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낙화(花) (1)
* * *
“...하아.”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고있자 비앙카가 툭 말을 던졌다.
“너 피곤해 보인다?”
“악몽 때문에 잠을 설쳐서...”
꿈이라곤 해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모녀의 캣파이트를 보니 다시 잠들기 쉽지 않았다.
“흐음... 그래?”
재미있는 걸 봤다는 듯 히죽거리는 비앙카.
“우리 유진이가 얼마나 긴장했길래 악몽까지 꿨을까?”
“...”
비앙카는 오랜만에 나를 놀릴 생각에 잔뜩 신나보였다.
...악몽이라고 해도 그런 종류가 아닌데, 뭔가 단단히 오해한듯 했다.
“에베베, 유진이 알고 보니 겁쟁이였네~.”
하지만 이런 거로 즐거워하는 비앙카를 보니 굳이 오해를 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때, 유진아 이 누나가 손이라도 잡아줘?”
비앙카는 손을 내밀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나름딴엔 성숙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른 흉내 내는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뇨, 괜찮아요.”
“...흥, 어차피 나도 안 잡아주려고 했어.”
살짝 반격해주자 바로 삐져서 콧김을 뿜어내는 비앙카.
“씨이, 그 음란 성녀는 왜 이렇게 안 오는데!”
그리고 애꿎은 성녀님에게 불평을 내뱉었다.
“아직 시간 좀 남았잖아요.”
“몇 분이나 남았다고! 설마 길이라도 잃은 거 아니야?”
카르네아에 입학하고 벌써 몇 주가 지났는데 설마 그러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릴리스라면 뭔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지난 일주일 동안 멜피사의 더티플, 양호 마망과의 착유플, 비앙카와 나데나데플, 루시아와 SM플, 비비안과의 알몸산책플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릴리스와 약속했던 날짜가 다가왔다.
‘일주일이 짧긴했지...’
아무리 릴리스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한들 ‘촉수’를 정화하기에 일주일은 빠듯한 시간이라는 건 알고 있다.
‘...숙주가 발견되기만 했어도.’
무덤에서 ‘되살아난 타락’의 숙주만 찾았어도 좀 더 여유 있게 기간을 잡았겠지만, 나로서는 최대한 빨리 불안요소를 제거 하고 싶었다.
“...아니면 무덤이라 무서워서 도망쳤다던가.”
“그럴리가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아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는건 아니지만, 성녀님이 그런 쪽을 두려워하는 건 본적이 없었다.
애초에 파르테논에는 카르네아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묘지가 존재하는 데다, 그곳에서 가장 많은 기도를 드리는게 릴리스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안 오냐고! 이젠 진짜 시간이 됐잖아!”
“곧 오겠죠. 조금만 더 참아봐요. 선배. 알았죠?”
나는 비앙카를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었다.
“씨이, 애 취급하지 마.”
“네, 알았어요.”
“누가 머리를 쓰다듬지 말래!”
“이거 하지 말라는 거 아니었어요?”
“머리는 계속 쓰다듬는데 애 취급은 하지 말라고!”
비앙카의 어리광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참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비앙카가 원하니 해줘야지 어쩌겠는가.
“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그렇게 하라고.”
그렇게 잠시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 비앙카의 기분이 풀렸는지 갑작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선배?”
“왜, 뭐, 어쩌라고.”
팔짱은 낀 건 비앙카면서 부끄러운지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빠르게 말을 쏟아낸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그게 뭐 어때서! 보라고 해!”
“소문 날 텐데요?”
“흥, 그럼 나야 좋지 뭐.”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다시 비앙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비앙카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네가 내 남자라고 자랑하는 거니까!”
“...”
“내가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얼마나 자랑하고 싶은 줄 알아?”
당장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참으로 귀여운 대사.
하지만 지금 내게 그런 스캔들이 생겨서는 안 된다.
“선배...”
“됐어! 말하지 마! 알아. 나도 안다고! 그래서 이렇게 새벽에! 무덤가에서! 몰래! 하는 거잖아! 씨이, 다른 애들은 손잡고 데이트도 하고 그러던데...”
“미안해요...”
내가 진심을 담아 사과하자 비앙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흥, 미안하면 음란 성녀 빼고 우리끼리 들어가던가. 어차피 별거 없을 거라며.”
비앙카가 은근히 기대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돼요.”
“왜! 왜! 안 되는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비앙카의 말대로 지금 단계에서 ‘숙주’를 찾는다고 해도 별다른 위협은 존재하지 않을 거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페이크 보스의 출현이지만.’
객관적으로 봐서 페이크보스는 상급 마물 수준이다.
결코 난이도가 낮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와, 비앙카가 힘을 합친다면 위협이 될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또다시 늑대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의 나도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자만했다.
어느 하나 잘못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될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자만의 대가를 치렀다.
‘자만하지 말자.’
“맨날 만일에 사태래... 알았어. 기다리면 되잖아.”
둘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섭섭했는지 비앙카의 입이 잔뜩 튀어나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자 이젠 눈까지 샐쭉하게 뜬다.
“뭐야. 나 보면서 왜 웃어!”
“선배가 삐진 게 귀여워서요.”
“하, 갑자기 뭐라는 거야!”
코웃음을 치며 비앙카가 선언했다.
“난 항상 귀여웠어.”
“...”
“왜 대답이 없어.”
“...성녀님이 언제 오시려나.”
“왜 대답이 없냐고!!”
원했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얼굴을 붉게 물들인 비앙카가 달려들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선배가 귀여운 건 당연하잖아요.”
“씨이...짜증나게...됐어. 넌 가서 젖큰 애들이랑 놀던가.”
비앙카가 고개를 돌리며 팔짱을 끼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이거 끝나면 그러려고요. 선배는 안타깝지만, 사이즈가 안돼서 참가 불가입니다.”
“...이 개새끼가 진짜... 욕을 안 하려고 해도.”
비앙카가 이를 으득 갈자, 내가 재빨리 양팔을 벌리고 말했다.
“자, 비앙카, 안아줘요.”
“싫어! 안가! 안 안아줘!”
“한 번 놀릴 때마다 한 번 안아달라고 한 건 비앙카였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싫다고!!”
비앙카가 떼를 쓰자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럼... 지금 안아주면 앞으로는 놀리고도 안 안아줄 거에요.”
“뭐?! 그, 그딴 게 어디 있어!”
떼쓰기에는 떼쓰기다.
나도 비앙카처럼 눈을 질끈 감은채 소리쳤다.
“아, 몰라요! 지금 비앙카가 안 안아주면 저 죽을 거 같으니까 빨리 와 안아줘요.”
“...이...나쁜 새끼가...”
내 억지에 결국 못 이긴 척 비앙카가 다가와 안긴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비앙카의 체온을 느끼며 내가 속삭였다.
“비앙카.”
“...뭐.”
“이일이 끝나면 저랑...”
비앙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려던 내가 황급히 놀라서 말을 멈췄다.
‘...이거 사망 플래그인데?’
왜 소설이나 영화에서 뻔하기 짝이 없는 사망 플래그 대사를 뱉나 했는데 막상 그 상황이 되니까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고 만다.
“...너랑...뭐...”
그런 내 마음은 모르고 굉장히 기대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비앙카.
“...그러니까...”
“...응...말해줘.”
“...네!..말해주세요!”
“...?”
“...?”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성녀님이 매우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와..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아! 그런가요! 저 릴리스! 여기 도착했습니다!”
“지금 말고 멍청아!”
비앙카가 다리로 땅을 쾅 내리찍으며 화를 냈다.
“그, 그치만 두 분께서 교미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아서. 방해될까봐...”
“교, 교미 준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미쳤어!”
“책에서는 남녀가 껴안는 건 교미의 전조라고 했는데요? 보세요. 비앙카 선배님도 교미 할 준비가...”
릴리스가 대뜸 비앙카의 치마를 잡아 올리자 비앙카는 기겁하며 손을 쳐냈다.
“뭐, 뭐하는거야!”
“...으으...아파요..”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그러니까 남에 치마는 왜 들쳐!”
“...젖었는지 확인해보려고요.”
“그게 문제라고 이 미친년아!”
조용했던 무덤이 성녀님이 오자마자 시끌벅적해진다.
나는 열심히 싸우고 있는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비앙카 진정해요. 그리고 성녀님.”
“네, 선생님.”
“촉수는 가져오셨죠?”
“...네.”
성녀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검은색에서 하얀색으로 탈바꿈한 ‘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화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네요?”
“...죄송해요. 선생님.”
릴리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촉수의 남아있는 검은색을 보아하니 정화는 70%가량 완료되었다.
이 정도면 촉수를 사용하면 ‘반드시 죽는다’에서 ‘매우 죽을 확률이 높다.’ 정도까지는 위험도가 떨어졌을 것이다.
‘되살아난 타락’의 부활 예정일까지는 앞으로 대략 이주일.
숙주를 찾아서 개조하기에는 슬슬 빠듯한 시간이다.
내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촉수의 정화를 완벽히 끝내고 ‘숙주’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미리 ‘숙주’를 찾고 나서 촉수를 정화 할 것인가.
양쪽 다 장단점이 있기에 선뜻 결론을 내리기 힘들었다.
‘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가 결정을 내렸다.
“아니에요. 수고하셨어요 성녀님. 오늘은 이대로 가고 다음에 정화를 계속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그런데...선생님 정조대는 언제 풀어주시나요?”
릴리스의 질문에 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화가 다 끝나면요.”
“그...그런...너무해요.”
릴리스가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뒷걸음질 쳤지만, 지금 릴리스의 정조대를 풀어주면 하루 종일 자위하느라 정화는 뒷전일게 뻔하다.
"성녀님... 정조대를 풀고 싶으면 일부터 하시죠.”
냉정하게 끊는 내 말에 릴리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네, 선생님. 마기를 찾으면 되는 거죠?”
“네.”
“알겠습니다... 저, 릴리스. 시작할게요.”
이윽고 양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눈을 뜨며 말했다.
“...찾았어요. 저쪽이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