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불치병은 불치병인데... (1)
* * *
「시험종료인 것 입니닷...! 다들 손모가지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이 울림과 동시에 에이미 교수의 언령이 모두의 손을 멈추게 한다.
「시험지는 이쪽으로 모이는 것입니닷...!」
촤르륵─
허공에 떠오른 시험지가 에이미 교수의 앞으로 모였다.
시험지의 개수를 확인한 에이미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들 수고한 것 입니닷...! 그럼 주말 잘 보내라는 겁니닷...!”
에이미 교수가 짧은 다리로 걸어나가는 순간 탄식과 탄성이 울려 퍼진다.
‘그럭저럭 봤네.’
나는 제자리에서 기지개를 쭉 켰다.
시험준비를 거의 못했던 것 치고는 나쁘지 않게 본 것 같았다.
‘...순조롭네.’
이건 시험을 말한 게 아니다.
최근 들어 이렇게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게 여유로웠다.
물론 여유로운 만큼 훈련의 강도를 높였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평화로울 수 있었다.
‘...릴리스도 그렇고.’
릴리스의 첫 경험을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한 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는 웬만해선 낮에는 달려들지 않았으니까.
—...선생님...저 릴리스를...따...따먹어주세요♥
....물론 때때로 밤에 찾아와서 정기를 쪽 빨아갔지만 말이다.
그때마다 조금 피곤하긴 해도 이 정도면 나름대로 잘 해결했다고 할 수 있었다.
“유~진아♪”
그때, 등 뒤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목소리를 듣기 전부터 코끝을 스치는 장미 향기 때문에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공포심이 들지는 않았다.
“...황녀 전하.”
오히려 마음 한편에 가시처럼 박힌 감정이 황녀의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치밀었다.
이것이 ‘지금의 나’의 감정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이런 감정이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성검에 담긴 감정은 분명히 ‘내’ 감정이었다.
나로서는 최대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해보지만, 멋대로 반응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
“...황녀 전하?”
“...응. 아니야. 아무것도. 잘 가. 그럼.”
“....?”
짧게 말을 잘라서 뱉은 리아나가 빠른 걸음으로 복도로 나갔다.
평상시의 리아나라면 절대로 이런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서라도 자리를 떴어야 했다.
‘...뭐...야?’
조금이라도 더 유진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는 가면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상해.’
리아나 루멘하르크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
단순히 민감함을 넘어 상대의 눈을 바라보면 어떤 감정을 감추고 있더라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다.
딱히, 노력해서 얻어낸 건 아니다.
수많은 시선 속에서 본성을 감추며 살아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건 유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진이 자신을 바라볼 때 언제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살짝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즐거웠다.
은근슬쩍 압박할 때마다 어떻게든 벗어 날 수 있는 답을 찾아오는 유진을 보는 게 리아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단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놀려주고 싶었지만...
유진을 망가트리고 싶진 않았기에 꾸욱 참고, 참고, 또 참았다.
그러나 오늘은 참지 않았다.
시험도 끝났고, 최근 들어 유진에게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였기에 약간 골려줄 생각으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황녀전하.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에 희미하지만, 애정이 담겨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리아나의 사고가 정지했다.
‘...도대체 왜?’
그동안 수많은 추파를 던졌을 때조차 반응하지 않았던 유진이 성욕도, 권력욕도 아닌 순수한 애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받는 게 낯선 건 아니다.
오히려 타인에게 사랑을 받는 건 리아나에게 있어서는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능력 대부분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타고난 권력, 외모만으로도 나비를 유혹하는 꽃과 같이 사람을 끌어들였으니까.
....하지만 그 상대가 유진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당황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유진...칼리오페.”
리아나가 입술을 꽉 깨물며 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도대체 뭘까 이 감정은.
분노? 짜증? 모르겠다.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에 리아나는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
‘...뭐야?’
나는 황녀가 떠난 자리를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황녀의 반응이 뭔가 불길하기 짝이 없었지만, 쫓아가서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저벅─
학생들 대부분이 교실 밖으로 떠났지만 내 앞에는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고개를 돌리자 무시무시한 크기의 마력 저장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 크기의 마력 저장통을 가진 사람은 제국을 다 뒤져봐도 한 명뿐일 것이다.
“유...유진...님...아..”
여전히 반말하는 게 서툰 비비안.
“비비안. 무슨 일이야?”
“그...그...초...초청제때 예...예정 있어...?”
웬일로 기숙사가 아니라 교실에서 아는 척을 하나 했더니...
루시아나 비앙카 몰래 약속을 잡기 위해서였나보다.
그 소심한 비비안이 용기를 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초청제
폐쇄적이기 짝이 없는 카르네아가 2년에 한 번 개방되는 나름대로 큰 이벤트.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원래라면 취소되어야 하는 이벤트니까.’
시험 직전에 ‘되살아난 타락’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그로 인해 사고가 터지며, 시험이 미루어지고, 자연스럽게 초청제 역시 취소되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되살아난 타락’을 한참 일찍 공략한 탓에 초청제가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비비안의 부모님이 오는 건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게 있어 비비안과 비앙카는 목숨까지 걸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베아트리스가를 좋게 볼 수 없었다.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 비비안은 학대에 가까운 방치를 했고, 반대로 비앙카는 단순히 가문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베...베아트리스가에서는... 아무도 안올거...야..”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읽었는지 혼자서 먼저 답하는 비비안.
“그래? 칼리오페 가문에서도 안 올 거 같은데...”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칼리오페 가문에서는 애초에 그런 초정제가 있는지도 모를 거다.
‘...절대 안 말하지.’
아버지는 첫째 형님께 가주 자리를 물려준 이후 내가 준 ‘맛집’ 여행을 다니고 있으니 오더라도 가르시아나 레이카가 올 텐데...
‘그 둘이 카르네아에 온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그럼.....나랑...단 두..두...두..둘이서...초...초청제....같이...”
굳이 ‘단둘’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하는 비비안.
비비안의 용기에 답하기 위해 나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 나서.
─쪽
비비안을 품 안에 끌어당겨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초청제 때 보자.”
“...응...유진아.”
붉게 상기 된 비비안의 얼굴에 흐드러진 미소가 피었다.
***
‘...또야.’
늦은 밤,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비앙카가 눈을 떴다.
처음에는 유진의 정액을 담고 있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관계를 맺지도 않은 날에도 그런 걸 보니 그 문제는 아니었다.
비앙카가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았다.
양팔에 비비안과 루시아를 껴안고 자는 모습.
그 모습을 보자 괜히 짜증이 난다.
유진에게도 저 우르엘라의 차기 가주에게도 말이다.
‘못된 년.’
루시아를 바라보며 비앙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콱 쥐어박고 싶다.
기다리는 사람이 세 명이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옆에서 자는 게 맞지 않는가?
하지만 저 못된 년은 단 한 번도 유진의 옆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그나마 비비안이 배려해줘서 하루씩 번갈아 자고 있지만...
그래도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다.
‘사랑이 무슨 선착순도 아니고!’
꼬집─
비앙카가 화풀이 겸으로 자는 유진의 코를 막았다.
“...으음...”
유진이 신음을 흘리며 우스꽝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자 기분이 조금 풀린다.
“...귀여워.”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
그때, 비앙카의 머릿속에 한 생각이 스쳤다.
조심스럽게 유진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비앙카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진은 비앙카가 제일 귀엽다고 생각한다... 유진은 비앙카가 제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말하면서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지만 원래 사랑에는 자존심을 세울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자신이 유진의 첫 번째가 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진은 비앙카를 제일...끄윽...!!”
속삭이던 도중 갑작스럽게 아랫배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느껴졌다.
‘뭐...뭐야...’
비앙카의 머릿속에서 성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부상을 치료해 본 건 저도 처음이라 어떤 후유증이나 부작용이 있을지도 몰라요...
‘...진짜...부작용이야..?...끄윽...’
처음 최근 들어 이물감과 점점 고통이 심해진다고는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수준이 다르다.
마치 검에 베여 내장이 뜯겨나갔을 때와 비슷한 고통.
‘...아...파...’
조금 전까지는 유진의 옆에서 잠들지 못해서 서운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가장자리에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혹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유진이나 비비안을 깨웠을 수도 있을 테니까.
‘끄으...윽...하아..’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문 비앙카가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
‘이게...뭐야..’
비앙카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