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낙화(花) (3)
* * *
일단 길을 뚫기는 했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비앙카는 가장 앞에 서주세요.”
신체 능력으로 따지면 우리 중에서 비앙카가 제일 높다.
즉,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누구보다 먼저 반응할 수 있다는 것.
“성녀님은 가운데.”
힐러를 보호하는 것은 기본 중 기본.
거기에 가운데에 서는 것으로 앞과 뒤, 어느 쪽에서 부상자가 생겨도 즉시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마지막은 제가 가겠습니다.”
비앙카와 릴리스의 능력은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기에, 마법과 고유능력으로 여러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내가 후방에 서는 게 좋았다.
포지션 점검이 끝나고 각자의 방식으로 긴장을 푼 우리는 벽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럼, 돌입합시다.”
***
「바람—칼날」
박쥐를 닮은 하급 마물이 날아오던 중, 바람 칼날에 썰려 떨어졌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별다른 함정이나 위험한 마물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지금 나왔던 박쥐 새끼처럼 하급 마물이 전부.
그러나 어두운 공간 속,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날지 모른다는 긴장감은 체력과 정신을 좀먹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비앙카의 말과 함께 끝이 났다.
“막다른 골목이야.”
내가 뒤따라가 확인해보니 비앙카의 말대로 막다른 골목이 보였다.
“...”
커다란 문이 서 있는 골목이 말이다.
문은 알 수 없는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손잡이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선생님, 문 너머에서 마기가 느껴져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마기가 풀풀 풍겨 나왔다.
“일단 열어봐야지.”
그렇게 말한 비앙카가 양쪽 문에 손을 올리고 힘을 줘보지만.
“...으으으!!”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아...하아...이거 무거워...”
“같이해요. 제가 오른쪽을 열게요.”
앞으로 나간 내가 ‘신체 강화’를 사용하며 양손으로 문을 밀었다.
끼기기기─
비앙카와 내가 힘을 동시에 주자, 문은 기분 나쁜 금속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저게 뭐야.”
열린 문틈으로 비앙카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찌푸리며 안을 노려보았다.
...동시에 놈도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비앙카 눈 돌려요!!”
놈의 붉은색의 안광을 확인하는 순간 내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으...으아...아아...시...싫어...!!”
안광을 정면으로 마주친 비앙카가 제자리에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하필 저 녀석이!’
지난 경험상 페이크 보스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하필이면 주사위의 눈이 최악의 수를 뽑았다.
내가 ‘아카조교’를 플레이 한 횟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저 녀석을 페이크보스로 만난 건 딱 2번.
그리고 그 2번 전부...
‘개처발렸지...’
내가 주먹을 꽉 쥠과 동시에 앉아있던 놈이 창을 들고 일으켰다.
시뻘건 안광을 내뿜으며 온몸에 붉은 갑옷을 두른 기사.
인간의 몸으로 마물의 힘을 탐하며 마기를 거듭해 탐식한 끝에 탄생하는 타락의 상징.
‘...데스나이트’
전투 능력만 따져도 데스나이트는 상급 마물 중에서도 상위권.
하물며 저 데스나이트는 타락의 힘까지 이은 터라 ‘되살아난 타락’처럼 완전한 타락은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감정 정도는 증폭시킬 수 있다.
비앙카와 데스나이트를 사이에 선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 내가 저 녀석에 패배했다고는 해도 그건 과거의 데이터일 뿐.
지금의 스펙이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데스나이트만을 상대했을 때의 이야기, 여기서 비앙카가 폭주하면 전부 끝이다.
‘...데스나이트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비앙카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상황판단을 마친 내가 릴리스에게 소리쳤다.
“성녀님, 잠시 방어를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신호로 데스나이트가 창을 쥐고 달려들었고.
콰아앙─!
반투명한 방어막이 데스나이트의 창을 막아 세웠다.
“으으으으!!”
릴리스의 마지막 고유능력인 방어가 펼쳐진 것이다.
치유, 정화, 방어.
릴리스가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들.
이 능력 중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고급 인력으로 대우받기 충분할 정도지만, 릴리스는 셋 모두 가지고 있었다.
“서...선생님!!..저..릴리스...오래는...못 버텨요!!”
릴리스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하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싫어..유..유진아..나...버..버리지마...”
“비앙카!”
비앙카가 몸을 벌벌 떨며 나를 붙잡아온다.
그래도 아직 내가 누군지 알아보는 걸 보면 최악의 단계는 아닌 것 같았다.
“...유...유진아....유진아..가지마..버리지마..내..내가잘못했어.”
“비앙카! 악몽에 삼켜지지 마세요.”
“...너...너가...나를...버...버리고.”
나는 비앙카의 턱을 붙잡고 거칠게 입을 맞추고는 혀를 집어넣어 입안을 전부 맛보듯 구석 핥았다.
“...쪼옵...쪽..쪼옵..”
그렇게 숨이 벅찰 때까지 입을 맞추고 있자 비앙카의 눈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온다.
“...하아...유진...아...”
“비앙카는 이것만 기억해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비앙카를 버리지 않습니다.”
“....응....”
그때야 정신을 돌아오고 있는지 얼굴을 붉히는 비앙카.
평상시라면 이대로 침대로 갔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
“비앙카 이제 좀 괜찮아요?”
“...응.”
“그럼 다행이네요. 좀 더 하고 싶지만, 지금은 바빠서요. 여기서 쉬고 있어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비앙카가 내 손목을 붙잡는다.
“...비앙카?”
“내가 할 거야.”
“무리하지 마요.”
“무리 아니야. 진짜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한 비앙카의 눈에는 진실만이 담겨있었다.
“...하아... 알았어요. 대신 무리라고 판단 되면 바로 빠져요.”
“응. 알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비앙카가 목을 풀며 앞으로 걸어간다.
쾅—! 쾅—! 쾅—!
그 사이 데스나이트의 미친듯한 공격을 받아내던 방어막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저 새끼가 그딴 개 같은 환상을 보여줬다는 거지.”
비앙카가 이를 까득 갈며 데스나이트를 노려보았다.
“서..선생님! 더...더는...못버..텨..!”
“...버틸 필요 없어. 방어막 풀어.”
“...저...정말 풀어요!!”
파아앙—!
그 말과 동시에 방어막이 해제되며, 비앙카가 바닥을 박찼다.
“넌 뒤졌어!”
보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오른 비앙카의 몸에 마나가 휘감긴다.
데스나이트는 비앙카를 향해서 정확히 창을 내질렀지만, 마나를 방출시켜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 비앙카는 데스나이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데스나이트는 즉시 들고 있던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았지만, 비앙카는 그것조차 예상했다는 듯 검면을 후려쳐 튕겨낸다.
“안 통해! 이 씨발새끼야!!”
콰아앙—!
데스나이트의 심장 부위에 정확하게 날아드는 비앙카의 주먹.
평범한 사람이라면 즉사할 정도로 가슴 부위가 비앙카의 주먹 모양으로 움푹 파였지만, 상대는 언데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죽음의 기사는 공격을 이어간다.
탓—!
한쪽 발로 몸을 지탱한 비앙카가 종이 한 장 차이로 검을 피하며 몸을 회전시켰고.
콰아앙—!
그 회전력을 이용해 비앙카가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후려 찼다.
데스나이트의 투구가 날아가고, 붉은 안광을 내뿜는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병신, 존나 못생겼네.”
비앙카의 말 때문일까, 아니면 투구가 날아간 탓일까.
분노한 데스나이트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비앙카는 주먹을 장전하고 기다리던 비앙카는 처음의 공격과 조금에 오차도 없는 위치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붉은 갑옷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 데스나이트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친다.
“어딜 도망가 씹새끼야!”
다시 한 번 비앙카의 주먹이 내질러졌고.
콰앙—!
박살 난 갑옷은 더 이상 비앙카의 주먹을 막아내지 못했다.
“....”
데스나이트는 구멍이 뻥 뚫린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무릎 꿇었다.
“흥, 허접이 깝치고 있어.”
데스나이트가 먼지가 되어 바스러지고, 비앙카의 앞에는 검은 마기만이 남았다.
처음 봤을 때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린 비앙카가 으스대며 말했다.
“어땠어?”
“...훌륭했어요.”
나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내가 알고 있던 비앙카는 절대로 데스나이트를 압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나와 싸웠던 비앙카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비앙카는 데스나이트를 애들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것으로 지난 일 년간 비앙카가 얼마나 자신을 갈고닦았는지 알 수 있었다.
“흥,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정말 수고했어요 비앙카. 좀 쉬고 있어요.”
“응. 알았어.”
나는 비앙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마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녀님은 마기의 정화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마기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 릴리스가 정화의 힘을 불어넣는다.
‘그동안 나는...’
릴리스가 뒤처리하는 사이 나는 본래 목표였던 ‘숙주’를 탐색하기 위해 좀 더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안 보이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숙주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선생님! 정화 끝났어요!”
“수고했어요. 그럼 ‘숙주’를 찾는 것 좀...”
오싹─
그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공포로 물든다.
천장에서 내려온 ‘그것’에서는 데스나이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포악하고 윤택한 마기가 느껴졌다.
“...너..."
녀석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느낀 절망감.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망설임.
놈은 그 틈을 녀석은 놓치지 않았다.
콰아앙—!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녀석은 내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못 피해...’
놈을 검을 휘두르는 순간 나는 죽음을 직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검의 궤적에서 벗어 날 수는 없었다.
“...유..진..!”
그때, 비앙카의 작은 손이 나를 있는 힘껏 밀쳐냈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비앙카가 대신 서 있었다.
“...비앙카!”
녀석이 검이 몸을 베어내기 직전, 비앙카는 웃었다.
마치 자신의 할 일을 해냈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놈이 검을 휘둘렀고.
...솟구친 핏물이 뺨을 때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