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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32화 (32/354)

〈 32화 〉 그녀가 무너지기까지 앞으로 000 (5)

* * *

「바람 – 칼날」 「대지 – 창」

복도 창문 너머로 영창소리가 들렸다.

무효처리된 중간고사를 대체하는 모의 전투 시험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간고사에서 큰 사건이 있던 만큼 이번 시험은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여 한 반씩 진행되고 있었고,지금은 1반의 시험 기간이었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했냐면 만일에 사태에 학생들이 다치더라도 즉시 치료할 수 있게 양호교사도 결투장에 불려가서다.

즉, 지금 양호실은 텅 비었다는 뜻이다.

“아무도 없네.”

“...그러네.”

부재중이라는 팻말에 비비안은 약간 당황한 것 같았지만 내겐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조교사’의 세계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소한 양호실, 옥상, 교사용 화장실, 구 교사 등 학교 내에서 ‘조교’를 할 수 있는 장소와 그 사용가능 시간 정도는 완벽하게 파악해놓아야 한다.

“일단 들어가서 쉬고 있자.”

“그, 그래도 아무도 없는데...”

“괜찮아. 아파서 쉬고 있었다고 하면 되니까.”

걸려있는 팻말을 무시하고 양호실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약초가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장 구석에 있는 침대에 비비안을 눕히자,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유진...”

“응?”

“...미안해요.”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사죄하는 비비안.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뭘 이런 거로. 사과해.”

“...이것뿐만이 아니라... ...그냥 모든 게...미안해요.”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비비안의 사죄가 지금 이 상황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고작 양호실에 데리고 온 것으로 이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를 딸감으로 상상하는 것과 중간시험에서 다치게 만든 것에 대한 사과겠지.

“에이,이 정도는 괜찮다니까. 신경쓰지마.”

하지만 이번에도 모르는 척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만, 말투에 약간의 미묘함을 더 해서.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말이지만, 지금 비비안의 상태라면 분명 과대 해석을 할 것이다.

“....”

예상대로다.

봐라, 저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을.

이 정도는 괜찮다는 말이 비비안에게는 다른 것은 안 괜찮다는 말처럼 들리나 보다.

“그럼 갈 테니 편히 쉬어. 그리고 이 펜 정말 잘 써지더라 고마워.”

나는 그런 비비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펜을 딸깍거려 진동의 강도를 ‘중하’로 설정한다.

“읏...네...”

진동이 오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는 비비안을 확인하고는 양호실 문을 닫는다.

­저벅, ­저벅, ­저벅.

그리고 일부로 발소리를 크게 내며 양호실을 떠났다.

“...이 정도면 됐겠지….”

혼자 있을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딸감까지 제공했다.

이 정도면 비비안도 만족스러운 자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아까 교실에서 자위하려고 했을 때는 식겁했다.

“....”

일단 좀 진정되고, 다시 생각해보니 현타가 밀려오려고 한다.

교실에서 자위하는 걸 막기 위해 양호실에서 자위하게 하다니….

과연 이게 정상적인 세계란 말인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펜을 꺼내 귓가에 대었다.

[읏..하...으읏..아...유..진님..]

비비안의 신음소리가 펜에서 흘러나왔다.

그래도 이걸 들으니 기분이 좀 나아진다.

비비안의 자위를 조금 듣고 있던 나는 펜을 다시 집어넣었다.

제법 흥분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이것보다 더 중요 한 것이 있었다.

“여기지.”

누군가 양호실을 향해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1반의 전투 시험도 관찰할 수 있는 복도.

나는 그곳 창가에 몸을 기대고 결투장을 내려보았다.

때마침, 루시아와 황녀가 동시에 올라왔다.

거리가 멀어서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제국의 태양과 달이 동시에 올라와서 그런지 학생들이 웅성거린다.

이 이벤트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흔치 않은 황녀의 패배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대결에서 황녀는 패배한다.

그것도 아주 간단히.

루시아가 쏘아낸 중급 마법을 방어하지만,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장외패배.

한 3초 정도 걸리는 대결이던가.

당연히 황녀가 일부러 져준 거지만, 이 대결 때문에 플레이어는 황녀가 힘을 숨기고 있는 걸 모르는 상태라 나중에 황녀의 본성을 눈치채도 그래도 이 정도면 할 만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 생각하니 빡치네.’

황녀의 끔살 이벤트를 떠올리자 마음속에 분노가 치솟는다.

‘...루시아 힘내라.’

마음속으로 루시아를 응원하며 둘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

리아나에게 있어 카르네아 아카데미는 심심풀이에 불과했다.

한 번 읽는 것으로 대부분 책을 암기할 정도의 두뇌, 압도적인 마력 친화력, 황가의 고유 마법까지.

리아나에게 있어 승리란 당연히 한 것이고, 그런 승리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기에 양보한 것에 불과했다.

저벅­

반대편 계단을 통해 루시아 우르엘라가 결투장 위로 올라왔다.

루시아는 리아나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몇 안 되는 인간이다.

마법에 대한 재능은 뛰어났고, 빛나는 외모는 리아나조차 감탄했을 정도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리아나는 루시아가 자신의 적수는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평범한 천재 정도로는 자신을 막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번 경기장에 올라오는 순간, 루시아에게서 무언가 다른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잘 숨기고는 있었지만, 분명 루시아의 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살의였다.

‘흐음, 왜일까요?’

요즘 들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꾸 생각난다.

...유진도 그렇고, 지금 루시아도 그렇고.

모든 것이 예상대로만 흘러가던 리아나의 세계에서 이건 찾기 어려운 즐거움이었다.

“잘 부탁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시아와 리아나가 결투장 중앙에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거리를 벌린다.

...그리고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동시에 루시아가 중급 마법을 영창했다.

「꿰뚫어라 – 바람 – 창」

명백히 학생 수준을 넘어선 영창 속도와 정확도.

너무나도 날카로운 공격에 교사가 당황하는 것을 보았지만 리아나에게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속도였다.

‘흐음...’

계획했던 대로 그저 방어하면서 뒤로 장외까지 물러나 탈락하면 이 경기는 끝이 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예상치 못한 관객도 생겼고요...’

리아나가 저 멀리 창가에서 보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웃었다.

「솟아라 – 불꽃 – 장벽」

바람의 창이 닿기 전, 리아나 역시 중급 마법을 영창하여 방어한다.

화르륵­!

불꽃의 열기가 결투장의 가득 채웠다.

“잠..!”

1반을 담당하는 에이미 교수가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루시아는 다음 마법을 영창했다.

「꿰뚫어라 – 바람 – 창」「꿰뚫어라 – 바람 – 창」

동시에 날아오는 두 개의 마법.

‘이상하네요?’

그 모습을 보며 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시아의 재능은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말이죠.’

처음의 고속영창은 그렇다 쳐도 지금 사용한 이중영창은 명백히 루시아에게 주어진 재능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아니, 재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황가의 고유 마법처럼 압도적인 '격'이 있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루시아만의 특별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루시아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패를 가장 깔끔하게 사용해 적을 몰아넣고 있었다.

마치 수십 년의 전투 경험이 있는 노련한 마법사처럼.

「내리쳐라 – 물 – 망치」 「가둬라 – 불꽃 – 구」

쾅­! 쾅­! 쾅­!

점차 마법의 위력이 커져나간다.

­이거.. 위험한거 아니야?

­루시아는 수석이니 그렇다해도 황녀님도 여기까지 따라오신다고?

처음에는 그저 감탄하며 바라보던 학생들도 이제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는지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찢어발겨라 – 폭풍 – 늑대...

마침내 루시아가 고급 마법을 영창하려는 순간 더는 참다못한 에이미 교수가 뛰어나와 제지했다.

[멈춰욧!]

에이미의 언령에 루시아의 영창이 흐트러지며 마법이 사라졌다.

“리아나, 루시아. 둘 다 뭐 하는 짓인가요! 이건 대련 훈련입니다! 시작부터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했는데 이런 마법까지 사용하면 어쩌자는 건가요? 죽일 셈인가요?”

에이미 교수가 양팔을 허리에 대고 쏘아 붙인다.

그래 봤자 워낙 작은 체구라 어린아이가 화를 내는 것처럼 귀여울 뿐이었지만, 리아나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번 시험은 둘 다 감점이에욧

.! 워낙 대단해서 둘 다 A+에서 A로 깎인 정도지만…. 어쨌든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욧...! 그럼 서로 사과해욧!”

리아나가 싱긋 웃고 있자 루시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리아나님 이성을 잃고 대결에서 사용할만한 마법이 아닌 것을 사용했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흥분했던 걸요. 역시 대단하시네요. 루시아.”

한 걸음 다가간 리아나가 루시아의 손을 붙잡으며 눈을 반짝였다.

“우리 꼭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

***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내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아니, 결과 자체는 똑같았다.

황녀의 패배.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마지막 순간 선을 밟았으니 황녀의 패배였다.

하지만 그 과정이 내가 알고 있던 것이랑은 너무나 달랐다.

본래라면 일격으로 끝났어야 할 전투는 고속영창부터 시작해 이중영창까지 온갖 고급 기술들이 사용되었다.

‘...분명 1회차처럼 행동하라고 했는데.’

루시아의 황녀에 대한 적의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1회차의 기억이 있다면 누구라도 황녀의 존재는 껄끄러울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내 명령을 무시하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까지 막무가내로 공격하려고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 이런!’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결투장의 정리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양호실의 담당교사가 곧 돌아온다는 의미였다.

[흐읏...유...진..]

펜을 귀에 가져다 대자 비비안은 아직도 자위 중이었다.

‘정신 좀 차려라!’

나는 한순간에 복도를 달려가서 양호실의 문을 발로 찼다.

콰앙­!

[...꺄앗!]

큰 소리가 울려 퍼지자 비비안도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드.. 들키면...빨리 정리해야..]

서둘러 자위를 끝내고 양호실을 정리하는 비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

그렇게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저벅­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

복도 끝에 있는 이 계단을 오르는 건 보건실을 이용 할 때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타날 사람은 아마도...

“어머, 유진 학생?”

역시나 보건교사였다.

중간고사 때 실려 와서 그런지 보건교사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양호실 왔나봐요? 미안해요. 시험 보는데 불려가서.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아, 그게 배가 좀 아파서...”

“그래요? 양호실 안으로 들어와요. 진료해줄게요.”

나를 스쳐 지나가며 말하는 보건교사.

‘어쩌지?’

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비안은 자위 흔적을 이제 막 정리하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면 무조건 들킨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야 했다.

‘어떻게?’

생각해라. 생각해.

이 상황을 뛰어넘을 방법을.

그때 문뜩 한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아아악!”

“어머! 왜 그래요! 괜찮아요?”

양호교사가 당황하며 다가오자 나는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배가...좀 아파서..”

“쓰러질 정도면 좀 아픈게 아니잖아요!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아닙니다... 그냥... 좀 배를 만져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러니까.. 배를...”

“...배를 만져달라고요? 제가요? 여기서요?”

“네....”

보건교사가 나를 미친놈 보는 듯이 바라보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비비안을 들키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이렇게 만지면 될까요?”

“...네.”

잠시 망설이다 결국 얼굴을 붉히며 배를 만져주는 보건교사.

...복도에서 드러누워 배를 만져지고 있자니 자괴감에 자살 하고 싶다.

“흐음...그...유진 학생 일단 해주기는 하는데... 다음에는 제대로 진료를 받아요.”

보건교사의 상냥한 말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네...”

부탁한다. 비비안.

내가 자살하기 전에 빨리 정리를 끝내다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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