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그녀가 무너지기까지 앞으로 000 (1)
* * *
무려 일주일이나 무단결석을 하고 아카데미에 왔지만, 별다른 처벌은 없었다.
일단 그 날 이후 모든 1학년들에게는 사흘의 임시 휴교령이 내렸고.
거기에 로레오스 교수께서 유진은 ‘늑대’와 싸운 후유증 때문에 요양 중이라 아카데미에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아무런 소란도, 처벌도 없이 아카데미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반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효과는 있었다.
최소한 겉으로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과 비슷하게 돌아왔으니까.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엘로이즈가 서서히 잊혀가겠지만서도,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려진 꽃 한 송이만큼은 여전히 엘로이즈를 추모하고 있었다.
“....”
입안이 씁쓸했다.
하지만 고개를 한 번 숙이는 것으로 솟아오르는 죄책감을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반드시 이세계에서 해피엔딩을 보기로 맹세했다.
그러니 결코 그들을 잊지 않되, 붙잡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부분’이라는 말처럼 달라진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걸 꼽자면 나와 3명의 관계였다.
처음은 비비안이었다.
“....”
비비안은 일주일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한 나보다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푸석해진 자색 머리카락, 눈 밑에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심각하게 떨리는 눈동자까지.
어느하나 정상이 아니었다.
내가 아카데미에 나오지 않았던 일주일 동안, 비비안은 유일한 안식처를 잃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 이 사건을 제외하고도 원래부터 비비안은 나를 자위에 사용한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아카데미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늑대와 싸우다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죄책감마저 더해졌다.
결국 비비안이 감당 할 수 없는 죄책감이 그녀를 망가지게 한 것이다.
‘...나쁘지 않아.’
비비안에게는 안됐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순애조교 루트에 필요한 호감도는 이번 사건으로 거의 끝까지 쌓아 놓은 상황.
이제는 죄책감을 무기로 삼아 비비안을 서서히 고립시키면서 '편지'를 통해 세뇌 조교에 들어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관계가 달라진 두 번째 인물은….
“안녕!”
“...황녀 전하.”
리아나 루멘하르크였다.
“와! 오랜만이야! 유진. 그리고 리아나라고 불러달라니까!”
개인적으로는 어떻게서든 만남을 피하고 싶은 인물 제1순위였지만, 이렇게 복도 한복판에서 황녀가 말을 거는데 감히 무시하고 걸어갈 수는 없었다.
“...황녀전하. 아뢰옵기 송구스러우나, 그 말은 오랜만에 보았을 때 쓰는 인사입니다.”
“응! 그러니까 오랜만!”
“...전하 제 기억이 맞다면 분명, 두 시간 전에 뵈었습니다. 그전에는 네 시간 전에 뵈었군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제부터 거의 매 강의 시간이 끝날 때마다 뵙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으음…. 그랬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턱 끝에 손가락을 대고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아나.
빛나는 외모와 어울어진 순진한 표정. 누가 봐도 깜빡 속아갈 연기력이었지만...
“...."
나는 아니었다.
기억이 안 나기는 개뿔.
황녀의 기억력이라면 10년 전 나온 아침 식사의 밥알 개수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예, 분명 그러했습니다.”
“헤헿, 유진이 그렇다면 그런가 봐. 그래도 또 봐서 좋네! 유진도 그렇지?”
리아나가 더욱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한다.
코끝에서 부드러운 꽃향기가 섞인 숨결이 느껴졌다.
“...황녀 전하, 저 같은 것이랑 같이 있다 황녀 전하의 품위가 상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답했다.
스캔들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좋지 않다.
워낙 황녀가 모든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터라, 아직까지는 다른 학생을 위하여 부상을 입었던 나를 위로해준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다가 스캔들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다.
칼리오페 가문과 황녀와의 스캔들?
이건 한 번 터지면 돌이킬 수 없다.
결혼이든 뭐든 무조건 끝까지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계획이 박살난다.
베드엔딩 직행이란 뜻이다.
“저 같은 거? 흐음...칼리오페 가문이면 황가와 충분히 비슷할 정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 혹시 어머니 쪽을 말하는가?”
리아나가 웃으면서 갑자기 푹 찔러 들어왔다.
지금까지 계속 무표정, 무감정으로 대하고 있기에 어떻게 감정을 흔들어 틈을 만들려고 한 것 같지만 나한테는 솔직히 별 느낌이 없었다.
‘유진 칼리오페’의 어머니 ‘파볼리에 키아라’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녀에 대해서는 안타깝다.
딱, 그 정도의 감정 뿐이었다.
“...칼리오페의 가문의 이름이 높다 한들 어찌 감히 황가와 비교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가문의 격이 아닌, 그저 인간으로서의 격이 맞지 않는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헤에, 그런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랑 유진이랑은 정말로 잘 맞을 것 같아.”
“착각입니다.”
내 명백한 거절에도 황녀는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흐음, 그러고보니 유진은 방학 중에는 따로 예정이 있어? 할 것 없으면 황실에 올래? 내 손님으로 초대할게.”
“괜찮습니다. 방학 초기에는 기숙사에 남아 있다, 본가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카르네아 아카데미의 방학 기간은 두 달이 조금 안 된다.
미리 본가로 돌아가도 상관은 없지만, 많은 플레이 경험을 토대로 내린 결론으로는 3장의 진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기간인 한 달을 제외하고는 다음 학기를 위한 준비를 아카데미에서 하는 편이 공략에 유리했다.
“그럼 초대해도 되겠네!”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하겠다면?”
“....송구하지만 아플 예정입니다.”
“유진은 아픈 것도 정할 수 있어?”
“황녀님께서 초대하면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흐음... 내가 이렇게까지 거절 당해 본 건 처음인데... 그럼, 어떻게 해도 안 올 거야?”
“그것도 송구하지만 그럴 것 같습니다.”
“음... 내가 가슴 만지게 해 줘도?”
“....?”
순간적으로 ‘침대 위의 왕자’가 풀릴 뻔 했다.
도대체 이 정신 나간 황녀는 도대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건가?
재빠르게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황녀의 말을 들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전하. 부디 옥체를 소중히 다루시길 바랍니다.”
“이상하다? 남자는 이러면 다 넘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어디서 그런 해괴망측한 지식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유진 너무하네요! 정말 몰라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 건가요?”
“.....”
갑자기 순정을 짓밟힌 여자처럼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면서 말하는 리아나.
하지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내 표정을 싹 바꾸며 말했다.
“헤헿, 이것도 안 통하네. 그래도 재미있었어! 그럼 다음에 또 봐!”
폭풍처럼 나타났던 황녀가 손을 흔들더니 총총 떠났다.
“하아...”
...지친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마치 로레오스의 특훈을 정신력으로 받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긴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고 있자, 반대쪽 복도에서 한겨울처럼 싸늘한 기운을 내뿜은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루시아였다.
나를 바라보는 루시아의 눈에는 평상시에 보여줬던 애정 어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정도가 아니라 혐오감과 증오 가까운 시선이었다.
마치 1회차 때 초반, 조교를 막 시작한 루시아를 보는 것 같았다.
루시아를 추종하는 무리와 함께 루시아가 나를 스쳐 지나간다.
“...쯧.”
위아래로 나를 흝어 본 루시아는 그녀 답지 않게 짧게 혀를 차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걸어간다.
내가 그런 루시아의 등을 보며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우웅.
그리고 주머니 속에 있는 조정석을 잡고 약간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읏..!”
마력이 불어넣음과 동시에 갑자기 루시아가 흠칫 몸을 떨더니, 뒤로 휙 몸을 돌려 나를 째려보고는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그런 루시아의 얼굴을 보며 내가 반갑게 웃어주었다.
"...큿.."
부들거리며 몸을 떨던 루시아가 주먹을 꽉 쥐더니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먼저 식사하고 계세요. 잠시 다녀올 곳이 생각났어요.”
“루시아님? 표정이 안 좋으세요.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세요?”
“제가 사람을 불러올까요?”
“아뇨, 아닙니다. 괜찮으니까 기다리시지 마시고 부디 즐거운 식사 시간이 되시길.”
짧게 인사를 마치고 1반의 무리에서 벗어난 루시아가 빠른 발걸음으로 나를 스쳐 지나가며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쓰레기...”
루시아의 행동을 본 내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맺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