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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102화 (102/354)

〈 102화 〉 칼리오페가의 후일담 (3)

* * *

“...유진.”

“에르덴 형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에르덴 무표정 얼굴로 서 있었다.

재력과 권력을 과시하듯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귀족들과는 다르다.

장식이라고는 고작해야 은줄이 전부인 정장을 입었을 뿐인데 외모가 받쳐줘서 그런지 오히려 다른 이들에 비해 에르덴이 훨씬 눈에 띄는 듯한 느낌이었다.

“...”

“...”

차기 가주 자리를 포기했다고 해도 아직은 에르덴을 보기는 조금 힘든지 가르시아와 레이카는 말없이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에르덴에게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네가 미안해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그런데 형님, 한창 바쁘실 텐데 이 아우에게는 무슨 일이십니까?”

내 말처럼 수많은 귀족이 차기 가주와 말 한마디를 섞기 위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바쁘기야 하지만 저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먼저 네게 해야 할 것이 있다.”

“...뭘 하시려...?”

내가 말을 끝내도 전에 에르덴은 갑작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고맙다. 전부 네 덕이다.”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상황을 이해하니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다른 귀족들을 상대하기에도 바쁜 이 시간에 굳이 나를 먼저 찾아와 감사를 전하는 건 정말 에르덴다웠다.

‘하지만...’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다.

차기 가주가 삼남 따위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허리를 숙인 건 시선을 끌어도 너무 끌었다.

봐라.

지금도 시선이 미친 듯이 몰리고 있지 않은가.

“자자, 형님. 허리를 드시죠. 다른 사람의 앞에서 칼리오페의 가주가 허리를 함부로 숙이면 흠이 됩니다.”

“아직 나는 가주가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앞이기에 허리를 숙인 것이다. 내가 네 공을 백 번 치하해도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한 번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제발 좀 일어나 주시지요. 제가 부담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이 좋은 날 제가 연회장을 떠나야겠습니까?”

내가 앓는 소리를 하고 나서야 에르덴이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고맙다. 이 빚은 잊지 않으마. 바라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라.”

딱히 바라는 것은 없었다.

내가 에르덴을 차기 가주로 세운 이유는 뭔가를 바라기보다는 훗날 전쟁이 터졌을 때 칼리오페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니까.

‘...흐음.’

그렇다고 바라는 게 없다고 하면 에르덴이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눈치이기에 나는 혹시 싶은 마음으로 말했다.

“...그럼, 나중에 제가 부탁을 드리면 이유를 묻지 말고 한 번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알겠다.”

예상과 달리, 에르덴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본래 에르덴의 성격상 본래 이런 종류의 약속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지식한 그의 성격상 반드시 내용을 듣고 나서야 약속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아무런 질문도 없이 에르덴이 조건을 수락했다는 건 그만큼 나를 강하게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 심장을 걸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마.”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말투였지만 그래도 잘 보니 에르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고는 주제를 돌렸다.

“...케일 형님과는 말을 해보셨습니까?”

“아직. 지금부터 말을 걸어봐야지.”

에르덴의 시선을 따라 가보자 어두운 표정을 한 케일이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케일의 주위에는 수많은 귀족 영애들이 모여 있었다.

물론 저곳에 모인 영애들의 가문들은 조금 격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후계자 경쟁에 밀린 이상 쟁쟁한 가문들은 전부 에르덴에게 붙을 테니까.

하지만 어쨌든 케일도 ‘칼리오페’의 성을 달고 있지 않은가.

하위 가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기 좋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케일 역시 외모만큼은 봐줄 만하다.

지금까지 케일이 인기가 없던 것도 외모가 문제가 아니라 개떡 같은 성격과 경박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

그런데 얼굴만큼은 잘생긴 케일이 우수에 찬 눈빛을 하고 분위기를 잡고 있으니 여자가 꼬이지 말라고 해도 안 꼬일 수가 없는 거다.

‘헛되고 헛되도다.’

자지를 잃고 나서야 자지를 쓸 일이 생기다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란 말인가!

나는 케일을 향해 마음속으로 건배를 건네고는 다시 와인을 홀짝이고 있자.

땡─ 땡─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단상 위에 올라간 에다드가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을 칼리오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환영하네. 그리고 갑작스럽지만 공표할 것이 있네.”

다들 모른 척하지만 에다드의 입에서 차기 가주로 에르덴을 지명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에다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나는 에르덴에게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가주 자리를 넘겨주고 은퇴하겠네.”

“...!”

나 이외에는 다들 놀란 척을 할 여유도 없이 놀랐다.

“...에다드님 지금 그게 무슨...”

“은퇴는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닌지 싶습니다.”

상황을 파악하자 여기저기서 반대의 의견이 터져 나왔지만 에다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미 결정한 일이네. 아니면 에르덴이 가주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인가?”

“...아닙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훌륭하신 판단입니다.”

“에르덴...아니. 새로운 가주님께 건배하시죠.”

역시 눈치 하나로 살아가는 귀족들답게 에다드가 마음을 확고히 굳혔다는 걸 안 순간 순식간에 말을 뒤집어 버린다.

“그럼, 칼리오페의 새로운 가주 에르덴님의 위해 건배!”

“건배!”

여기저기서 축배를 들고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막상 에르덴 본인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다.

“...이게 무슨. 아버지가 은퇴하시다니?”

“이미 공표한 걸 어쩌겠습니까. 되돌릴 수 없으니 즐기시죠.”

“...”

에르덴이 눈빛으로 너는 이미 알고 있었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대답 없이 포도주를 홀짝였다.

“에르덴 공, 경축드립니다. 저는 바니타스라 합니다. 본래 에르덴 공의 성품을 존경하고...”

그때, 눈치를 보던 귀족 중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

“크흠, 오랜만입니다. 에르덴 공.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에르덴 공..”

선수를 빼앗긴 귀족들은 견디지 못하고 동시에 에르덴에게 달려들고 나는 그 틈을 타 슬쩍 구석으로 물러났다.

‘공식 발표도 끝났고...’

루시아가 올 때까지 조금 시간이나 때울 생각으로 연회를 구경하고 있자 흰 드레스를 입은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저...혹시....괘..괜찮으시다면..저와...추..춧을!..읏!”

춤을 권하던 영애가 혀를 씹었는지 폴짝 뛰더니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아...아..아니에요. 실례했습니다.”

이대로 보내면 매너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시간도 때울 겸 나는 영애의 손끝을 살짝 붙잡았다.

“괜찮으시면 저와 한 곡 추시지 않겠습니까?”

“...읏!...네.”

본래 춤이라고는 쳐본 적도 없지만, 여자를 꼬시는 일에 관한 것이라면 거의 완벽하게 처리하는 ‘침대 위의 왕자’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그 힘을 보여주었다.

“...괴..굉장히...춤을...잘..추시네요!”

“과찬이십니다. 전부 영애께서 잘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저...저는 아무 것도...그...그런데 조금 지치네요.. 괜찮으시다면 조금 산책하지..까앗!”

열심히 말을 꺼내던 영애의 드레스에 붉은 와인이 쏟아졌다.

“어머, 미안해라. 괜찮아요?”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말투로 말하는 레이카.

“네..넷...”

“...실례했네요. 도둑고양이가 눈에 들어와서.”

“연회장에 고...고양이가 있었나요?”

“...네, 눈치도 없이 들어 왔더라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곧 쫓아낼 예정이니까."

딱, 딱.

레이카가 손가락을 두 번 튕기자 열심히 음식을 나르던 엠마가 나타나 영애를 질질 끌고 나갔다.

“어머나! 옷이 많이 더러워지셨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갈아입을 옷은 준비되어있으니까요! 자,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네?...넷?..자..잠시만..”

“어서요. 빨리 갈아입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실 수도 있어요.”

“...아..아니..그..그정도는...!”

영애가 약간 반항해보지만, 엠마의 힘을 이길 수는 없다.

결국, 연회장 밖으로 끌려가는 영애를 보고 나서야 내가 말을 꺼냈다.

“...뭐 하는 거지? 엠마와 짜기라도 했나?”

“어머, 오라버니. 무슨 뜻일까요? 그저 발이 엉켜 포도주를 좀 쏟았을 뿐이랍니다.”

레이카가 모른 척하며 머리를 베베 꼰다.

그러자 가르시아까지 합류해 말을 이었다.

“잘했다. 레이카. 내 유진을 보는 눈빛이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저런 건 초장부터 제압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법이다.”

“어머니... 그저 춤 한 번 췄을 뿐입니다.”

“원래 모든 일의 시작은 춤 한 번, 술 한 잔에서부터 벌어지는 법이지.”

“....”

경험에서 비롯되어서 그런지 가르시아가 말하니 어쩐지 신뢰가 갔다.

“그건 그렇고 오라버니. 제 손이 비었네요. 괜찮으시면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가족끼리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닙니다. 누님.”

“....”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레이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보지만 뭐 어쩔 건가.

그렇게 춤과 음악으로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는 연회가 이어지고 있을 때 조금씩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

처음에는 한 사람이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보더니 마치 석화의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멈춰 서고 만다.

그리고 점차 한 사람씩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역시나 침묵한다.

이윽고 악단 역시 악기 연주를 멈추고 그저 멍하니 걸어오는 누군가를 바라본다.

“왜 연주를 멈춘 것...”

“다들 어디를 보고...”

이쯤 되니 사람들도 위화감을 느끼고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

나도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이 모인 곳을 바라보는 순간.

또각—

세계가 멈춘 기분이 들었다.

또각─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모이고 그토록 떠들썩하던 연회장이 발걸음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또각─

딱히 특별한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다.

또각─

그저 평범히 걷고 있을 뿐이다.

또각─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또각─

그저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장중을 압도하는 여인.

또각─

그것이 루시아 우르엘라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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