갑자기 회복될 리 없지 않은가.
“이건 성녀도 치유하지 못하는 부상이란 말이야!”
“...저 릴리스, 이래 봬도 파르테논의 수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치유하지 못하는 부상은 없었습니다...”
“...그럼 나는 뭔데!”
비앙카가 울며 소리쳤다.
“나는 치유는커녕 어디가 문제인지도 못 찾았잖아!”
비앙카의 절규에 릴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릴리스에게도 비앙카 정도로 마기에 오염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비앙카에게도 혹시 모를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비앙카님 조금 진정하시고 증상에 관해 설명해주시면...”
“설명? 좋아! 내장을 칼로 난도질하는 고통과 함께 피를 쏟는다고! 그런데... 이게 정상이라고? 웃기지 마!!”
“...비앙카.”
“...그럴리가...없어요...피를 쏟을 정도로 큰 부상이라면 제가 못 찾아낼 리가..”
비앙카의 말을 들은 유진의 표정이 분노와 자기 혐오로 점칠 되었고, 릴리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고 있었다.
이때, 단 한 사람.
비비안만이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돌아갔다.
‘...언니...설마...?’
정상적인 여인이라면 당연히 겪는 것.
오히려 지금까지 겪지 않았던 비앙카가 비정상이라 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언니의 성격이 날카로웠던 게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그것의 전조로 인한 상태 불량이었다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맞아들어가는 퍼즐 조각에 비비안의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내린다.
물론 만일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면 언니에게 있어 이건 엄청나게 축하할 일이 맞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동안 언니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포기하라고! 어설픈 희망을 주지 말라고! 나도 마음의 정리를 할테니까!”
“비앙카... 그런 말 하지 마요.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올테니까... 제발...”
“...그만둬...그만...두라고...”
‘언니도 그만둬요!!’
이 심각한 분위기에서 비비안은 도저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른 비비안은 고개를 돌려 릴리스를 바라보았다.
“...저...저 릴리스도...다시 한번 찾아볼께요...”
유진님이나 언니는 그렇다 쳐도 왜 성녀님은 이 설명을 듣고도 눈치채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성녀님?”
“...비비안님.”
“언니 말을 듣고 떠오르는 게 없으세요?”
“아뇨... 엄청나게 많아요. 그래서 더 문제에요. ....그 지금 비앙카님 몸 안에 일치하는 어떤 증상도 찾을 수 없었어요.”
당연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게 병으로 진단 된다면 인류의 절반은 병자일 테니까.
“성녀님 잠시 귀 좀...”
비비안은 릴리스에게 다가가 자신의 가설을 속삭였다.
“아...! 그... 그 생각은 못했네요! 비앙...”
“자...잠깐만요 성녀님. 혹시... 제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먼저 확인을 하고서 말하죠.”
솔직히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언니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
‘구속 마법도 준비하고...’
비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냥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흑역사가 아니다.
만약 자신이 이 상황의 주인공이었다?
비비안은 그 즉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질 자신이 있었다.
“그것도 그러네요! 저 릴리스 확인해보겠습니다!”
비비안은 릴리스가 언니에게 다가가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흐윽...유...유진아...나...무...무서워...”
“걱정 마요. 비앙카. 제가 곁에 있어요.”
아직도 유진님의 품 안에 안겨서 울고 있는 언니를 보고 있자 비비안은 손발이 오그라들어 견딜 수 없었다.
“비앙카님.”
“오...왜! 부르는데..”
“잠깐 저 좀 따라오세요.”
“...시..싫어...안갈거야.”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요! 어서요!”
“...성녀님. 지금은...”
내가 릴리스를 만류하려 하자 엄청난 시선이 느껴졌다.
‘비비안?’
시선을 따라가자 비비안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을 한 채 방해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마구 젓는다.
‘...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비비안이 시킨 대로 비앙카를 놓아주자 릴리스가 화장실로 끌고 들어간다.
그리고 화장실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
“...화장실에는 왜 끌고 온 거야.”
“비앙카님. 가만히 있으세요.”
“흐에!..뭐..뭐야!...왜...왜..갑자기...이런 짓을 하는건데...”
“가만히 있으시라고요!”
“...흐읏! 하으..이..이러는데...어..어떻게 가만히 있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비앙카의 신음이 울려 퍼졌다.
“후우... 혹시나 했는데 확실하네요!”
“그러니까 뭐가 확실한데!”
“그러니까 비앙카님이....”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릴리스의 목소리가 작아진 터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마...마...말도 안 돼!! 나는 육체가 어린 시절로 고정되어있으니까 그런 거 안 한단 말이야!!”
“부작용은 보통 신체의 노화예요. 미성숙한 상태에서 고정되어있던 몸이 성장했다면...?”
“....진짜 그거라고?”
“네! 진짜 그거에요!”
잠시 후, 비앙카가 새빨개진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
“비앙카?”
“....”
“무슨 일이에요 비앙카. 성녀님이 뭐라고 했는데요?”
“....”
“비앙카!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아무리 부르고 소리쳐봤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비앙카.
그때 비앙카의 등 뒤에서 릴리스가 폴짝 뛰면서 말했다.
“비앙카님이 첫 생리를 했데요!”
“다,..닥...쳐!!”
“비앙카님 나쁜 말 하지 마세요! 생리는 창피한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아이를 임신할 수 있다는 축복이죠! 아스란 제국에서는 첫 생리를 하면 축하의 의미로 팥밥을 먹는다는데!"
“알았으니까 쫌 닥치라고!”
“....”
릴리스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물론 비앙카는 창피해서 죽으려고 하지만 나도 창피한 건 마찬가지였다.
‘미친 새끼...’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침대에 앉았다.
─편지는 받았지만 제가 이 편지를 읽을 일은 없을 겁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낼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걱정 마요. 비앙카. 제가 곁에 있어요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비앙카의 생리통을 낫게 해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씨발!!’
앞으로 10년은 오늘 일을 떠올리며 이불을 차댈 것이다.
그때, 비앙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유진아 나..낫..낫게해준다며..”
“비...앙카?”
“나...나는 생리인 거 알고 있었는데. 너...너가....그러는거 어...엄청 웃기더라.”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비앙카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이유?
‘나를 희생시켜 이 수치심의 지옥에서 벗어나겠다는 거겠지...’
원래 인간은 약자를 공격할 때 자신의 강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비앙카는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했다.
“...허...허졉...이..이런 걸로 속...속아넘어...가는....?
스으윽─
비앙카의 놀림 속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편지를 꺼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