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악역 영애 길들이기 (2)
* * *
“...라는 일이 있었어요.”
엠마가 눈을 피하며 이곳에 레이카가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
나는 말 없이 이마를 짚었다.
엠마의 침대 위에 누워있는 레이카를 보자 긴 한숨이 반사적으로 흘러나왔다.
“...죽인 건 아니지?”
“에이, 제가 어떻게 도련님의 허락 없이 함부로 손대겠어요?”
엠마의 말 속에서 내 허락만 있으면 바로 죽여버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온몸의 솜털이 솟는 게 내가 좆됐다는 걸 증명했다.
‘...이거 어쩌냐?’
나는 레이카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3장의 보스, 마이샤 가문
마이샤의 전투력은 확실히 다른 장들의 보스와 비교하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난이도가 낮은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도 내가 공략법을 알고 있어서 무난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지, 본래 같으면 몇 번이고 암살 시도가 왔어야 했고, 나로 안되면 형님을 죽이려 드는 등, 벌써 열 번 가까이 베드엔딩을 볼 각이 나왔다.
‘...안 좋아. 레이카에게 손을 대는 건 어떻게든 피해야 했는데.’
그리고 내가 아는 최악의 베드엔딩 조건 중 하나는 완전히 함락되기 전의 가르시아에게 자식의 몸에 손을 댔다는 걸 들키는 것이다.
‘...지금 가르시아의 공략은 절반 정도 진행됐다.’
가르시아의 불감증은 늘어난 감도 덕분에 어느정도 치유되었다.
지금의 가르시아는 태어나 처음 느끼기 시작하는 쾌락에 솔직해지는 단계.
이제 조금 있으면 쾌락을 얻기 위해 자신을 하나둘씩 내려놓는 단계로 넘어 갈 것이다.
...하지만.
엠마가 레이카에게 손을 댔다고 밝혀지는 순간 그녀는 순식간에 내가 펼친 덫에서 빠져나갈게 분명했다.
가르시아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는 초월했으니까.
본래 레이카의 정석적인 공략법은 가르시아를 완전히 조교 하여 내가 주는 쾌락을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하다고 여기게 만들어 레이카를 스스로 바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르시아는 끝까지 나를 위해서가 아닌 레이카를 위해서 내게 바치는 것이다.
즉, 가르시아에게 내게 복종해 쾌락을 얻는 것이 부와 권력보다 몇 배나 가치 있다고 진심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그래서 도련님. 처리할까요?”
어디선가 단검을 꺼낸 엠마가 섬뜩하게 말한다.
엠마가 목을 조르며 위협한 것만으로도 가르시아를 적으로 만들기 충분한데 레이카를 죽인다?
그때는 진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일단 가르시아가 미쳐 날뛰기 시작하고, 어찌어찌 가르시아를 물리치더라도 다음에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망나니에서 갑자기 각성한 케일과 맞서 싸워야 했다.
‘...하아.’
그렇다고엠마를 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선택지다.
나는 이미 혼혈들의 앞에서 그들을 내 품 안에서 쉬게 하겠다 맹세했다.
이 맹세를 깨는 순간 든든한 아군들은 순식간에 적이 되어 나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씨발.’
이 정도면 세계가 나를 억지로 까는 거 아닌가?
‘아카조교사’를 플레이하며 단 한 번도 다과회를 마치고 레이카는 나를 찾아온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엠마가 아주 잠깐 자리를 비운 순간 하필이면 레이카가 나타났다고?
‘이게 말이나 되냐고!’
참으려 해도 한숨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넣어두어라. 그리고 너는 가서 다시 고든 아저씨한테 특성을 감추는 훈련 받아라.”
“엣..? 하하.. 에이, 도련님.. 지..진심은 아니시죠?”
엠마가 웃음으로 넘기려 하지만 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진심이다. 네가 귀를 들키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지는 않았다. 씁! 봐라! 지금도 튀어나오지 않았느냐.”
조금 심하게 말했나 싶었지만, 엠마의 머리에 튀어나온 귀를 보자 그런 감정이 싹 사라졌다.
“..저, 저도..평소에는 잘..숨기는데...도련님이랑 같이 있으면 감정의 제어가 잘 안 돼서.”
“변명하지 마라.”
“히잉...도련님...다음부터 잘할테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엠마가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리지만 나는 단호하게 쳐냈다.
“...엠마, 앞으로 내 곁에 머물겠다면 이건 최소한의 조건이다.”
냉정하게 끊어내는 말에 엠마의 튀어나온 고양이 귀가 축 늘어진다.
“...네에.”
엠마가 밖으로 걸어 나가자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엠마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엠마.”
“네! 도련님! 혹시 봐주시려고요?”
엠마가 눈을 반짝이며 쏜살같이 되돌아왔지만 나는 그저 머리 위에 있는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집어넣으라고.”
“...도련님. 미워요.”
“내가 더 밉다.”
참지 못하고 엠마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였다.
“아야! 폭력 반대에요!”
머리를 감싼 엠마가 방에 떠나고 나는 의자에 주저앉아 레이카를 보았다.
향료를 발라가며 관리하는지 좋은 향기를 풍기는 머리카락, 숨을 내들이 쉴 때마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 새하얗고 길게 뻗은 다리.
“...유전자의 힘이란.”
그러고 보니 비비안과 비앙카의 후장은 왠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과연 레이카와 가르시아의 보지도 비슷한 느낌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현실을 마주 보려고 했지만,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해결책이 한가지 떠오르기는 했다.
그러나 이걸 실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래도 미지수였다.
“...시발. 그게 되겠냐고...”
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책상에 박자 덜컹하는 소리가 함께 한쪽 벽이 조금 밀려났다.
“...?”
조심스럽게 밀려난 벽을 잡아서 빼내자 작은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이건 또 뭐야?’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이벤트다.
하긴 애초에 레이카가 이곳에 있는 것도 없었던 일이니까 지금 발생하는 모든 이벤트는 처음 볼 것이다.
숨겨진 공간에 손을 집어넣은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꺼냈다.
‘뭐야 이게...?’
공간에서 나온 건 작은 내 얼굴만 한 상자였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엄청난 양의 그림이 있었다.
더 정확히는 나를 그린 그림이 말이다.
슥슥 넘겨서 확인하자 처음에는 어린애가 그린 것같이 엉망진창의 모양새였지만 그림이 최근에 가까워질수록 거의 사진과 같은 정밀도를 보여주었다.
“....”
여기서 무엇보다 두려운 점은 모든 그림의 나는 잠을 자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잘 때 마다 계속 옆에 있었단 말이야?’
몇 년 동안이나 숨을 죽인 채 잠자는 내 모습을 그리는 엠마의 모습이 떠올린다.
‘잠시만...’
분명 엠마는 나보다 연하이다.
하지만, 알아볼 수 있는 그림부터 확인해봐도 나는 누가 봐도 어린애로 보이는 수준.
...그렇다면 엠마는 도대체 몇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단 말인가?
오싹—
판도라의 상자가 이런 것일까.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열어버린 것 같았다.
‘...생각하지 말자.’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거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나는 상자 속에 다시 그림을 차곡차곡 집어넣고는 상자를 다시 벽 속에 숨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었다.
“...으음...”
그때 레이카가 곧 정신을 차리려 드는 듯 신음을 흘렸다.
나는 재빨리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와 얼굴을 점검하고는 의자에 돌아와 턱을 괸 채 레이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케흑..의아앗!”
이윽고 목을 감싸며 놀라 일어난 레이카.
“하아...하아..살았어...? 읏.. 여긴?”
이내 자신이 살아있고 또 구속당했다는 걸 확인한 레이카가 나를 바라보고 이를 갈았다.
“...유진.”
“레이카”
평소의 레이카라면 누님이라고 부르라며 쏘아붙였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가르시아에 관한 것인지 내 엠마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어느 쪽의 질문이든 답할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었다.
“지금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나? 질문은 내 쪽에서 한다.”
내가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말하자 레이카가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카가 받은 교육에는 생존술도 포함되어있다.
납치당했을 때 중요한 점은 납치범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
그것을 냉정하게 파악한 레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질문이니 솔직하게 대답하도록.”
“...알았어.”
“자위는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하지? 본인이 민감하다고 생각하나?”
“...너 미쳤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나왔는지 레이카는 내게 욕설이 튀어 나온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레이카의 욕설들.
“하긴 미쳤으니까 그런 짓을 저질렀겠지! 지금이라도 칼리오페의 성을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생각에 내가 한숨을 흘렸다.
“...순순히 대답하는 것이 신상에 좋을 텐데?”
레이카가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바라본다.
“하, 왜? 어머니에게 손을 대고도 부족해서 이젠 나까지 따먹으려고?”
“...”
따먹으려고 하는 것은 맞지만 내 질문은 어디까지나 레이카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였다.
“죽어! 쓰레기! 개새끼! 병신새끼!”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에 대화가 진행되질 않는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표정을 굳힌 나는 품 안을 뒤지며 레이카를 향해 다가갔다.
“..오..오지마! 오지 말라고 이 강간마 새끼야!”
레이카는 이불로 몸을 감싼 채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지만, 독 안에 든 쥐에 불과했다.
“끅...! 윽...하아...”
저항하는 레이카의 입을 억지로 벌려 미약을 흘려 넣었다.
“야!..너! 지금 나에게 뭘 먹인 거야!”
“...”
나는 말 없이 레이카를 바라보았다.
미약의 3.3배 침대 위의 왕자 3배.
총 감도 9.9배
불감증이었던 가르시아도 10배면 뇌가 망가져 중독될 가능성이 존재했는데 과연 불감증이 아닌 레이카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분명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도 살아야지.’
가르시아가 레이카를 찾기 전까지 레이카를 타락시키는 것.
이것이 내가 떠올린 유일한 생존 루트다.
‘그럼...’
악역 영애 길들이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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