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백기사는 불륜순애를 꿈꾸는가 (1)
* * *
멜피사와의 만남이 생각보다 길어졌기에 양호 마망을 만나러 가겠다는 계획도 하루 늦어졌다.
‘...뭐. 상관없긴 하지.’
릴리스가 ‘촉수’를 정화해 올 때까지는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이 시간동안 괜히 단련을 추가하는 것 보다는 앞으로 바빠질 걸 생각해 휴식을 취하는 게 옳다.
똑, 또도도독—
양호실 앞에 도착한 내가 릴리스가 알려준 방식대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쿠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호실의 문이 열렸다.
촤아악—
문이 열림과 동시에 한쪽 손은 얼굴을 감싸고 다른 손은 앞으로 쭉 내민 채 자세를 잡으며 외치는 양호 마망.
“저! 아이리스! 기다리고 있었어요!”
...쉽게 말해 변신 히어로 같은 포즈를 하고 있었다.
“...”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에...?”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색하게 내려가는 양호 마망의 손.
“유...진...군...?”
“네, 선생님.”
“...유...유진...군이..왜?...여기에...부..분명...릴리양의...노크...방식...이었는데..?”
동공에 빛이 사라진 양호 마망이 몸을 떨며 말했다.
“아, 노크하는 방법은 릴리가 알려줬습니다.”
“릴리가... 알려줬다고요...?”
“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나와서요. 그것보다...”
양호 마망을 위아래로 훑은 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취미가 있으셨군요. 괜찮습니다. 선생님이 어떤 취미를 가졌든 저는 존중합니다.”
그러자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중얼거리는 양호 마망.
“...시...”
“시?”
“...싫어어어!!!”
단숨에 양호실 침대까지 달려간 아이리스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아!!...시...싫어...!!...싫어!!..꾸...꿈이에요!!..이...이게 현실일 리 없다고요!!!...깨요!!..빠...빨리 깨라고요!!”
“선생님. 진정하세요. 괜찮다니까요.”
“제...제가...! 시...싫다고요...!..흐윽...보지마요...!!유진군...이런 제 모습을 보지마요...!!”
“선생...”
내가 양호 마망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호실에 따라 들어가자, 책상 위에 올려진 각양각색의 딜도가 보였다.
“....”
이건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다.
루시아에게 들어서 딜도가 제법 팔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양호 마망이 이만큼이나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무지개 색상 컬렉션은 다 모았고... 심지어 한정판도 가지고 있네.’
너무나 대놓고 있어서 못 본 척을 해줄 수도 없는 상황.
짧게 한숨을 삼킨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선생님?”
“지금은 싫어요!!...안들려요!!!...저리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저... 딜도는...”
“꺄아아아아아악!!”
딜도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침대 위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난 양호 마망.
이어서 재빠른 손놀림으로 책상 위에 있는 딜도를 긁어모으더니 침대에 던지고는 이불을 씌웠다.
“유...유진군...!!”
눈물이 글썽글썽한 양호 마망이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
“유...유진군은 아무것도 못 본 거예요. 아...알았죠?”
“...어떤걸요? 딜도를요? 아니면... 선생님의 변신장면을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 내가 양호 마망이 했던 자세를 따라 하자, 아이리스가 주먹을 꽉 쥐고 내 가슴을 토닥토닥 두들긴다.
“진짜! 하지마요!! 이...잊어!...잊으라고요!!”
“알았어요. 선생님이 잊으라면 잊을게요. 하아.. 자, 다 잊었어요. 이제 기억 하나도 안 나요.”
“흐윽...저...정말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실낱같은 기대를 품은 양호 마망의 표정.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저, 유진 칼리오페! 아이리스의 무지개 딜도 컬렉션을 본 거 완전히 잊었습니다!”
“...흐아아아앙!!”
양호 마망이 울면서 침대 위로 뛰어든다.
“...이젠 트...틀렸어요...유진군에게 미움 받을거에요.”
“에이, 제가 선생님을 왜 미워해요.”
“흐윽...제가...나잇값도 못하는 음란한 여자니까요...”
원래 여성의 성욕은 삼 십대에 최고치를 찍는다고 하니 양호 마망이 딱히 나잇값을 못하는 건 아니다.
“..흐윽... 유...유진군....유진군은 제가 음란해져도 계속 좋아해 줄 건가요?”
이불에서 얼굴만 빼꼼 드러낸 양호 마망이 묻자, 헛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걱정해도 하등 쓸모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아이리스.”
“왜...왜요? 유...유진군이...그...런건...상관 없을 정도로...저를...좋아...하니...”
나는 더듬거리며 말하는 아이리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아이리스는 원래 음란했으니까요.”
***
“...하아...”
마르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 책상에서 엎드려 자는 성녀님을 깨울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흠냐...”
밤에 잠도 안 자고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수업만큼은 언제나 눈을 반짝거리며 듣던 성녀님이 수업 내내 자는 거로 부족해, 다른 학생들은 전부 돌아간 지금까지도 잠들어있었다.
‘...깨워도 될까?’
이렇게까지 곤히 자고 있다면 가만히 내버려 둬야지 않나 하는 생각이 살짝 스쳤지만, 결국 마르잔은 깨우기로 결심했다.
“릴리.”
“흠냐...흠...”
“릴리 화이트플랑.”
“...쿨...”
“...”
이름을 불러봐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긴... 이정도로 일어났다면 수업에서 졸지도 않았겠죠.’
마르잔이 어떻게 성녀님을 깨울까 고민하고 있자, 문뜩 릴리스의 부드러워 보이는 볼살이 씰룩거리는 게 눈길을 빼앗았다.
‘...조...조금만.’
어디까지나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성녀님을 깨우기 위해서 하는 거다.
순식간에 자기합리화를 마친 마르잔은 검지를 쭉 펴고서 릴리스의 볼을 찔렀다.
“...이건... 대단하네요.”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게 된다.
온종일 볼만 주물러도 행복할 것 같은 기분 좋은 말캉말캉함.
이 정도의 피부탄력은 가지고 있어야 성녀가 되는 걸까.
“...으으...음...”
그때, 잠꼬대라도 하는 듯 성녀가 고개를 돌려 마르잔의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본 마르잔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기 같네요...”
앳되고 순진해 보이는 외모에 이런 귀여운 행동까지 더해지니 흐뭇한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성녀님이 혀를 쓰기 전까지는 말이다.
“쪼옵...쪼옥...쪼옵...”
“꺄아아악!!”
성녀가 손가락을 빠는 순간 마르잔이 숫처녀 같은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껏 손을 잡아 뺐다.
‘...뭐...뭐죠 방금!! 그건 뭐냐고요?!’
마르잔은 새빨개진 얼굴로 축축하게 물든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마르잔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녀님이 손가락을 빠는 순간 뭔가 엄청난 게 벌어졌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하아암....피곤해요....음....마르잔?”
비명소리를 듣고 일어났는지 릴리스가 하품하며 눈을 비벼댔다.
“릴...릴리...”
“네...마르잔...저...릴리에요...”
새끼고양이처럼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 성녀님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어머! 벌써 이런 시간이!!”
“...릴리 많이 피곤했나 봐요. 수업 중에도 계속 자던데.”
“헤헤... 네, 부탁받은 일이 있어서 그걸 하느라... 그런데 마르잔은 뭐 하고 있었어요? 설마 기다려주신 거예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릴리스의 말에 마르잔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네에, 릴리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어머, 고마워라... 하지만 어쩌죠. 저, 릴리 화이트플랑. 아직 해야 하는 일을 다 끝내지 못해서 같이 놀자는 거면 안 될 것 같아요...”
릴리스가 미안함이 듬뿍 묻어나오는 얼굴로 말하자 마르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릴리를 뵙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해주려고요.”
“...저, 릴리 화이트플랑을요? 누가요?”
눈을 껌뻑거리는 릴리스에게 마르잔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유진 칼리오페님입니다.”
쾅—!
“서...선생님이요?! 어...언제 그랬나요?! 앞으로 일주일은 못 만날 거로 생각했는데! 호..혹시...그걸 풀여주시려고? 그럼 왜 직접 말씀해주시지 않고 마르잔에게 말했을까요!”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는 릴리스가 엄청난 속도로 말을 뱉었지만 마르잔의 귀에 들어온 것은 한 단어뿐이었다.
“...서...선생님이요?”
“네! 유진님께 많은 걸 배웠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으로 모시기로 했어요! 마르잔! 저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여전히 릴리스의 이해 할 수 없는 대답에 마르잔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릴리. 잠깐 진정해요.”
“이미 진정했어요! 마르잔!! 그래서 어디서 만나죠?!”
눈을 반짝이며 콧김을 씩씩 뿜어내는 게 누가 보더라도 전혀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그걸 말해주기 전에 릴리, 유진님을 만났어요?”
“네! 만났어요!”
“언제요?”
“어제? 아니, 그저께요!”
릴리스의 말을 마르잔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깨울까 말까 고민하느라 끙끙 앓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러면 상관없을 거예요. 제가 유진님께 부탁을 받은 건 벌써 일주일도 전이거든요.”
“아... 그런가요... 하긴... 그렇겠죠... 선생님이 저를 부를 리 없겠죠... 어쨌든 고마워요... 마르잔...”
마르잔의 말을 들은 성녀님이 갑작스럽게 우울한 기운을 뿜어낸다.
‘...릴리...’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지만, 성녀님을 위로할 겸 마르잔은 툭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릴리, 유진님을 만나서 뭘 배웠나요?”
“보지 사용법이요...”
“...네...?”
귀를 의심한 마르잔이 다시 물었지만, 성녀님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보지 사용법이요. 마르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