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백기사는 불륜순애를 꿈꾸는가 (4)
* * *
“하아...”
침대에 누운 마르잔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충격적인 걸 목격하면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말은 분명 거짓말이다.
성녀님의 정조대를 목격한 순간 마르잔은 자신도 모르게 도망칠 정도로 엄청난 충격 받았지만, 그 광경은 망막에 새겨진 듯 또렷하게 떠올랐으니까.
‘...애초에 그거 정조대이긴 한가요?’
마르잔은 태어나서 오늘까지 단 한 번도 정조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평범한 사람이 뭐 때문에 정조대를 생각하겠는가.
그래서 성녀님의 말을 들었을 때, 상식적으로 정조대라면 정결하고 성욕을 억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릴리스가 차고 있던 정조대는 그런 상식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음란하기 짝이 없는 생김새였다.
그때의 광경을 다시 떠올린 마르잔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일단 릴리스에겐 내일 가서 사과해야겠어요.”
이유야 어찌 됐든 릴리스의 입장에서는 그저 정조대를 보여 줬을 뿐인데 상대가 도망친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분명 그 음란하지만 착해빠진 성녀님은 지금쯤 자신이 뭘 잘못했나 고민하며 끙끙 앓고 있을 거다.
‘...아니, 도망칠만하지 않나?’
사과의 말을 고르던 마르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갑자기 정조대를 보여주면 도망치거나 공격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 성녀님이니까요... 일단 사과는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보여주지 않게 당부해야겠어요.’
마르잔에게 있어 릴리스는 마법의 단어였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릴리스가 저질렀다면 ‘아, 그럴 수 있지’ 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성녀님을 떠올리며 잠시 미소를 지은 마르잔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스에 대한 건 어느 정도 마무리 지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마르잔은 릴리스를 핑계 삼아 더 큰 문제에서 시선을 피해왔다.
“....”
마르잔이 손끝으로 입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유진님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이토록 괴롭게 조여온 건.
처음 유진님이 제 귀를 만지작거렸을 때?
아니면 새로 산 귀걸이가 잘 어울린다고 말해줬을 때?
그것도 아니면 유진님과 부딪치며 입을 맞췄을 때?
주군의 연인에게 이런 불경한 감정을 가진 게 언제부터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감정을 숨기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이다.
‘네 명이라고 했죠...’
유진님이 여러 여인과 뒤엉켜 난교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질척한 질투와 함께 흥분이 솟아났다.
다수랑 하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유진님이 다수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마르잔에게 있어 약간의 기대를 하게 해주었다.
...자신도 그 다수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말이다.
유진에 대한 감정을 자각한 이후로 마르잔은 단 한 번도 유진의 처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루시아님이 계신 이상 유진님의 처음은 될 수 없다.
설령 기적이 일어나 첫 번째가 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마르잔은 루시아님이 슬퍼하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첫 번째는 아닐지라도 유진님이 나를 원하신다면...
마르잔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알잖아요. 마르잔, 헛된 희망 품지 마세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 보며 마르잔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렇게 못난 저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마르잔의 외모는 객관적으로 미인으로 불리기 부족함이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마르잔이 모시던 여인은 제국의 달. 루시아였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모든 남자의 시선은 오직 루시아에게 집중되었다.
마르잔은 그 사실이 슬프거나 안타깝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루시아님의 매력을 알아준다는 사실에 기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르잔의 자기비하적 성격과 어떤 남자의 관심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했다.
“...그래도...만약에...유진님께서 먼저 저를 요구하신다면...”
그때는 루시아님을 배신한다는 걸 알면서도 유진의 요구를 거절할 자신이 없었다.
“...유진님...”
다시 한번 유진과 입술이 맞닿았을 때를 떠올린 마르잔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이불을 두른 채 침대 위를 굴렀다.
쿵─
마르잔이 침대 위를 구르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좀 심하게 굴렀는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야...”
부딪친 머리를 쓰다듬으며 바닥을 둘러보니 온통 책투성이였다.
‘이것도 정리해야 하는데 말이죠...’
책을 보며 마르잔이 짧게 혀를 찼다.
언뜻 보면 마르잔의 학구열이 엄청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누군가 마르잔에게 공부를 좋냐 싫으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마르잔은 싫어한다고 답할 것이다.
물론, 호불호와는 별개로 루시아님에게 폐가 되지 않을 정도로는 지식은 쌓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
스스로는 책 한 권조차 읽기 싫어하는 게 마르잔이다.
그 예로서, 빈민가에서 루시아님에게 구해진 뒤, 루시아님을 모실 수 있도록 교양을 쌓기 위해 밤낮없이 공부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악몽으로 나올 정도다.
하지만 그런 마르잔이 최근 들어 단 한 종류의 책만큼은 미친 듯이 읽고 있었다.
[암컷 여기사 길들이기][공자님이 나를 원함][여기사가 조교를 기억함][나의 공자님!][공자님이 진짜 다 따먹음]
바로 여기사와 귀공자의 이야기를 다룬 음란 서적들.
그중에서 마르잔이 특히 좋아하는 책은 ‘여기사가 조교를 기억함’이라는 소설이었다.
마르잔이 이 소설에 특히 끌린 이유는 여기사를 조교 하는 사람이 유진님처럼 여기사가 모시는 주군의 연인이라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고 있으니, 마르잔은 속옷이 서서히 젖어오는 걸 느꼈다.
“...”
침을 꼴깍 삼킨 마르잔이 책상 위로 시선을 돌리자 손 모형에 끼워진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유진님의 가슴을 만진 날, 어떻게든 그 감각을 보존해두고 싶어서 저 장갑을 끼고 한참 동안 손을 비벼댔었다.
물론 손을 비볐다고 장갑에 감촉과 냄새가 남아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마르잔에게 있어서 저 장갑은 어떠한 물건보다 쉽게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
자리에서 일어난 마르잔은 조심스럽게 장갑을 왼손에 끼고는 천천히 속옷을 벗기며 속삭였다.
“...이..이러시면...안됍니다..유진님...유진님께는...루시아님이..계시지 않습니까...”
─네가 먼저 그 음탕한 몸으로 유혹해놓고서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작스럽게 시작된 상황극.
하지만 언제나 이렇게 자위를 하는 마르잔에겐 부끄러움은 없었다.
“하아..아닙니다..저...저는..유진님을...유혹하려던 것이...”
─듣기 싫다! 당장 이쪽으로 오거라!
마르잔이 왼손으로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흐읏...유진님...정말..아니됩니다...루시아님께서...아시게된다면.."
─지금 감히 내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흰 장갑을 얼굴에 가져다 댄 마르잔은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켠다.
“흐아아아♥”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아니, 냄새를 맡는 상상을 한 것만으로도 애액이 뚝뚝 떨어진다.
“하으윽..유..유진님..제발...이러시지...마세요...!”
이젠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마르잔의 오른손이 클리토리스를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장갑을 낀 손으로 만지고 싶었지만, 장갑을 더럽힐 순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후앗..!..끄읏...유..유진님.....하아...흣..!”
─이미 이렇게 축축하게 젖어놓고 뭐가 아니라는 거지?
유진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마르잔의 몸이 흠칫거린다.
“..하윽..유진님은...아..안됍니다..흐읏...그...그것만큼은...저...저는...루시아니..님의...기사..인데..”
스윽─
마르잔이 손가락을 입구에 가져다 대는 순간, 발정난 보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빨아들였다.
“아흐...하...흐읏!..드..드러왔서..!”
─음탕한 년, 이런 몸을 가지고 있다면 기사보다는 창녀가 더 잘 어울리겠군.
“으끄읏...그...그렇게...저를...모욕하지..!”
─모욕? 웃기는군. 봐라! 네 몸은 이미 내게 굴복했다.
“흐앗...흐앗...제...몸은...굴복하더라도...제...영혼 만큼은..절대로...흐윽..!..끄으읏...!”
마르잔이 저항하는 말을 뱉을수록 상상 속의 유진님은 더욱 거칠게 허리를 밀어붙인다.
─그래? 과연 네가 이것도 견디는지 지켜보겠다.
“흐아..흐아..유..유진님....무...무엇을...하시려고...”
절정에 가까워지자 마르잔의 손놀림이 급격하게 빨라진다.
─내 씨앗을 네 몸 안에 뿌려주마.
“흐앗..하아...아..안대...안됍니다...그것만큼은..제..제발..요..용서..하윽...!”
─임신해라 마르잔! 내 아이를 임신해라!
절정의 직전, 마르잔은 왼손으로 코와 입을 감싼 채 숨을 들이켠다.
그리고...
“끄으으으윽...!”
마르잔은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황홀감의 파도 속에 몸을 맡겼다.
푸수유우─
“...흐아...흐끄...으...유...유진니임...”
유진의 이름을 부른 마르잔이 조수를 뿜으며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