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81화 (81/354)

〈 81화 〉 망나니, 악역 영애, 의붓 엄마 (4)

* * *

“..건방진 놈”

서재에 홀로 남은 에다드 칼리오페가 문득 중얼거렸다.

─저야 우르엘라의 기둥서방짓이나 하며 살면 되는데 뭐하러 형제들의 목을 베겠습니까?

후계자 자리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유진의 태도는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에다드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웃음이 가득했다.

에다드는 아버지로서 또 가주로서 세 아들을 모두 공평히 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에다드도 인간인 이상 가장 아픈 손가락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유진 칼리오페가 그러했다.

에다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인과의 결실인 유진에게 조금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첫째 부인은 정략결혼이었다.

정략결혼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칼리오페 가문의 후계자로 지명된 순간 에다드는 누군가와 사랑을 하겠다는 마음 따위는 버렸다.

그저 가문과 백성들의 번영을 위해 가장 어울리는 상대와 결혼 했을 뿐이다.

하지만, 에다드가 가문을 떠난 사이 그녀가 병으로 죽고, 엄마는 언제 돌아오냐는 에르덴의 말을 듣자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 사이를 파고든 것이 가르시아 마이샤였다.

사실, 마이샤가 몰래 침대에 숨어들어온 것쯤이야 얼마든지 지워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에다드는 책임감만으로 혼인하였고 몇 번이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마이샤를 사랑하지 못했다.

자신을 권력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마이샤를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에다드의 마음속 허무함은 더욱 커져만 갔고 그 공허함을 잊기 위해 또다시 전쟁터에 나섰다.

좀 더, 좀 더, 위험한 곳으로....

그렇게 싸우던 어느 날 함정에 빠져 수많은 마물의 파도 속에서 익사할 뻔한 순간 만난 것이 파볼리에 키아라였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마물의 파도를 헤치고 달려오는 키아라는 마치 전장의 여신과도 같았다.

─에다드공, 무사하신가요?─...결혼합시다.─...네?

첫 만남, 그것도 피투성이에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시체가 넘쳐나는 전장에서 프로포즈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거절당했지만, 가주로서의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버리고 몇 번이고 매달린 끝에 간신히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해요. 결혼.’

하지만 본래부터 에다드와 파볼리에 키아라와의 혼인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파볼리에 가문이 자신들의 장녀가 정실도 아닌 마이샤 가문의 딸보다 아래에 있는 첩으로 들어와야 하는 사실을 받아들일 리 없었으니까.

결국, 파볼리에 가문은 키아라에게 이 관계를 끝내지 않으면 파문을 당할 것이라 통보했고 그것으로 관계는 끝인가 싶었지만...

키아라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에다드에게 왔다.

‘하아... 결국, 이렇게 됐네요. 모든 걸 버리고 당신을 선택했으니 당신은 죽을 때까지 저를 후회하지 않게 해줘요.’

어찌 이런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키아라와 함께 한 몇 년이 에다드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래...

그녀가 파볼리에 가문의 내전에 휩쓸려 죽기 전까지 말이다.

파볼리에는 키아라를 버렸지만 키아라는 파볼리에를 버리지 못했다.

본가와 분가의 사이에서 터진 내전을 막기 위해 키아라는 파볼리에로 향했고 그곳에서 죽었다.

에다드는 키아라를 죽게 만든 파볼리에를 원망했지만 이미 멸망해버린 파볼리에를 멸망시킬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에다드는 절망할 뻔했지만, 이번에는 유진이 남아있었다.

얼굴은 키아라를 빼닮았지만, 성격은 반대로 유순했던 그 아이...

유진을 보며 에다드는 삶의 의지를 되찾았지만 다른 아들에 비해 유진에게 너무 많은 정을 줄까 두려워 의도적으로 더 멀리했다.

그 결과 유진은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또 그것이 너무 괴롭고 미안하여 에다드가 더욱더 유진을 멀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작년 그 아이가 칼리오페를 떠났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유진은 마치 파볼리에 키아라처럼 자신의 앞에서 서서 당당히 의견을 내밀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

에다드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거기에 데릴사위라..’

만일 에다드가 키아라를 만난 순간 칼리오페 가문을 버리고 떠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과거의 자신이 선택하지 못했던 길을 걷는 것 같은 유진의 모습에 에다드가 흐뭇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미리 혼수나 준비해야겠군.”

***

밖으로 나가니 알프레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엠마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프레도는?”

“알프레도님은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습니다. 불러올까요?”

“아니, 됐어. 바쁠 텐데.”

“네...헤헤..”

생글생글 웃으며 엠마가 옆으로 딱 붙어 온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네! 오랜만에 도련님을 뵈었잖아요! 그게 너무 좋아서요!”

내게도 파볼리에의 피가 흐르는 탓일까.

별다른 노력하지 않아도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도련님. 저, 곧 생일이에요. 기억나세요? 다음 생일을 맞이하면 저랑...”

저벅─저벅─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형제라고 케일의 외모는 잘생겼다고 말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미역처럼 꼬불거리는 녹색 머리, 날카롭고 기분 나쁜 눈초리가, 외모를 모조리 갉아 먹었다.

“어이.”

케일이 나타나는 순간 엠마의 표정이 쓰레기라도 보는 것처럼 굳었다.

엠마의 몸을 훑는 끈적끈적한 성욕이 잔뜩 묻어나오는 케일의 눈빛을 보자 그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동생과 할 말이 있다. 넌 자리를 비켜라.”

“....”

케일의 말에 엠마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도록 해. 형님과 대화하다 갈 테니까.”

“...네 도련님.”

엠마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려는 순간 케일이 엠마의 손목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기다려라... 지금 내 명령을 무시하면서 저 자식 말은 듣는 거냐?”

손목을 붙잡는 순간 엠마의 눈이 싸늘하게 식으며 날 이선 목소리로 말했다.

“놔주시죠. 저는 유진 도련님의 직속 하녀입니다. 케일님보다 유진님의 명령을 우선시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큿... 어디 내가 가주가 되고 나서도 그렇게 뻗댈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칼리오페의 후계자라는 놈이 고작 고용인의 경고에 겁먹는 모습을 보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빌어먹을 년. 언젠가 내 밑에서...”

엠마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눈치를 슬슬 보던 케일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야? 눈 안 깔아?”

케일 나름대로 위협이라고 한 것 같지만 가소롭게 짝이 없었다.

‘...염동력 한 번 맞으면 뒤질 새끼가.’

케일의 입장에서는 아직 성장하기 전에 나를 봤으니 이런 거만한 태도도 당연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내가 고개를 숙이자 케일이 만족한 듯 코웃음 쳤다.

“그래, 넌 그저 운이 좋아서 카르네아에 들어간 것뿐이다. 그걸로 네가 나보다 잘났다는 착각은 하지 마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 주제 파악은 잘해야지. 그런데 말이야...”

케일이 주먹으로 내 어깨를 퍽 밀쳤다.

로레오스의 주먹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

피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지금 경각심을 심어줘서 좋을 것이 없었다.

“도대체 아버지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그렇게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눴을까?”

“....별다른 이야기는..”

“솔직하게 말해라. 예전처럼 맞고 싶지 않으면.”

케일이 경고하듯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줘보지만 사실 내가 느끼기에는 안마랑 다를 바 없었다.

느껴지는 근력을 능력치로 표현하면 8~9 정도나 될까.

‘진짜 같잖네...’

비비안, 트리스탄, 황녀 같은 괴물들이랑 놀다가 이런 애새끼랑 싸우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너, 설마 후계자 자리를 탐내는 거냐?”

결국, 카일의 목적은 이거였다.

자기 것도 아닌 자리를 뺏길까 두려워 짖는 개새끼.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압니다. 그저 아버지와 오랜만에 안부를 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케일 형님을 지지하기로 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조금전까지 위협하던 케일이 반색하며 웃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는지 표정을 관리하려고 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타이밍이다.

“예, 제가 누구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차기 후계자 자리는 케일 형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에르덴 형님은 너무 딱딱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그래 잘 생각했다.”

“대신 형님께서 가주가 되시면 저에게도 한 자리를...”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듯 말하자 케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무 걱정하지 마라. 아무리 반쪽이라 해도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인데 내가 너를 안 챙기겠느냐. 재수 없는 에르덴만...쯧. 이건 듣지 못 한 거로 해라.”

“어차피 한 배를 탔는데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아니, 아직은 확실히 믿을 수 없다.”

멍청한 놈이 이제와서 냉정한 척을 하지만 탐욕이 가득한 눈빛은 숨기지 못했다.

“내가 자리를 마련할 테니 네가 어머니께 직접 말씀드려라. 그때는 나도 진짜 한배를 탔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나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케일의 행동에는 손뼉을 치고 싶은 지경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머님께 말씀드리죠.”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가르시아 마이샤와의 대화 자리였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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