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아기씨 주입 연습 (1)
* * *
“...내가 졌어.”
제이드의 패배 선언과 동시에 내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크으으! 진짜 아깝다..!! 솔직히 내가 거의 다 이긴 건데 말이야. 그치 유진아?”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며 말하는 제이드.
1반의 학생치고는 드물게 귀족도, 부유한 가문 출신도 아닌, 순수 재능만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터라 경쟁심이 강한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승자의 정당한 권리.
패자 능욕을 참을 순 없다.
“...아닌데? 그냥 내가 압도적으로 이겼는데?”
“뭔 헛소리야! 마지막에 조금만 깊게 파고들어도 내가 이겼어!!”
제이드가 발끈하자 나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응, 아니야. 거기까지 다 계산하고 빈틈 보여준 거야.”
“와!... 와아아! 어이없네. 야! 나랑 다시 붙어!”
“싫어. 너 존나 약하잖아.”
“아아아! 진짜 열 받네!! 방금 건 연습이니까 다시 뜨자고!!”
“응, 승률 0% 허접이랑은 대련 안 해.”
“너 나랑 대련 이제 한 번 했잖아!!”
놀려먹기는 했지만, 제이드의 말대로였다.
‘아슬아슬했지.’
최후의 일격 때 제이드가 딱 반걸음만 더 내디뎠어도 승자와 패자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었을 거다.
나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에이미 교수를 바라보았다.
‘생긴 건 꿀밤 한 대 때리면 호에엥 거리며 엄마한테 이르러 갈 것 같은데....능력이 있긴해.’
단순히 이번 대련만이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다.
첫날 에이미가 알아서 팀을 짜게 한 건 단순히 성적표에 적힌 능력이 아니라, 직접 학생들의 실력을 확인하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잘하면 이기고 못 하면 지는 수준의 상대를 맞춰 주고 있었다.
“3번 대련장은 대련종료인 것입니닷...! 끝났으면 빨리빨리 내려가는 것입니닷...! 이익! 거기 5번 대련장은 대련장 위에서 장난치지마는 겁니닷...!”
맨날 자기 입으로 엘리트라고 하던 게 단순한 자화자찬이 아닌듯했다.
“어어어!! 저...저건...위험한 것입니닷...!”
그때 에이미 교수가 눈을 번쩍 뜨며 급박하게 양팔을 앞으로 뻗는다.
<멈춰!!/>
에이미 교수가 ‘언령’을 사용하는 순간 서로를 향해 날아가던 마법이 그대로 정지한다.
“...둘은 적당히 하라고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하는 겁니닷...!”
순식간에 2번 대련장까지 날아간 에이미 교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루시아와 리아나에게 마구 화를 낸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미안해~♪ 너무 흥을 내버렸네?”
“리아나는 웃지 마는 겁니닷...! 지금은 교수가 화내는 중인 겁니닷...! 정말 이러다 누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겁니깟...!”
화를 내는 에이미 교수는 정말 학생들을 위하는 모범 교수처럼 보였다.
“그러면 내가 또 시말서를 써야 하는 겁니닷...!”
이 말만 안 했다면 말이다.
“이제 시말서는 지긋지긋 한 것입니닷...! 지난주에는 도서관에서 떠들어서 시말서를 다섯 장이나 썼다는 겁니닷...! 그것만 아니었어도 책을 뒤집어 놓은 범인을 잡았을 텐데 말입니닷...!”
“그러길래 도서관에서 왜 떠들었어 에이미♪”
리아나가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자 에이미가 발을 구르며 말했다.
“에잇..! 교수를 이름으로 부르지도 말라는 겁니닷...! 이번에는 용서 못 합니닷...! 두 명 다 벌로 반성문을 다섯 장씩 써오는 겁니닷...!”
“...알겠습니...”
루시아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려고 하자 리아나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말했다.
“아아~. 근데 에이미. 이번에 르블랑에서 나온다는 신상 케이크 엄~청 맛있다던데? 들었어?”
“...르...르블랑이라면 수도에 있는 그 초고급 케이크 가게 말입니깟...!”
리아나의 말을 들은 에이미의 귀가 쫑긋거린다.
“응, 그 르블랑. 거기서 다음 주에 발매될 신상 케이크가 우연히 오늘 카르네아에 도착하네♪”
“...어...어떻게...그걸 어떻게 손에 넣은 겁니깟...! 르블랑은 포장판매도 하지 않은뎃...!”
에이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자, 리아나가 황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권력이란 참 편리하지?”
“...그...그런 부러운...아니....못됀..!..이건 권력 남용 입니닷...!”
“아... 그래? 그럼 수업이 끝나고 에이미랑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권력 남용이면 어쩔 수 없지 에이미는 안 먹는다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 정도는 황가의 당연한 권리입니닷...! 그러니 나한테도 케이크를 나눠주는 겁니닷...!”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태도를 빠르게 바꾸는 에이미 교수.
“음~~ 그럼 그럴까?”
“당연히 그러는 겁니닷...!”
리아나가 시간을 끌자 에이미 교수는 양 갈래 머리가 붕붕 날아다닐 정도로 머리를 끄덕거린다.
“아니, 역시 안 되겠네. 반성문을 쓰느라 손이 아플 것 같아서 케이크는 나중에 먹어야겠어.”
“...으읏...! 사악한 겁니닷...! 케이크를 인질을 잡다니 너무나 사악한 겁니닷...!”
“후훗...♪ 그래서 에이미. 어떻게 할래?”
리아나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케이크의 유혹을 견딜 수 없는지 에이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케..케이크를 나눠주면 이번만은 반성문을 용서해주는 겁니닷...!”
***
제이드와의 재대련을 약속한 대가로 점심을 얻어먹은 내가 인기척이 드문 공터를 걷고 있었다.
카르네아의 많은 산책길을 냅두고 굳이 공터 온 건,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멜피사에게서 정기보고를 듣기 위해서였다.
‘...저녁에는 양호 마망을 만나러 갈까.’
성녀의 상태가 저렇게 된 건 양호 마망의 지분이 크다.
물론 알고서 한 일은 아니겠지만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양호 마망의 밀크티나 한 잔 마시고 감상평을 남겨줘야지.’
벌써부터 눈물을 글썽인 채 그만해달라고 하는 양호 마망의 얼굴이 그려진다.
‘...아니, 그것 보다는 양호 마망한테 내가 밀크티를 만들어주고 감상평을 말하게 할까?’
내가 진지하게 양호 마망의 처벌을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나타난 멜피사가 헛기침을 하곤 나를 불렀다.
“흠흠.. 공자님.”
언제나처럼 검은 옷으로 몸을 둘둘 감싸고 있는 멜피사.
하지만 하의 만큼은 평상시처럼 바지가 아닌 치마를 입고 있었다.
“...”
무표정한 얼굴의 멜피사가 굳이 정돈되어있는 치마의 매무새를 정돈하며 나를 힐끔거린다.
달라진 모습을 알아줬으면 하는 것 같았지만, 바로 말해주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멜피사.”
“네, 공자님.”
“황녀에게 특이 사항은 있었나요?”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멜피사가 미묘하게 처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없습니다.”
“정말 하나도요?”
“...네, 굳이 말하자면 최근 들어 하위 귀족들과 평민들과의 관계가 좀 더 돈독 해진 점 같습니다.”
멜피사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리아나가 슬슬 준비하는 건가?’
아직 ‘되살아난 타락’의 공략조차 시작되지 않았는데 리아나를 신경 쓰는 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거조차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무리 준비를 해놔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게 리아나 루멘하르크다.
“...멜피사, 앞으로는 그런 정보도 놓치지 않고 말해줘요.”
“죄...죄송합니다! 평상시에도 신분의 격을 신경 쓰지 않는 분이라 정보가 될 거라 생각 못 했습니다!”
콰앙─
대답과 동시에 말릴 틈도 없이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그대로 박아버리는 멜피사.
“...멜피사.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니까 일어나세요.”
“아, 아닙니다! 저 같은 쓰레기는 방계 따위는 이 정도 위치가 딱 맞습니다!”
“제가 부담돼서 그래요. 아니면 저도 머리를 박을까요?”
내가 다리를 조금 굽히는 순간 멜피사가 재빨리 일어난다.
“아,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한번 말할 때 들으면 편하잖아요. 자, 이리 와요. 상을 줄게요.”
“네..넵..알겠습니다!”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멜피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상을 주기 전에 제가 긴급보고 상황은 기억하죠?”
멜피사의 매끈한 턱을 붙잡은 내가 말했다.
“네, 넵! 리아나님이 저를 먼 곳으로 보내 떼어놓으려 한다면 꼭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잘했어요. 그때가 되면 반드시 저를 찾아오는 걸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세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눈 감아요.”
“...네...공자님.”
멜피사가 천천히 눈을 감고 턱을 들어 올린다.
쪽─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 멜피사는 내가 가르친 대로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려고 했지만..
‘아직 안 되지.’
나는 뒤로 물러나며 가벼운 키스로 끝냈다.
“...아.”
떨어져 나간 아쉬움을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매만지는 멜피사.
“그럼, 수고했어요. 다음 정기보고 때 만나기로 해요.”
그 모습을 본 나는 등을 돌린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5초 정도 걸리려나?’
...그리고 예상처럼 정확히 5초가 지날 때, 멜피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고..공자님...!”
“네, 멜피사. 무슨 일인가요?”
“그...그게...”
일단 부르기는 했지만, 방계인 자신이 본가의 적통을 불러세웠다는 사실에 굉장히 당황한 듯한 멜피사가 그대로 굳어버린다.
“...별다른 할 말이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
내가 다시 등을 돌린 순간 멜피사가 크게 외쳤다.
“아, 아기씨 주입 연습...!!”
뒤를 돌아보자 무표정한 표정과는 달리 피부가 잔뜩 붉어진 멜피사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저 같은 방계 따위가 본가의 아기씨를 제대로 수정하려면...아...아기씨 주입 연습이 마...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