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나비는 두 번 날개짓 한다 (3)
* * *
좆됐다.
좆됐다는 단어 이상으로 지금 상황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개 좆됐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시점에 황녀가 남아있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내가 ‘아카조교사’를 플레이하던 시절에는 황녀가 단 한 번도 방학 중에 아카데미에 남아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황녀가 접촉해온 것부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어!’
정사대로라면 황녀는 4장의 후반쯤이나 되어서야 숨겨왔던 본성과 계획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이전까지는 황녀가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온 적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우연히라도 인기척이 없는 곳에서 마주치면 순식간에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당연히 나로서는 4장 이전까지는 다른 할 일도 많은데 황녀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단 말이다.
...혹시 몰라 말해두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달려가는 건 황녀의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다.
황녀 혼자서 군대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내가 미쳤다고 걱정하겠는가.
물론 황녀가 홀로 군대와 전쟁을 하는 4장 시점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아있는 만큼 아직 성장이 덜 되어있겠지만 그 본질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아마, 히카트가 수십 명쯤 있다고 할지라도 황녀의 상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히카트는 반지의 방어력 때문에 죽이기가 어려운 것이지 전투력 자체로 보면 2학년 수석쯤만 되어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니 말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가 걱정하는 것은 하나였다.
‘...황녀의 폭주.’
솔직히 황녀가 히카트를 만났을 때 어떤 화학 반응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황녀가 내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처음이고 방학 중에 아카데미에 남아있는 것도 처음이니까.
정말 운이 좋다면 황녀가 힘을 숨기는 걸 택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넘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바람에 휘날려 눈을 찔러오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혀를 찼다.
이런 상황에서 황녀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너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그 리아나 루멘하르크가 이런 기회를 그냥 넘어갈 리 없다.
분명 무슨 짓이든 저지를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선택지는 두 가지...’
차악은 황녀가 히카트에게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밝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녀가 진행 중인 계획들을 모조리 포기해야 하기에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지만, 황녀는 예측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까지 계획해오던 모든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는 존재란 말이다.
‘...그래도 차라리 이게 낫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진짜 최악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자신이 인질이 되었다는 상황에 지루함을 느낀 황녀가 그냥 히카트를 죽여버리는 것이다.
히카트를 죽이는데 무슨 큰일이냐 싶겠지만, 아직 힘을 감추고 있는 황녀의 특성상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모든 학생을 죽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과거의 경험을 비추어 봤을 때 몰살 루트로 들어갈 가능성이 훨씬 컸다.
앞서 말했다시피 황녀는 재앙이다.
‘아카조교사’를 플레이하다 보면 황녀는 별다른 이유 없이 ‘유진 칼리오페’를 죽이고 그녀에게 죽으면 세이브 데이터가 날아간다.
그걸 몇 번쯤 당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황녀에게 죽은 다음 회차에 황녀를 고발한 적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많은 학생이 보고 있을 때 황녀가 어떤 인간이고, 어떤 악행을 저질렀고, 앞으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까지 발뺌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고발했단 말이다.
고발에 성공한 시점에서 나는 4장의 보스를 제쳤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것을 담담히 듣던 황녀는 내게 웃으며 박수를 보내고서는 나를 제외한 모든 목격자를 일시에 죽여버렸다.
...수많은 학생이 동시에 먼지가 되어 흩날리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먼지 속에서 황녀가 꺼낸 말이 가관이었다.
‘...이제 여기서 당신이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겠네요?’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라는 미친 문장을 현실로 옮기는 게 바로 리아나 루멘하르크라는 말이다.
‘...절대 안 된다!’
황녀가 폭주하게 되면 이 세계는 내가 알고 있는 ‘아카조교사’의 스토리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물론 지금도 비비안을 꼼수로 공략하고, 트리스탄을 살리는 등, 세세한 부분에서는 정사와 달라졌지만, 중간시험에서는 마물이 나타나고, 방학 첫날에는 히카트가 쳐들어오는 것처럼 메인 스토리 자체가 뒤틀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황녀가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4장 이후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성녀는 공략해야 황녀와 맞서 싸울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 전까지 황녀와 맞붙는 건 자살 행위와 다름없다.
내가 하얀 숨결을 열심히 몰아쉬고 있자 저 멀리 기숙사 옥상에서 리아나 루멘하르크의 것이 확실한 아름다운 금발이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황녀의 위치를 알아낸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황녀 혼자가 아니라 히카트와 다른 학생들까지 같이 있다는 것이다.
인질로서의 가치는 황녀 혼자로도 충분할 텐데 히카트 저 욕심 많은 새끼가 다른 학생들까지 데리고 온 모양이다.
“...쳐!”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옥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저 상황에서 과연 앞으로 황녀의 참을성이 얼마나 이어질까.
잘은 몰라도 분명 길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황녀의 성격상 지금 이 시점까지 폭주하지 않고 견딘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해줘야 했다.
‘...계단으로 걸어가면 늦는다.’
정문으로 돌아가서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 옥상까지 도착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다짐한 허공에 염동력으로 발판을 띄우고는 그것을 밟고 뛰었다.
─빠직
고작 첫 발판을 밟았을 뿐인데 불안한 소리를 내며 몸이 흔들린다.
두 번째, 세 번째 발판이 만들어진다.
아직 연습에서조차 이렇게까지 연속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한 적 없는 기술이라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
“...설마 황녀가 남아있을 줄이야! 마지막에 악운이 따라주는군!”
옥상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히카트가 소리쳤다.
예상치 못한 복병의 등장으로 모든 부하를 잃은 히카트였지만 황녀를 손에 넣음으로써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원래 같아서는 적당히 학생들을 인질로 잡아 탈출할 생각이었지만 황녀를 손에 넣은 지금은 그 이상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전부 저쪽으로 이동해라!”
히카트가 황녀에게 칼을 겨누고 턱짓을 하자 여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쪽 구석으로 모인다.
이것이 바로 히카트가 생각하던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루시아나, 보라 머리의 미친년과 다르게 실전 경험이 부족한 이들은 조금만 겁을 줘도 맞서 싸울 생각은커녕 벌벌 떨기 바빠야 정상이었다.
“황녀. 네가 얌전히 있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다.”
“...아뇨, 나서지 않아도 괜찮아요.”
“....?”
갑자기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황녀를 보자 처음에는 공포로 정신이 나갔나 싶었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얌전히 기다리세요.”
“입 닥쳐! 지금 누구와 연락을 하는거냐..!”
히카트가 이를 으득 갈았다.
아무리 황녀라 해도 얌전히 있으라는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감히 황녀에게 칼을 대는 것은 히카트에게도 부담이었기에 칼등으로 내려치기로 했다.
“....”
그러나 황녀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히카트는 이해할 수 감각을 느꼈다.
황녀의 눈에서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쪽의 일을 하면서 감정이 거세된 암살자들도 많이 만나봤지만, 그들과도 달랐다.
아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잘못된 표현이었다.
그보다는 너무 많은 것이 그 눈에 담겨 도저히 인간이라는 작은 그릇으로는 전부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이게 뭐야?’
마치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무언가를 보는 듯한 불안감에 히카트가 검의 손잡이를 굳게 고쳐잡았다.
“...으음... 인질극이라는거 생각보다 재미없네요.”
그때, 황녀가 내뱉은 한 마디가 신호탄이 되었다.
“내가 닥치라고 했지!”
죽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칼자국 정도는 내주겠다는 각오로 히카트가 검을 치켜든 순간.
“...멈춰라.”
등 뒤에서 들릴 리가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검을 멈추고 말았다.
히카트, 리아나, 그리고 다른 모든 학생까지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된 가운데 허공에서 튀어나 온 남자는 쿵 소리가 나도록 옥상에 내려앉았다.
남자는 단정한 얼굴에 맞지 않게 산발이 된 검은 머리카락, 거칠게 몰아 쉬는 숨, 핏발 잔뜩 솟은 짐승과도 같은 눈을 가졌다.
“...죽고 싶지 않으면 물러나라.”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유진 칼리오페가 싸늘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경고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