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낙화(花) (2)
* * *
“도착했어요!...어라?”
“...여긴...”
성녀가 손가락을 가리킨 곳은 카르네아의 지하실로 향하는 입구였다.
사실 말이 지하실이지 지하실이라기 보다는 지하수도가 더 알맞은 이름일 것이다.
구조 대부분이 방보다는 수도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건 이름 같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양호 마망의 말이 사실이었다고?’
─아무래도 카르네아 지하실에 악령이 있는 것 같아요.
양호 마망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이렇게 나타날 줄을 상상도 못 했기에 그저 웃어넘겼다.
“...저 릴리스! 돌아가겠습니다!”
지하수도의 입구를 확인하자마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뒤로 돌격을 하려는 성녀님.
나는 팔을 쭉 뻗어 도망치는 릴리스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성녀님, 어딜 가십니까.”
“서.. 선생님 놔주세요! 저 릴리스는 안에 못 들어가요!”
버둥버둥 팔다리를 흔드는 릴리스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 릴리스가! 알버스 싱글도어님께 의뢰를 받은 장소가 여기라고요!”
릴리스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1회차에서 릴리스가 받았던 의뢰는 무덤의 정화다.
하지만 마기의 집합장소가 무덤에서 지하수도로 바뀌었으니, 자연스럽게 릴리스의 의뢰도 바뀐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한 가지.
‘왜 무덤에 있어야 할 마기가 지하수도로 모이냐는 거지...’
그것도 릴리스가 아닌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도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말이다.
“그...그러니까 선생님 놔주세요! 저, 릴리스! 이번 의뢰를 해결하면 파르테논으로 돌려보내질 거란 말이에요!!”
릴리스가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알겠다.
간단히 말해서 카르네아에서 더 놀고 싶은데 벌써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거 아닌가.
물론 이게 급박한 상황이었다면 릴리스도 태도를 달리했을 것이다.
릴리스는 자기가 놀고 싶다고 다른 사람이 위험해질 걸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지하수도 안에서 느껴지는 마기의 농도는 희미한 수준.
이 정도 마기로는 끽해봐야 최하급 마물정도가 튀어나올 것이다.
릴리스의 어깨를 잡은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님, 정조대... 풀고 싶지 않습니까?”
“풀고 싶어요... 호,혹시 풀어주실 건가요 선생님?”
“아뇨, 풀고 싶으면 일을 하셔야죠.”
“...그...그건....시..싫어요! 정조대는 풀고 싶지만, 파르테논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 음란 성녀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
‘누가 보내준다고.’
이제부터 앞으로는 릴리스의 힘이 필요할 일이 잔뜩이다.
한 번 내 눈에 띈 이상, 설령 릴리스가 파르테논에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내가 보내지 않을 거다.
“파르테논으로 돌아가는 건 제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서...선생님. 정말요?”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요.”
“...선생님...”
릴리스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자.
─툭
비앙카가 관심을 가져달라는 듯 옆구리를 쿡 찔렀다.
“....”
너무 릴리스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던 건 인정하지만, 성녀를 떠나 보낼 순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릴리스를 붙잡으려면... 돈 좀 써야겠네.’
지하수도의 소란이 사라지는 게 문제라면 슬라임이라도 잔뜩 사서 풀어놓으면 될 것이다.
슬라임의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물체를 공격하지 않는 슬라임의 특성상 다른 계열의 마물이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물론 슬라임도 잔뜩 모이면 점액 때문에 수도가 막히는 등의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똥물이 좀 튀는게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 않은가.
"자, 그럼 들어가요! 선생님!"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릴리스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
“...냄새나...”
지하수도를 걷던 비앙카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앓는 소리를 내었다.
냄새난다는 표현이 한참 부족해 보일 정도로 지하수도의 악취는 지독했다.
베아트리스 가문이 아무리 망해가고 있다 한들 귀족 가문이다.
당연히 태어나서 비앙카는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을 테니 구토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 했다.
...물론 내 상황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지럽네.’
악취가 너무 심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여기서 유일하게 멀쩡한 것은 저 음란 성녀뿐.
얼마나 멀쩡한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흐흐응~”
뇌가 꽃밭이라 이 악취도 못 느끼는 게 아니라면 릴리스의 고유 능력 중 하나인 ‘정화’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던 내가 결심했다.
‘이런 곳에서 성녀님의 마력을 낭비하는 건 아쉽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숙주’를 찾기 전에 나와 비앙카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성녀님.”
“네! 선생님.”
“...지하수도의 내부를 정화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성녀님이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저! 성녀 릴리스! 능력을 보여드릴 때가 왔군요!”
그렇게 말한 릴리스가 등에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순백의 옷을 꺼냈다.
‘...성녀복...?’
왜 가방을 메고 왔냐고 생각했더니 설마 성녀복을 가져왔을 줄이야.
스르륵—
성녀복을 꺼낸 릴리스가 주저 없이 치마를 내리기 시작하자, 비앙카가 눈을 휘둥그래 뜨고 달려들었다.
“뭐 하는 거야! 이 미친년아!”
“왜, 왜 그러세요?”
“뭘 왜 그래! 치마를 왜 벗는데!!”
“....?”
비앙카가 기겁하며 말리자,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릴리스.
“...선생님과 비앙카님은 이미 제 보지까지 보셨잖아요? 그러니까 정조대 정도는 보여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데! 그리고 성녀가! 보지 같은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때랑 상황이 다르잖아! 여긴 밖이라고!!”
릴리스의 한 마디에 세 개씩 반박 거리를 찾는 비앙카.
“...그래도 아무도 없는데!”
“유진이 있잖아!! 그리고 아무도 없어도 수치심이라는게....!! 아! 몰라 됐어! 네 마음대로 해!!”
성녀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비앙카가 이내 포기한 듯 짜증을 내었다.
마침내 릴리스가 이성적인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인 것 같았다.
“...넌 뭘 보고 있어! 뒤로 돌아!!”
“릴리스의 말대로 보지 다 봤는데 굳이 그럴...”
“닥치고 돌라고!”
비앙카가 이를 으득 갈면서 말했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렸다.
“저 릴리스! 준비 완료에요!”
잠시 후, 옷을 다 갈아입은 듯 성녀님이 소리쳤다.
‘...오.’
새하얀 성녀복을 입은 릴리스는 과연 ‘성녀(??)’ 다운 모습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신성함이 흘러넘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릴리스의 신장과 맞지 않는 크기의 신성력저장통 때문에 시선이 그쪽에 쏠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시작 할게요!”
선언과 함께 릴리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과 반응해 성녀복의 소매가 펄럭거리며 갈색이었던 머리끝이 점점 진한 분홍빛으로 물든다.
“...!”
그리고 릴리스가 다시 눈을 뜨는 순간, 릴리스의 중심으로 정화의 기운이 퍼져나간다.
후우웅—!
먼저 공기가 울창한 산림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개운해졌고, 기운에 닿은 족족 오물(物)과 오수(?) 역시 순식간에 정화되어 수도 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하게 변했다.
‘...아마 당장 퍼먹어도 문제가 없겠지.’
...물론, 기분상의 문제도 있으니 마시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 수준의 정화를 가볍게 해내는 릴리스의 능력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후우...! 어때요!”
작은 키와 맞지 않게 커다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릴리스.
“...쯧, 좀 치네.”
비앙카도 이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작게 혀를 차고는 중얼거렸다.
“...후훗! 이게 저 릴리스! 파르테논의 수석이자! 여신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종이랍니다!”
성녀가 정화를 사용한 이후, 지하수도의 탐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부가 지독할 정도로 오염이 되어있다는 걸 제외하면 다른 방해물은 존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찾았어요! 여기에요!”
성녀가 보여준 것은 효과는 약하지만, 범위가 넓은 기술.
그래서인지 마기가 섞여 있는 오물은 정화되지 않았다.
검은색 도화지에서는 검은 선을 찾기 어렵지만, 흰색 도화지에서는 검은 선을 찾기 쉬운 것처럼.
정화과 끝난 지하수도에서 오물을 찾는 건 그지 어렵지 않았다.
“...수고했어요.”
내가 오물이 덕지덕지 묻은 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감각을 집중하고 있자면 희미하지만 분명 안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느껴졌다.
똑똑—
벽을 살짝 두드려보자, 내부가 텅 비어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혹시 벽 주변에 장치가 있을까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부숴야겠는데요.”
내가 마법으로 벽을 부수려고 하자 비앙카가 어깨를 툭 두드렸다.
“비켜. 내가 할게.”
성녀님의 활약에 자신도 밀릴 수 없다는 걸까.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나서는 비앙카.
“비앙카, 조심해요.”
“흥, 됐으니까 파편이나 안 튀게 물러나 있어.”
비앙카의 말대로 반걸음 정도 뒤로 더 물러나자 비앙카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탓,탓. 가볍게 두어 번 정도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비앙카가 벽 한가운데에 주먹을 날린다.
콰아앙—!
비앙카의 주먹이 벽에 닿는 순간 굉음과 함께 벽이 무너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