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그녀가 무너지기까지 앞으로 000 (6)
* * *
‘크, 큰일 날 뻔했다.’
비비안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양호실에서 후다닥 뛰어나왔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사실 들킬만한 상황이었지만 보건 교사님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덕에 살았다.
보건 교사님이 왜 손바닥을 바라보며 ‘...이게 모성애?’라고 중얼거린 건 다시 생각해봐도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들키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다행이야...’
복도를 한참 달리던 비비안이 벽에 기대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이성을 되찾은 비비안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나... 미쳤나 봐.’
최근에 아무리 절정 할 수 없었다고는 해도 교실에서 자위하려고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혐오감이 밀려왔지만, 동시에 그런 혐오감에도 삼켜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따듯했어.’
부축해주던 유진의 손길을 떠올리자 비비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진다.
정말 오랜만에 지어보는 듯한 미소였다.
‘유진...’
유진을 떠올리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다리를 꼼지락 거리며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는 순간 싸늘한 눈빛들이 몸에 박혔다.
“....”
베아트리스 가문에서 느꼈던 익숙한 분위기였다.
비비안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지금 비비안을 노려보는 아이들은 전부 유진과 함께 웃고 떠들던 애들이었다.
비비안은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지나가려고 했지만, 무리에 있는 한 여학생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염치도 없지.”
만일 베아트리스 가문의 격이 높았더라면 감히 이런 말을 꺼내지 못했겠지만, 지금 말을 한 여학생의 가문은 베아트리스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격이 높은 가문이었다.
사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카르네아 아카데미의 귀족 대부분이 베아트리스의 가문보다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베아트리스 가문도 한때는 제법 잘 나갔다고는 하지만, 이미 수 백년 전 이야기.
지금은 이름만 간신히 가지고 있는 몰락 가문일 뿐이다.
“유진이 누구 때문에 다쳤는데 부축까지 받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염치가 없는 건지.”
“그걸 알면 저러고 있겠어?”
“한심해서 하는 말이지. 자기 언니는 그래도 능력이라도 있지 쟨 뭐니? 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
비비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설령 사실이 아니었더라 할지라도 비비안은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길 기도할 뿐 반항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비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퍽
갑자기 등에서 큰 고통이 느껴짐과 동시에 비비안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무서웠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구석에 쪼그려 벌벌 떨고 있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혼자서 넘어지기까지 하네. 비비안, 누가 보면 우리가 널 괴롭히는 줄 알겠어? 뭐해? 어서 안 일어나고.”
“죄...송..합..”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무서운 짓을 당한다.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순간, 그녀는 비비안에게 다리를 걸었고 비비안은 다시 한번 화장실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 이건 그냥 미안 꼴 보기 싫어서. 이해하지?”
“...잘..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비비안은 다시 사과했다.
무엇을 잘못한 걸까.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 아닐까.
비비안이 또 다시 자기 혐오에 휩쓸리려 할 때.
“그만해! 이건 너무 하잖아!"
여학생 무리 중 가장 가문의 격이 높은 유리아가 소리쳤다.
앞으로 나온 유리아가 비비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잡아!”
“...”
정말 이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일까...
망설였지만 이런 도움조차 거절할 수 없는 게 비비안이었다.
“고..마워...”
울먹이는 비비안이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조심스레 손을 뻗자.
「물」
유리아가 마법을 영창을 하고 비비안의 머리 위에 물이 쏟아졌다.
뚝, 뚝, 뚝
비비안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온몸이 흠뻑 젖은 비비안의 모습을 보며 다른 애들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하하하하하! 저게 뭐야!”
“잡으라고 한다고 진짜 잡으려고 하네.”
“진짜 양심이 없는 거지.”
다른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와중에도 유리아는 평온한 얼굴 그대로 속삭였다.
“멍청한 년. 진심으로 내가 그 더러운 손을 잡아줄 거라 생각했어?”
“...왜. 나한테...”
“왜냐고?”
비비안의 질문에 유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짜증 나니까. 쓸모도 없는 게 유진한테 꼬리나 치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너도 생각을 해봐. 누가 너같이 음침한 년을 도와주겠니? 유진이 착해서 티를 못내 그렇지 속으로는 널 엄청 귀찮게 생각하고 있을걸?”
...처음으로 공포가 아닌 분노가 느껴졌다.
유리아에게 유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비비안도 유진이 자신을 귀찮게 여길 거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주제 파악 잘 하고 살아. 오늘처럼 꼬리 치지 말고. 죽기 싫으면.”
그 말을 끝으로 아무렇지 않게 유리아가 웃으며 화장실을 나갔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비비안이 중얼거렸다.
“죄...”
또, 또다.
“죄송합니다..”
언제나 이랬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나는 언제나 이랬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다.
홀로 남겨진 화장실 바닥에서 비비안은 그저 사과를 반복했다.
***
마침내 오늘이 오고 말았다.
5반의 대련 시험날이 말이다.
현재 5반의 학생 수는 29명.
2명씩 짝을 짓기에는 1명이 부족한 상황이다.
‘아카조교사’에서는 이런 경우에는 담당 교수가 빈자리를 채워 대련했다.
...그리고 우리 반의 담당교사는 로레오스다.
29명의 학생 중에 로레오스와 팀을 맺는 사람이 나만 아니면 되는 상황이지만….
“와라.”
결투장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로레오스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씨발...’
분명 처음 능력치와 비교하자면 조교사와 더불어 여려 특성이 더해진 덕에 깜짝 놀랄 정도로 늘어났다.
아마 염동력까지 사용한다면 5반이 아니라 4반에서도 적수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염동력을 제외하고 마법만 사용한다고 해도 연사력이나, 마력의 효율성까지 고려하면 5반에서는 상위권은 들어갈 거다.
하지만...
「바람 ─ 칼날」
파앙!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쁘다.
“흠...”
로레오스가 내지른 주먹을 회수하면서 평가하듯 침음성을 내었다.
‘저게 말이 되나...’
기사처럼 육체를 단련한 것도 아니고 전장에서 굴렀다고는 하지만 로레오스는 결국 순수한 마법사다.
마법사가 방어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그냥 주먹질로 한 번으로 마법을 소멸시키는게 정상인가?
‘...이게 어떻게 부상으로 은퇴한 사람이냐고.’
사실 게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로레오스는 부상으로 은퇴해 아카데미 교수직을 맡고 있기에 그의 '전력'은 게임 내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전장에 가도 들리는 전설에는 반드시 전성기 로레오스의 이야기가 끼워져 있었다.
‘후우.. 그래도 0점은 안된다.’
점수를 어느 정도 따 놓아야지 2학년 반배정 시험때 한 번에 1반으로 뛰어 오를 수 있다.
2학년 때는 1반에서만 진행 할 수 있는 이벤트가 있기에 반드시 합격해야한다.
「바람 ─ 칼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고 강하게 마법을 사용 한다.
파앙!
당연하지만 이번에도 먹히지 않았다.
"...위력이 늘었군."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작 하급 마법이 2%정도 강해진 것인데 로레오스에게는 그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내가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자 로레오스가 뭔갈 오해한듯 말을 이었다.
“그래, 시선을 신경 쓰다보면 본래 실력이 제대로 안 나오는 법이지.”
「솟아라 ─ 대지 ─ 장벽」
쿠쿠쿠쿵!
갑자기 내 키의 두배는 넘을 높이의 장벽이 결투장을 둘러쌌다.
덕분에 내부에는 로레오스와 나, 둘만이 남았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실전이라 생각해라.”
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눈앞까지 다가온 로레오스가 주먹을 휘둘렀다.
급하게 머리를 숙이자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파공음이 들렸다.
‘이게 무슨 마법사야!’
「바람 – 칼날」「바람 – 칼날」「바람 – 칼날」
도망치며 마법을 난사했다.
루시아가 보여주었던 고속 영창이나 다중 영창과는 다르다.
마력 배분이나 구조 따위는 상관없이 영창만 한다면 머릿속의 이미지대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좋구나!”
고개를 까닥거리는 것으로 바람 칼날을 피한 로레오스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더! 더 해보아라!”
몇 번이나 바람 칼날을 날려보지만 한 번도 로레오스에게 닿지 않는다.
슬슬 내가 마력 부족으로 헉헉거리고 있자 로레오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대련으로는 부족한가.”
갑자기 로레오스가 한쪽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로레오스의 손 위로 소름 끼칠 정도의 마력이 응축된다.
“영창이 완성되기 전에 날 죽일 생각으로 막아봐라.”
「내리쳐라」
죽는다.
「폭풍」
저걸 맞으면 방어고 뭐고 죽는다.
「늑대의」
내가 어떻게든 영창을 끊기 위해서 마법을 날려보지만, 로레오스에 도달하기도 전에 마력에 휩쓸려 사라진다.
「이빨」
결국, 로레오스가 영창을 마쳤다.
‘아...’
콰콰카오쾅!
사방에 폭풍창이 내리꽂히고 결투장을 둘러싸고 있던 장벽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흐음... 역시 대련 정도로는...결국 그 방법을...”
이 와중에 놀랍게도 컨트롤은 완벽했는지 나한테는 티끌의 상처도 없었지만, 벽이 찢겨나는 굉음 때문에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그만해도 되겠습니까?”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고 청력이 좀 회복되자 내가 로레오스에게 물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네게 맞는 방법을 찾아올 테니.”
물어본 질문에 대답은 안 하고 로레오스는 자신만 믿으라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
“자, 이걸로 시험을 끝이다. 그럼, 미리 말했던대로 비비안 베아트리스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해산해도 좋다.”
뭔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험이 끝났다.
로레오스의 허가가 떨어지자 다들 떠들어대며 떠나갔다.
“후우...”
내가 대련장에 주저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로레오스가 날 죽이지 않을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상급 마법을 보았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렇게 앉아서 쉬고 있자,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유진 학생...”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양호교사였다.
“....?”
그녀가 왜 나한테 라는 의문이 들려는 순간 다시 양호교사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그...유진 학생. 배는 이제 괜찮아요? 안 괜찮으면.. 엄마..아니, 선생님이 또 배 만져줄까요...?”
....씨발.
어째 정상인이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