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칼리오페가의 후일담 (4)
* * *
열심히 꾸민 레이카를 봤을 때 루시아에 비해 한 단계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엄청난 착각이었다.
레이카에겐 미안하지만...
격이 다르다.
진부하고 지겨운 표현이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카르네아에서 동거하는 동안 루시아는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꾸며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또각
지금 눈앞에 루시아는 도저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마치 입학식 때 루시아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
아니 그것보다 더욱 심했다.
그때 루시아는 어디까지나 제복이라는 틀 안에서 갇혀 있었으니까.
사파이어처럼 푸른 눈동자와 드레스,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은발, 새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까지.
진심을 낸 루시아의 외모는 나조차도 혼이 빠질 것 같았다.
—또각
가문을 뜻하는 ‘서부의 빛’
능력을 뜻하는 ‘카르네아의 수석’
인품을 뜻하는 ‘가장 공평한 저울’
이외에도 루시아를 부르는 수많은 칭호가 존재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어째서 외모를 뜻하는 ‘제국의 달’인지 한순간에 이해했다.
그 냉정한 에르덴조차 넋이 나가 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
루시아에게 넋이 나간 에르덴을 보자 타의라고는 전혀 섞이지 않은 정말 순수하게 에르덴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내가 입을 열었다.
“...로즈님이 서운해하시겠습니다. 형님.”
내가 침묵을 깨고 말하자 정신을 차린 에르덴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티가 나더냐?”
“루시아님에게 넋이 나간거 말입니까? 아니면 로즈님 말입니까?”
“...둘 다 말이다.”
“네, 눈에 훤합니다.”
“그런 소리는 네게 처음 듣는구나.”
‘아멜리아’ 가문의 장녀 ‘로즈 아멜리아’가 에르덴 형님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하지만 에르덴 역시 로즈에게 연심을 가졌다는 걸 아는 사람은 오직 나 밖에 없을 것이다.
“괜찮으시다면 이 아우가 갑작스럽지만, 조언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에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진중한 것도 멋이긴 하나. 때로는 표현할 필요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로즈님이 형님께 열렬한 구애를 하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꽃이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드는 것처럼 여인도 관심을 주지 않으면 시들어버립니다.”
“....”
무언가 대답하려던 에르덴이 다시 말을 집어삼켰다.
그래, 안다.
안 그래도 차가운 에르덴이 로즈 에밀리아 앞에서 더욱 차가워지는 건 그녀가 싫어서가 아닌 단순히 긴장해서 그렇다는 걸.
‘...저런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는데 어떻게 알겠냐고.’
전장에서는 두려울 게 없어 보이던 에르덴이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말조차 제대로 못 꺼내는 숙맥이라는 것을 과연 누가 믿겠는가.
“꼭 말로 할 필요가 있습니까. 꽃다발과 함께 편지라도 쓰시지요.”
“...가끔 널 보면 내 마음을 읽히는 느낌이 든다.”
“그게 아우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고맙다.”
이걸로 때를 놓친 에르덴과 지쳐 포기해버린 로즈의 후회와 피폐가 가득한 러브스토리는 사라졌지만...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각
어느새 에다드의 앞까지 다가온 루시아가 치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우르엘라의 차기 가주, 루시아 우르엘라가 칼리오페의 가주를 뵙습니다.”
루시아가 말을 꺼내는 순간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른다.
“아..악단! 누가 연주를 멈추라고 했나!”
“죄송합니다!”
“...여기 음식이 떨어졌다.”
“금방 가겠습니다!”
그때야 멍하니 루시아를 보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본래의 역할로 돌아갔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루시아의 앞에서 선 사내라면 조금은 긴장할 만도 할 텐데 에다드는 전혀 그런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다.
역시 칼리오페의 전 가주 다운 대응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가주는 이제 내가 아니라네. 저기 있는 에르덴 칼리오페가 새로운 가주지.”
“...실례했습니다. 부디 이 무례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길.”
“아닐세. 이 늙은이의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가서 새 가주와 인사를 나누길 바라네.”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가 나와 에르덴이 서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루시아 우르엘라가 칼리오페의 새로운 가주님을 뵙습니다.”
“...우르엘라의 가문의 보석이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칼리오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부디 연회를 즐겨주시길.”
“감사합니다.”
에르덴에게 인사를 마친 루시아는 내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연회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
당연한 행동이다.
지금 이 연회장에서 루시아가 반드시 인사를 하러 가야 하는 인물은 ‘에다드’와 ‘에르덴’ 뿐이다.
내가 루시아의 ‘주인’이 아닌 칼리오페의 ‘삼남’으로 이곳에 있는 이상 내게 먼저 말을 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안 그래도 보는 눈이 많은 연회다.’
조금만 행동에 실수해도 순식간에 소문이 퍼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나는 루시아의 행동에 전혀, 조금도, 정말 눈곱만큼도 서운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
진심으로 아무렇지는 않았지만, 순수한 궁금증으로 루시아가 누구와 대화를 하러 가는지 보고 있으니 놀랍게도 가르시아와 레이카였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칼리오페 가문의 전 가주와 현 가주에게 인사를 나눴으니 다음 차례는 자연스럽게 안주인이 될 법도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내 직감은 그런 간단한 이유가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가르시아님. 레이카님.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루시아를 바라보는 가르시아와 레이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네, 오랜만입니다. 루시아님.”
가르시아의 대답에 루시아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훗, 언제 보아도 가르시아님은 전혀 나이를 드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어딘가 뼈가 있는 것 같은 루시아의 말에 가르시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린다.
“...루시아님도 나이가 들수록 더 아름답습니다.”
“가르시아님 만큼은 아니지요. 아, 물론 레이카님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 말씀입니까?”
“네, 가르시아님의 단정한 얼굴을 쏙 빼닮은 데다 몸매마저 단정해 보이니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건 달고 있어봤자 무겁고 귀찮을 뿐이니까요.”
루시아는 모성이 넘치는 가슴을 팔로 지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치..칭찬 감사합니다. 루시아님.”
“별말씀을요. 아! 갑자기 중요한 볼일이 떠올라서 그럼, 이만.”
“...네. 알겠습니다.”
레이카의 웃는 얼굴이 파들파들 떨렸지만, 루시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뒤로 돌았다.
돌아선 루시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여인의 웃음이었다.
“...”
“...”
그때 루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루시아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유진님,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그 말과 동시에 수많은 사내의 질투 어린 시선이 내게 쏟아진다.
“....”
루시아가 손을 내민 순간부터 이건 수락해도 눈에 띄고 거절해도 눈에 띄는 외통수였다.
“...영광입니다. 루시아님.”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손을 붙잡자 루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나와 다르게 어릴 때부터 사교회를 휩쓸고 다녔을 루시아와 호흡을 잘 맞출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루시아는 ‘침대 위의 왕자’를 쓸 필요조차 없이 너무나 익숙하게 나를 이끌었다.
“...후흣.”
손을 잡기 시작한 시작부터 수천 개의 꽃봉오리가 터지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루시아.
그 미소를 보며 춤을 추고 있자니 어느새 연회장의 구석으로 이동해있다는 걸 깨달았다.
“...흐읏..”
그때, 갑자기 루시아가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
생각하기도 전에 튀어나간 몸.
그 덕에 나는 간신히 루시아를 붙잡을 수 있었다.
“루시아님! 어디 몸 상태가 나쁘십니까?”
“...하아..하아...그게...오랫동안 마차를 탔더니 조금 어지럽네요.”
오랜만에 루시아의 열띤 숨을 느끼자 심장이 두근거린다.
“...유진님. 잠시...조용한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럼, 정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방으로 데려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루시아의 춤 신청으로 시선을 끈 상태다.
만일 한 방에 들어간 걸 목격하기라도 하면 무슨 소문이 돌지 모른다.
“제가 도와드릴...”
“괜찮습니다.”
“..네..넵..”
루시아를 부축하고 있자 친절한 사내가 끼어들었지만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거절했다.
그렇게 루시아를 부축한 채 정원을 걸으며 인기척이 없는 장소까지 이동하자 루시아가 갑자기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흐하...! 주....주인님...! 습...하...!..후하아아...!...흐읏...주인님의...냄새...헤헿.”
나를 꼭 껴안은 채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켜는 루시아.
“...루시아 무슨 일이냐. 왜 연락도 하지 않고 칼리오페에...”
“...그..그게...흐읏..! 아..안대겠어요..!..읏...차..참으려 했는데...하으...오랜만에..주인님의 체온을 느끼니까..!”
루시아가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듯한 루시아의 행동에 내가 혹시나 해 물었다.
“...루시아...너 설마...”
“...하아...하아...죄, 죄송해요...주...주인님..저...더는..!”
루시아가 울먹거리는 얼굴로 드레스를 들어 올리더니 구멍이 뚫린 검은 레이스 팬티를 내게 보여주었다.
“흐읏...!주..주인님의...시선이..!루시아의...음란한..보..보지에...흐읏..!”
보여주는 것만으로 가볍게 절정한 루시아가 몸을 흠칫 떨자 보지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우웅... 우웅..
이제는 없으면 서운해질 것 같은 물건.
...진동석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