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루시아는 울고 있다 (1)
* * *
황성에서 머문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나는 황녀의 앞에서 ‘그림자’의 시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응응! 기대할게!”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며 앞에 늘어진 그림자 위로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영창을 외웠다.
「삼켜라 그림자」
그 순간 발밑이 꺼지는 감각이 들더니 다리부터 소리 없이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의외로 그림자 속은 쾌적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고 넓이도 상당했다.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있다면 마력이 바닥 날 때까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쯤이면 됐나.’
대략 30초쯤 지난 뒤 내가 다시 떠오르자 리아나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음음! 역시 유진이야! 뭐, 너무 당연한 거라 칭찬하기도 어렵네! 멜피사도 가르치느라 고생 많이 했어!”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아하하! 아무리 유진이 재능있다 해도 일주일 만에 ‘혈족 마법’을 가르쳐놓고! 멜피사는 참 겸손하다니까!”
“...”
멜피사가 경외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자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황녀도 그렇고 멜피사도 그렇고 점점 나를 재능충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마법 연습은 뒷전이고 하는 것이라고 매일 같이 섹스뿐이었는데 갑자기 각성했으니 말이다.
부담스러운 멜피사의 눈빛에 마음 같아서는 이거 전부 특성 빨이에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
조교사 (Rank EX)
주인님의 것은 주인님의 것 육변기의 것도 주인님의 것!
일정 수준 이상 조교 된 히로인의 스킬(마법) ‘3’개를 최대 ‘69 >74’% 위력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 가능한 스킬의 개수와 위력은 히로인의 조교도에 따라 변화합니다.
[바람─칼날 (하급 바람 원소 마법)] [‘루시아’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74%]
[베어라─바람—칼날 (중급 바람 원소 마법)] [‘비비안’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69%]
[그림자 (파볼리에 혈족 마법)] [‘멜피사’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74%]
────────
봐라, 이 사기적인 특성을.
타인이 배운 기술을 이렇게 홀라당 가져올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조교사는 개사기 특성이었다.
“뭐, 사실 이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순식간에 바뀐 리아나의 태도에 ‘쌍년’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물론 마법을 ‘조교사’로 쉽게 배운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조교에는 필사적이었으니까.
“그럼, 유진아. 이제부터 뭐 하고 놀까?”
하지만 화를 내봤자 달라지는 건 없기에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황녀 전하. 놀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시간이 없다니?”
리아나가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오늘로써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응, 그래서?”
“그래서 이만 떠나려고 합니다.”
“...에?”
잠시 나를 바라보던 황녀는 내가 진심인 걸 알았는지 소리쳤다.
“에에에! 잠깐만! 분명 지났지만! 그동안 유진은 거의 ‘그림자’의 연습만 했잖아! 나랑 논 시간은 다 합쳐도..”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지만 약속은 지켜져야만 하는 것인데 어쩌겠습니까.”
나는 느긋하게 시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벌써 이런 시간이군요. 곧 마차의 예약시간이니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겠군요.”
“잠깐! 잠깐! 잠깐만! 떠난다는 게 지금 당장 떠난다는 거야?”
“네, 황녀 전하.”
“어디로?”
“당연히 카르네아 아니겠습니까.”
“아직 방학이 며칠 남았잖아!”
“미리 준비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그럼 나도 갈래! 나도 데려..!”
처억─
리아나가 내게 달려오자 멜피사가 막아섰다.
“뭐야! 멜피사!”
“황녀 전하께서는 가시면 안 됩니다.”
“왜! 왜! 왜! 왜 가면 안 되는데!”
“황녀 전하께서 황실을 떠나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루멘하르크 제국의 황녀께서 그렇게 쉽게 다닐 수는 없는 법이지요.”
정론을 말하는 멜피사.
“...으으!! 유진아..!”
리아나는 설마 내가 자기를 버리고 가지는 않겠지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럼, 황녀 전하. 카르네아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상큼한 웃음으로 답했다.
—황녀를 상대하는 제일 좋은 방법. 그것은 애초에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황실에서 황녀와 싸우는 건 자살행위지.’
리아나를 정공법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거미가 거미줄을 쳐놓고 기다리는 것처럼 적어도 황녀가 내 영역으로 들어와야 승산이 있다.
‘...그러려면 일단 성녀부터 조교 하고 나서.’
성녀의 능력을 손에 넣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황녀와의 ‘전투’가 성립되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자, 황녀 전하, 이쪽으로 지금부터 준비하시면 개학식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멜피사...자..잠시만 유진아..!”
뒤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황녀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자리를 떴다.
***
며칠 뒤, 산키샌 마을의 크림파이 여관에 도착한 나는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잡고 들고 있던 유리컵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스으윽─
유리컵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지는 대신 자연스럽게 그림자 속으로 떨어졌다.
‘나와라.’
그리고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림자 속에서 컵이 튀어나왔다.
‘...역시.’
내가 파볼리에의 적통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혈족 마법은 다 그런 것인지 몰라도 ‘그림자’라는 다른 마법과 비교해 몇 가지 특이점이 존재했다.
첫째는 마법을 습득한 순간 마치 고유능력처럼 자연스럽게 사용법을 깨달았다는 거고.
두 번째는 지금처럼 영창을 외우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창 없이 사용이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어쨌거나 혈족 마법도 마법의 일종이니까요.
이건 멜피사에게도 슬쩍 물어봤지만, 전혀 모르는 눈치라 리아나의 앞에서는 일부로 영창을 하며 능력을 감춰두었다.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데.’
내가 책상 위에 늘어진 그림자에 집중하며 마력을 이동하려는 순간...
“...유진님?”
마르잔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마르잔.”
혼자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울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제법 일찍 만났다.
내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하자 마르잔은 안절부절못하더니 갑자기 허리를 깊게 숙이며 소리쳤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평범한 장소라면 시선을 끌 정도로 큰 목소리였지만 워낙 시끌벅적한 여관이라 별문제 없이 넘어갔다.
“...아무리 명령이라 해도 감히 칼리오페의 자제에게 손을 대다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때 그게 아니었으면 황녀가 눈치챘을걸.”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의 한숨을 쉰 마르잔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런데 황녀의 추궁에는 어떻게 빠져나오셨습니까? 분명 왜 맞으셨는지 물어봤을 텐데.”
“....”
나는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맥주를 들이켰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 앞에서 팬티를 보여달라고 했다는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루시아는? 어디 있어?”
“...아, 루시아님께서는 401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 같이 안 내려오고?”
“피로가 쌓이셨는지 오늘은 방에서 쉴 테니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혹시 유진님이 오셨을까 봐 잠시 확인하러 내려온 거고요. 이렇게 만난 걸 보니 시간이 잘 맞았군요.”
“응, 그러게. 나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
마르잔이 또다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지만... 저는 402호에서 묵을 예정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의 임무를 하기 위해서는 옆방에 묵는 게 당연했다.
“응, 그래. 알겠어.”
“....”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그럼 나도 슬슬 쉬러 가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계단을 오르던 와중 문뜩 생각나서 말했다.
“마르잔.”
“네, 유진님.”
“그 귀걸이 잘 어울리네.”
“...읏...감사...합니다.”
왠지 모르게 고개를 숙인 마르잔을 뒤로하고 나는 계단을 올랐다.
***
크림파이 여관은 4층으로 나뉘어 있다.
1층은 주점, 2층은 다인실, 3층은 개인실, 그리고 4층은 특실이다.
그리고 당연히 루시아가 묵는 곳은 4층 특실이었다.
똑똑─
401호 앞에서 선 내가 문을 두드려봤지만, 반응이 없다.
“루시아.”
다시 문을 두드리며 이름을 불러봐도 여전히 반응이 없다.
‘뭐지...?’
내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확인하니 침대 위에 루시아가 누워있다.
“...”
발소리를 죽인 채 루시아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마르잔에게 방해하지 말라고 할 정도면 분명 피로가 많이 쌓인 듯했다.
‘따로 방을 하나 잡아야겠네.’
내가 루시아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읏...!”
루시아의 팔이 갑작스럽게 나를 침대로 잡아당겼다.
“...쮸인님...?”
“루시아...?”
“헤헤...진짜 쭈인님이다. 헤헿."
척 보기에도 루시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내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루시아...혹시... 술 마셨느냐?”
“...헤헤...네에...! 루시아 술 쪼오끔! 마쎠써여!...에?..쥬인님이...두명...?..어...세 명..?””
별다른 술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루시아가 술에 워낙 약하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킁...킁....흐에...쭈인님...냄새...후아...”
내 위에 올라탄 루시아가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코를 마구 킁킁거리면서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 모습을 보니 루시아에게 엠마처럼 꼬리가 있으면 마구 파닥거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아... 일단 좀..진정을..”
냄새를 맡는 기세가 옷을 찢을 정도로 사나웠기에 내가 루시아의 어깨를 잡고 조금 떼어놓자.
“...히끅...”
루시아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리더니...
“...루시아?”
“...히끅..쥬인님이...나를....흐윽...끅...흐아아아아앙...”
...펑펑 울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