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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139화 (139/354)

〈 139화 〉 후장말고 보지도 따먹어달라고 개새끼야 (2)

* * *

“빨리빨리 움직이는 겁니닷...!”

에이미 교수의 지휘에 따라 학생들과 함께 대련장으로 이동했다.

1학년 때와는 달리 2학년의 수업 대부분은 이론보다는 실습에 맞춰져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싸우는 겁니닷…! 위험할 거 같으면 이 에이미 교수님이 말려줄 겁니닷....!”

대련장에 도착하자 잘난 듯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말하는 에이미 교수.

‘...사실 진짜 잘나긴 했지.’

하는 행동이나 혀짧은 말투를 보면 전혀 신뢰가 가지 않지만, 로레오스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에이미 교수는 카르네아에서도 한 손에 들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러고 보니 로레오스 교수님은 뭐하고 계시려나.’

내 스승을 찾겠다고 장기 휴가를 낸 뒤로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최근에 들어온 정보로는 아스란 제국에서 보였다고 하던데...

제발 부탁이니 스승 찾기는 그만하고 2학기 전까지는 카르네아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으음... 조는 짜기 귀찮은 겁니닷...! 그냥 친한 사람들끼리 조를 짜는 겁니닷...!”

...친한 사람이랑 조를 짜라고...?

에이미 교수의 말에 순간 트라우마 스위치가 눌릴 뻔했지만, 다행스럽게 나에게는 비비안이 있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비비안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한 미소를 짓는다.

‘데려오길 잘했네.’

이걸 노리고 비비안을 데리고 온 건 아니지만, 1반에 들어온 직후라 아직 내겐 친구라 불릴 만한 사람이 없었다.

...물론, 루시아가 있긴 해도 주변 사람들에겐 나와 루시아는 최대한 서로를 혐오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했으니 당연히 제외해야 했다.

내가 비비안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등 뒤에서 봄바람 같은 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아♪ 나랑 같이하자!”

이어서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부드럽고 따듯한 가슴의 감촉.

하지만 나는 그 감각에도 성욕은커녕 두려움만을 느끼고 있었다.

“...황녀 전하.”

“응응, 유진은 당연히 나랑 같이할 거지? 그도 그렇게 에이미가 친한 사람들끼리 짜라고 했는걸?”

“교수를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는 겁니닷...!”

에이미 교수가 화를 내도 리아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전하... 일단 좀 떨어지는 게 어떻습니까...”

“음... 싫어♪”

팔을 빼내기 위해 힘을 줘보지만, 리아나의 가슴 사이에 단단히 고정된 팔은 움찔조차 하지 않는다.

‘도대체 능력치가 어떻게 되먹은 거냐...’

그래도 방학 사이에 나름 근력을 많이 올렸는데, 움찔조차 하지 않다니 이게 마법사의 근력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

“황녀 전하... 저 역시 황녀 전하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나 혹여 전하께 폐가 될까 두렵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유진이라면 잘 할 테니까!”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안 괜찮다.

“걱정하지 마. 오늘은 혈족 마법은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

작게 속삭이는 리아나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당연히 안 써야지!’

실전도 아니고 대련 수업에 스치기만 해도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무시무시한 마법을 쓸 생각이었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오늘 몸 상태가 별로여서 휴식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황녀 전하와의 대련은 다음 기회에 하는데 어떠신지요?”

“흐음...그래? 아프면 어쩔 수 없지. 푹 쉬어.”

황녀가 웬일인지 순순히 물러난다.

“...그럼 나는 비비안이랑 해야겠네... 진심으로.”

하지만 곧바로 불길한 말을 남기며 비비안을 향해 걸어가는 리아나.

잠깐이나마 황녀가 제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시발.’

설마 대련에서 진심으로 하겠어?

이따위 안일한 생각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황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 저랑 하시죠.”

내가 황녀의 손목을 붙잡는 모습을 본 여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며 꺄아악 비명을 지르지만, 저런 것에 신경 쓰기에는 비비안이 몇 배는 중요했다.

“흐~음? 유진아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걸 노리고 있던 주제 리아나가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다.

“...황녀 전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아픔도 사라졌습니다.”

“아아, 이렇게까지 구애하면 어쩔 수 없네. 그럼 잘 해보자 유진아♪”

수백 개의 꽃망울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듯한 미소를 짓는 황녀를 보며 나는 한숨을 삼켰다.

***

‘...미친년.’

내가 어깨를 주무르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사지가 전부 붙어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온도를 서서히 올리며 언제쯤 죽는지 실험하는 것처럼, 리아나도 수업 내내 딱 내가 죽지 않을 선까지 갈궜다.

─하핫♬ 유진아 그럼 이건 어때?

─자...잠깐만...!

─우와! 대단해! 아직도 말할 여유가 있네♪

이쯤 되니 황녀보다는 에이미 교수한테 열이 받는다.

‘에이미!! 위험할 것 같으면 말려준다면서!!’

나로서는 필사적인 발버둥이었지만 에이미 교수가 보기에는 아니었나 보다.

“하아...”

앞으로 황녀에게 계속 이렇게 당할 걸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음?’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기둥을 돌자, 복도 끝에서 비앙카 베아트리스가 보였다.

“....”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벽에 등을 기댄 채, 애꿎은 바닥을 툭툭 차고 있는 비앙카의 모습.

때마침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작은 체구와는 반대로 강하고 또렷한 비앙카의 외모가 눈길을 빼앗는다.

“...큭..!”

바람에 먼지라도 들어간 듯 고양이 손을 하며 눈을 비비는 비앙카.

그 모습이 귀여워 잠시 지켜보고 있자, 비앙카도 나를 발견한 듯 갑자기 가방에서 허둥지둥 책을 꺼내서 읽는 척을 한다.

“...!...흐음...음...그...그렇군..”

책의 표지가 거꾸로 뒤집혀 있지 않았다면 그래도 속아주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이건 속아주려야 속아줄 수도 없다.

‘보아하니 자기 딴에는 우연히 만난 척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흐음...’

안 그래도 황녀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됐다.

‘일단 무시할까.’

비앙카에게 장난칠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즐거워진다.

“야아....흠흠..”

내가 그냥 지나치려 하자 비앙카가 반사적으로 부르려 했지만, 그래서는 비앙카가 생각한 우연한 만남이 아닌지 어색한 헛기침을 한다.

“...흠흠!! 크흐음!! 흠!!”

그래도 내가 무시하고 지나가자, 이제는 헛기침이라기보다는 폐렴에 걸린 사람처럼 기침하는 비앙카.

그렇게 한참을 무시하다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니...

“...없네.”

비앙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시당했다고 삐져서 돌아간 걸까?

내가 알던 비앙카라면 내게 달려들면 달려들었지 돌아가지는 않았을 텐데.

‘...조교도가 오른 것 때문에 심정에 변화가 생겼나?’

놀릴 생각이었지, 삐지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다음에 만나면 잘해주자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한층 내려가자 놀랍게도 또 비앙카가 보였다.

“하아...하아..”

엄청나게 숨을 헐떡이는 거 보니 나를 앞지르려고 중앙계단으로 뛰어온 모양이다.

문뜩 입꼬리가 제멋대로 치솟는다.

잘해주자고 했던 말은 취소다.

이렇게 재미있는 반응을 하는데 이걸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내가 또다시 모른 척을 하며 앞으로 걸어가자.

“후~우~”

비앙카가 혼자서 팔짱을 끼더니 입술을 내밀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다.

“....”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겨우 무시하는 데 성공했다.

“...야!!”

도도도독—!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흙먼지가 피어오를 정도로 빠르게 달려온 비앙카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야!! 왜 자꾸 무시하고 가는 건데!”

“어, 선배 계셨어요? 작아서 안보였나 봐요.”

“지랄하지 마! 나 그렇게 안 작아! 그리고 봤잖아! 봐놓고 무시했잖아!”

방방 뛰는 비앙카.

하지만 뛰어봤자 내 턱 언저리다.

참을 수 없는 충동에 내가 비앙카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쓰다듬지 말라고!”

“쓰다듬은 게 아니라 누른 건데요? 선배가 뭐가 귀엽다고 쓰다듬어요.”

“씨이!! 그게 더 나빠! 개자식아!”

비앙카가 탁 소리가 나도록 손을 내치자, 나는 손을 붙잡고 웅크리며 신음을 흘렸다.

“...끄으...”

“...왜...왜그래? 내가 그렇게 세게 쳤어?”

당황하며 어찌할 줄 모르는 비앙카를 보며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뇨, 그냥 놀려봤어요.”

“죽어 진짜!”

나는 달려드는 비앙카 반걸음 차이로 피하고 오히려 벽에 몰아넣었다.

“흐앗...무..뭐야...!”

“제가 물어볼 말인데요? 선배가 저한테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

“...차..착각하지마!..내가..너를...왜...기다..”

부정하던 중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는 비앙카.

그리고는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을 들며 말했다.

“마...맞아...너...기다린거. ...너, 나 나랑 내기해.”

“내기요?”

갑자기 내기라는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비앙카에겐 전혀 질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기에 나는 방긋 웃으며 되물었다.

“어떤 내기요?”

“예...예전에 너가 나한테 한 거 있잖아...”

“아, 결투요? 그거 제가 이겼잖아요.”

“네가 비겁하게 이긴 거잖아! 그리고 그거 말고! 그다음에 한 거!”

“제가 선배한테 뭘 했어요?”

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개새끼...! 알면서 일부로 그러지!”

“아니요. 정말 모르겠어요.”

그러자 이제는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비앙카가 소리친다.

“조, 조교 말이야!”

“아, 그랬었죠.”

“그...그랬었죠? 지금 나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 잊었다는 거야?!”

비앙카가 입을 떠벌리고 놀라자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그렇게 귀여웠던 선배를 어떻게 잊겠어요. 그래서 조교가 왜요?”

“읏....!...그...그때 중간에 그만뒀던 게 마음에 안 들어! 어차피 내가 이겼을 텐데 도망친 거 같잖아!”

말투만 강하지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비앙카.

‘...아무래도 다시 조교를 받고 싶은 거 같은데...’

그렇다고 직접 조교 해달라고 말하긴 창피하니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짜온 것 같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게 귀엽게만 느껴진다.

“그...그러니까 주말 동안에 다시 조교 해봐. 내...내가 너한테 굴복하면 나를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만약 굴복 안 하면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예의상 물어봤다.

휙—

그러자 갑작스럽게 내 넥타이를 잡아당긴 비앙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선언했다.

“...내...내가 널 마음대로 할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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