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망나니, 악역 영애, 의붓 엄마 (3)
* * *
다음 날, 가주 에다드 칼리오페가 서재로 나를 불렀다.
엠마에게는 적당한 옷을 준비해달라고 말 했것만 예상보다 훨씬 고급 의상이 도착했기에 알프레도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었다.
실크로 만들어진 셔츠 가슴팍에는 가문의 상징인 방패 모양의 배지를 달았고, 은은하게 빚을 내는 가죽 외투는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잘 어울리시는군요.”
“좀 과하지 않나?”
“재단사가 도련님의 옷이라고 하니 열과 성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엠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앗! 도련.....”
웃으며 인사를 하던 엠마는 갑자기 턱이라도 빠진 듯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네가 보기에도 좀 과한 거 같나?”
“아, 아뇨! 정말 정말 잘 어울리세요. 네! 정말로요!”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부정하는 엠마의 머리 위로 고양이 귀가 튀어나왔다.
“...엠마, 귀가 튀어나왔다.”
“흐엑! 죄송해요.”
엠마가 카츄사를 고쳐 쓰자 튀어나왔던 고양이 귀가 머리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아직도 귀가 튀어나오는구나.”
“...아니에요. 정말 오랜만에 튀어나온 거예요.”
“그래, 그렇다고 하자.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라.”
“저, 정말이라니까요. 도련님.”
“엠마, 도련님께 거짓말은 안된다.”
“알프레도님! 제가 언제 거짓말을 했어요!”
알프레도와 함께 엠마를 놀리고 있자 어느새 에다드가 기다리고 있는 서재가 보였다.
문 앞에서 서서 내가 알프레도를 바라보자 그가 노크를 하였다.
“가주님. 도련님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도록.”
철컹─
문이 열리자 알프레도와 엠마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근엄하게 앉아있는 에다드를 보며 나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쿵─!
곧이어 문이 닫히고 나와 에다드만이 방에 남게 되었다.
“앉거라. 차라도 마시겠느냐?”
“감사히 받겠습니다.”
칼리오페의 가주가 직접 내려주는 차를 마시는 것도 호화롭다고 생각했다.
내가 차를 한 입 홀짝이자 에다드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많이 성장했구나. 분명 카르네아에 입학하기 전에만 해도 눈조차 못 마주치더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차를 마실 정도는 되는구나.”
“감사합니다. 카르네아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 그런 거 같구나. 솔직하게 말하마. 나는 네가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바다.
지금까지 ‘유진 칼리오페’의 행적을 보면 당연히 후계자 경쟁에 관심이 없다는....
“우르엘라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갈 줄 알았기 때문이다.”
“...?”
에다드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사가 튀어나와 차를 뿜을 뻔했다.
어떻게 에다드가 루시아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눈치챘다는 말인가?
아카데미 내부에서 누군가에게 들켰나?
‘...그럴 리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시아와의 관계만큼은 들키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 하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관리를 조금 느슨하게 한 비비안과 이런 소문이 돌았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다.
어차피 내가 베아트리스 가문의 차녀를 건드린 것 정도는 큰 흠이 안 될 뿐만이 아니라 만에 하나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면 첩으로라도 들이면 되기에 문제 될 것도 없으니까.
그러나 루시아는 다르다.
루시아는 우르엘라 가문의 차기 가주로 이미 확정 난 상태.
간단히 말하자면 내 눈앞에 있는 에다드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루시아와 스캔들이 터진다면 분명 행동에 엄청난 제약이 걸린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어린애들의 장난이라 생각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달 이렇게 편지를 보내지 않느냐! 게다가 요즘 들어 가주님이 아니라 아버님이라고 적기도 하더군. 흐하하하하! 유진, 너는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런 외모를 물려줬으니 말이다.”
에다드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루시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루시아가 아버지와 10년 동안이나 내통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에다드의 말투로 봐서는 이미 나와 루시아와의 관계는 거의 확정적으로 보였다.
정신을 차리니 루시아라는 거미줄에 걸린 느낌이랄까.
‘...진정해라.’
이 세계에 와서 제일 많이 늘어난 것이라 하면 누가 뭐라해도 연기력일 것이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분을 가라앉히며 은은한 미소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후계자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흐음, 역시 추운 북부에서 사는 것보다야 우르엘라 가문의 데릴사위로 사는 게 좋다는 거냐? 아니면 리아나 황녀 전하의 쪽이냐? ...네 녀석은 어릴적부터 외모 하나 만큼은 훌륭했지만 설마 제국의 태양과 달을 동시에 사로잡을 줄을 몰랐구나.”
“...그게 무슨 뜻인지?”
“아버지에게도 감추려 드는 것이냐? 황녀 전하의 서신을 읽는 내내 얼굴이 붉어지더군.”
그렇게 말하며 에다드가 황녀의 서신을 내게 건네주었다.
서신을 받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불길함이 느껴졌다.
“...제게 보여줘도 괜찮으십니까?”
“서신에 네게 보여주라고 적혀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절대 당황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서신을 읽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뭐야, 이게.’
정신이 나갈 거 같았다.
개인적인 서신인 만큼 완전히 공식적인 문체를 기대한 것은 아니나, 이건 정도를 넘었다.
어떻게 내가 황녀를 구했는지나 황실의 초대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짧게 들어있었고 95% 이상이 그 순간 ‘유진 칼리오페’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는 중간중간 직접 그려놓은 그림마저 들어있었다.
내가 짧게 속으로 한숨을 내뱉고는 편지를 돌려주려 했지만 에다드는 받지 않았다.
“네게 보내는 연서에 가까운 물건이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맞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당장이라도 돌아가 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에다드와 독대하는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제가 독대를 청한 이유는 제가 첫째 형님을 지지한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순간 부드럽게 껄껄대던 에다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꿨다.
“...건방지구나. 네놈 혼자서 지지를 선언한다고 후계자를 선정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하느냐?”
에다드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후계자 경쟁에 참여하는 것과 후계자 선정에 관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후계자 선정은 가주 고유의 권리.
내가 감히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차기 가주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훗날 칼리오페 가문이 전쟁에서 어느 편에 붙을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 바뀔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제힘은 보잘것없지만 제 지지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나 내 무력은 여전히 나약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그렇지 않다.
우선 에르덴 칼리오페는 스스로 외가의 지원을 거부했다.
당연히 외가에서 반발하며 어떻게든 내부 세력을 꽂아 넣으려고 했지만, 에르덴이 단식투쟁을 시작해 죽기 직전까지 가자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케일 칼리오페는 외가의 힘이 너무 나약했다.
가르시아가 에다드와 혼인을 맺기 전 마이샤 가문은 사실상 평민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가문이었다.
그러니 칼리오페 가문 내부에 사람을 꽂아 넣고 싶어도 꽂아 넣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 어머니의 가문인 파볼리에는 지금은 멸망했지만, 한때 칼리오페나 우르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가문 중 하나였다.
아무리 어머니가 가문과의 불화로 파볼리에의 이름을 버리고 시집을 왔다고 했을지라도 어머니에게 충성하는 고용인들 만큼은 모두 데리고 왔다.
그리고 지금 와서는 집사, 요리사, 재단사, 정원사, 각종 주요 직책의 장에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즉, 세 명의 후계자 중 칼리오페 가문 내부에 직접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놀랍게도 나라는 뜻이다.
“...케일이 아니라 에르덴을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가주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둘째 형님은 성정이 잔혹하고 그릇이 작습니다.”
“가문의 지원도 거절한 에르덴이 너를 받아들이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이건 형님의 핏줄이 아닌 능력이 만들어 낸 것이니까요. 지금도 형님이 직접 얻어낸 병사들의 지지는 거부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네가 에르덴을 지지하면 가르시아가 가만히 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문제입니다.”
본래 ‘아카조교사’의 정사대로라면 내가 에르덴을 지지하거나, 새로운 후계자로 나서는 순간 가르시아에게 독살당한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이번의 나는 가르시아의 '설득'을 위해 여러 준비를 해왔으니까.
계획대로만 되면 에르덴을 무난히 차기 가주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마지막 질문이다. 왜 너는 직접 경쟁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냐?”
에다드의 질문에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은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우르엘라의 기둥서방짓이나 하며 살면 되는데 뭐하러 형제들의 목을 베겠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