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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52화 (52/354)

〈 52화 〉 메스가키 + 조교 = M's가키 (1)

* * *

“...루시아...”

말을 더듬지 않은 건 순전히 ‘침대 위의 왕자’ 덕분이었다.

“네, 주인님?”

식칼을 루시아가 내게 다가오자 왜 공포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살인마가 다가오는데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도망치지 않은 게 아니라 도망치지 못한 것이다.

...뚝 ...뚝

칼날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는 게 아직 일을 저지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헤헤...좀 더 늦으실 거라... 생각했는데...들켜버렸네요.”

언제나처럼 아름답게 웃는 루시아.

하지만 지금은 그 미소조차 두렵게 느껴졌다.

나는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면 루시아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루시아, 비비안은 어디 있지.”

“...비비안이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루시아가 시선을 슬쩍 돌린다.

“....비비안은 저기 있잖아요...?”

루시아가 바라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꿈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책상에서 놓여 있었다.

“....”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소름이 끼치고 말고 하는 수준이 아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공포가 솟아났다.

‘...뭐야.’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갑자기 세계의 장르가 바뀌었다.

‘...왜?’

수백 번이 넘게 ‘아카조교사’를 플레이하면서 분명 루시아가 폭주한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스토킹, 납치, 감금, 정도였지 지금처럼 미친 짓을 저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다.

‘도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루시아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주인님...?”

“...”

루시아가 내게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설마 나한테까지 해코지를 하지는 않겠지만 본능적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

그러자 루시아가 깜짝 놀라며 식칼을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식칼을 계속 들고 있었네요... 주인님이 오시기 전에 손질을 다 끝내 놓으려 했는데.”

“...루...시아..”

내 목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고기는 뭐지...”

“...아.”

내 질문에 루시아가 조금 입을 벌리다가 다물었다.

“...바로 알아보시네요. 깜짝 요리를 해드리려고 했는데...”

그리고는 부끄럽다는 듯 살며시 웃었다.

“...질문에 대답해라...”

“이건...”

루시아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한 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새끼 드레이크 고기에요.”

“....?”

하지만 루시아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드레이크..고기?”

“네, 주인님이 오늘 마력 반발 때문에 고생하셨다고 해서, 암시장에 가서 진정효과가 있는 새끼 드레이크 고기를 사 왔어요.”

도대체 언제 암시장을 다녀 왔다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손질은 거의 다 됐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제 자른 고기를 볶아서 스튜에 넣기만 하면 돼요.”

루시아가 고기를 들어 올리자 확실히 생김새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게 느껴졌다.

...다행이었다.

갑자기 드레이크 고기가 튀어나온 건 완전히 예상외였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표정을 굳히고 있자 루시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 주인님... 제가 병문안 가지 않아서 화나신 건 아니죠...? 비비안에게 말을 듣고 잠깐 양호실에 들르기는 했는데 주인님의 조교에 방해될까 봐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비비안이 말했다고?”

“네, 그런데 너무 놀란 거 같아서 제가 잠깐 기절... 흠흠, 실례했습니다. 재워놨어요... ”

루시아가 한쪽 볼을 부풀리면서 침대를 바라본다.

내가 침대를 확인하자 그때야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보라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다가가 이불을 벗겨보자 그 안에는 눈이 퉁퉁 부은 채 잠들어있는 비비안이 보였다.

“...정말 그렇게 죽을 듯이 울면서 사과하면 화를 내려고 해도 화를 못 내잖아요.”

“....”

아무래도 아까 루시아가 보던 게 책상이 아니라 침대였던 모양이다.

‘..하긴... 피 묻은 식칼이랑 고기 비주얼이 너무 충격적이라 그랬지.’

잘 생각해보니 루시아의 시선의 방향도 책상보다는 침대에 가까웠다.

“아, 그런데 주인님 속은 괜찮으신가요? 죽으로 하는 게 좋았을까요?”

“...아니, 괜찮다. 아무런 문제 없다.”

“헤헤, 다행이다. 그런데 주인님 왜 이렇게 땀을 흘리세요... 아직도 어디가 안 좋으세요?”

“조금 더워서 그렇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 넷.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완성되니까요!”

다시 요리에 들어가는 루시아를 보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쫄았다.

세계의 장르가 RPG에서 사이코 호러로 바뀐 줄 알고 진심으로 쫄았다.

그때 루시아가 식칼을 ‘탁’ 내리치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린다.

“..그러보니 주인님.”

“...그래.”

“저, 암시장에서 트리스탄 교수를 봤어요.”

...또 트리스탄이다.

요즘 이상하게 트리스탄 교수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들렸다.

‘트리스탄은 2장 메인이벤트에서 학생들을 구하는 대신 죽고 그대로 끝일 텐데...’

로레오스가 조연과 주연에 걸쳐있다면 트리스탄은 조연과 엑스트라 사이에 걸쳐있는 애매한 교수... 라는게 내 평가였다.

“저는 변장하고 간 상태라서 눈치채지는 못한 거 같은데 그래도 엄청 익숙하게 물건을 사가더라고요.”

“뭘 사간지는 확인했나?”

“...음, 개울 달팽이, 천년목 진액, 달빛새의 깃털... 그거 말고도....”

꽤 길게 이어지는 루시아의 대답을 들은 내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재료를 보아하니 해독제계열인 거 같은데? 그것도 상당히 고급의...’

이 세계에선 '회복'과 '치유'의 힘은 소수의 고유능력자들만 가지고 있는 탓에 언제나 부족하다.

그 중에도 저런 상위 등급의 해독제가 필요할 만큼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도 카르네아의 교수 정도면 돈은 충분할 텐데?’

제국 제일의 시설을 가진 카르네아답게 당연히 교수진의 월급도 최상급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어렵게 해독제를 제조할 필요 없이 강력한 능력을 지닌 회복 능력자를 고용하면 되는 일이었다.

“...트리스탄 교수에 관한 정보는 더 있나?”

“음... 딱히 그거 말고는 없는데요... 굳이 말하자면 교직원 숙소에 안 사는 것 정도요?”

“....”

저것 또한 특이한 점이라면 특이한 점이지만 단체 생활을 싫어해 보이는 트리스탄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데...'

내가 이 찜찜함의 원인이 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자, 주인님! 이제 완성이에요!”

루시아가 완성된 요리를 식탁 위에 하나씩 올렸다.

장어구이에 굴과 전복 찜, 마늘과 , 드레이크 고기....

...드레이크 고기를 뺀다면 무언가 조합이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다.

'이거 완전 정력제..'

내가 드레이크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자 눈을 반짝이며 묻는 루시아.

"맛있으세요?"

"맛있네."

“헤헤, 다행이네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루시아의 요리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카르네아의 전속 요리사들이 만드는 것과 비슷할 정도.

‘이건 또 언제 배웠데...’

1회차의 루시아는 밖에서는 완벽해도 집안에서는 허당인 캐릭터라 늦잠도 자고, 요리도 못했는데 이런 훌륭한 요리를 만들 줄이야...

“...그럼...많이 드세요...전부 남성에게 좋으니까요...”

...루시아의 끈적한 눈빛을 보아하니 오늘 밤도 길 것 같았다.

***

산키샌 마을에 있는 크림파이 여관.

그곳에서 반짝거리는 머리와 얼굴에 있는 긴 흉터가 인상적인 여관 겸 주점의 주인...

'긱마인드'가 맥주잔을 닦고 있었다.

띠링­

“아직 영업시간이 아닌데...”

문이 열렸지만 긱마인드는 고개도 들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리고 트리스탄 역시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긱마인드의 앞에 앉았다.

“...의뢰 있나?”

“...자넨 항상 말을 듣지 않는군. 미안하지만, 저기 붙어 있는 게 다야. 요즘 황실에서 직접 토벌대를 움직여서 모험자들까지 하청이 내려오는 경우가 많이 줄어서 말이지.”

잠시 벽보를 살펴보던 트리스탄은 다시 바 앞에 앉으며 말했다.

“...긱마인드, 이러지 말게.”

“...하아...트리스탄. 내가 자네 사정은 알지만 이제 슬슬 포기할 건 포기하고 자네의 삶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

“....이게 내 삶이네.”

“이게 삶이라고? 자네가 카르네아의 교수직을 맡을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인 건 아네. 그래도 지금처럼 살다가는 죽는 것도 순식간이네. 도대체 언제까지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서 인생을 낭비...”

“....긱마인드”

공기가 가라앉는다.

단순히 기분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트리스탄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공기에 스며들면서 물리적으로 공기가 무거워졌다.

“다시는...”

트리스탄의 갈라진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다시는 내 앞에서 불가능이란 말을 꺼내지 말게.”

평범한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릴 정도로 날카로운 기운이었지만, 긱마인드도 난폭한 모험자들을 상대로 주점을 하는 몸이다.

이 정도는 버겁지만 어떻게든 흘려 넘길 수 있었다.

긱마인드가 양손을 들고 항복 자세를 하며 사과를 건넸다.

"...알았네. 알았어 내가 선을 넘었네. 잘못했으니 이제 그만하게."

그러자 트리스탄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마력이 순식간에 갈무리 대고 무거웠던 공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해졌다.

“...미안하네. 요즘 예민해져서.”

“두 번만 예민했다가는 사람을 잡겠군.”

“...미안하네.”

트리스탄이 다시 한번 사과하자, 잠시 고민하던 긱마인드는 한 장의 의뢰서를 꺼냈다.

“...하아, 오우거 무리 토벌일세. 최소한 4명 이상 모아서 가야 하고 권장은 8명 이상이야. 적어도 그중 한 명은 회복계열의 고유능력자로...”

“...고맙네.”

긱마인드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금액을 확인한 트리스탄이 의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혼자 가려는 거 아니겠지?”

“나눠 가지기에는 돈이 부족해... 안 그래도 어제 무리해서 산 게 많아서 말이야.”

“이봐, 아무리 자네라도 이번 의뢰는 혼자 가면 위험해..! 이런 미친! 트리스탄! 내 말을 좀 들으라니까..! 이번 오우거 무리는 평소랑 달라!”

“...고맙네.”

쿵­

트리스탄의 짧은 감사 인사와 함께 크림파이의 문이 닫혔다.

“하아...”

잠시 문을 바라보던 긱마인드가 의자에 앉아서 담뱃불을 붙였다.

입안이 쓰다.

모험자가 의뢰를 하다가 죽는 건 이야깃거리 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흔하다.

경고해준 것만으로도 긱마인드는 도리를 충분 할 정도로 지켰지만, 그런데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신도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트리스탄에게 공감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빌어먹을. 뒤져서 오기만 해봐.”

욕설을 한 번 내뱉으며 담배를 비벼 끈 긱마인드가 다시 맥주잔을 닦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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