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루시아는 웃고 있다 (9)
* * *
“....”
병을 탈탈 털어보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벌써 술 한 병이 다 떨어졌다.
“...쯧.”
대충 내던진 술병이 다른 술병들과 부딪혀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술장으로 걸어가 새로운 술을 따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돈이라는 건 어느 세계에서나 참으로 편리했다.
본래 아카데미에서는 반입할 수 없는 술도 돈만 쥐여주면 이렇게 잔뜩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전부 비싸기만 하고 맛은 더럽게 없는 술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저 취할 수만 있으면 되었다.
...엘로이즈의 시체를 확인한 뒤로 며칠이 지났을까?
하루? 사흘? 일주일?
....기억나지 않았다.
그동안 대부분의 시간은 술에 취해있었고, 술에 깨어있는 짧은 시간조차 다시 취하기 위해 보냈으니까.
그렇게 방안에는 텅 빈 술병만이 늘어갔다.
잠에서 깨어 술을 마시고, 구토하고, 다시 기절하듯 잠드는 것만의 반복이었다.
술을 챙겨 침대에 올라가려고 했지만, 다리가 휘청거리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침대에 등을 기댔다.
“...하하하하하하하.”
멍하니 천장을 올려 보자 메마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하고 있던 것일까.
‘게임 속에서는….’
‘1회차 때는….’
병신 같은 새끼.
움켜쥔 주먹 사이로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게임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이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는가?
어디까지나 게임을 플레이하는 감각으로 세계에서 눈을 돌리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내가 눈을 돌리고 있자, 세계가 나를 돌아보게 했다.
이들은 몇 줄로 정리되는 데이터가 아니라, 나와 같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 사람들이 고작해야 상태창에 하나 더해질 칭호 때문에 죽었다.
...내가 죽인 것이다.
똑똑
참기 어려운 혐오감에 다시 술을 들이켜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꺼져라.”
루시아가 문 앞에서 기다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방에 들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이런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도 드시지 않으셨네요.”
문 너머로 루시아가 말했다.
루시아가 찾아온 건 이걸로 몇 번째일까.
그날 이후 루시아는 몇 번이고 내게 찾아와 문 앞에 음식을 놓고 갔지만 나는 한 번도 문을 열지 않았다.
“꺼지라 말했다!”
─철컹
내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이빨을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씹었다. 참기 어려울 정도의 열이 머리에 솟았다.
“병신 같은 년! 이제는 내 명령이 명령 같이 들리지 않는단 말이냐! ”
“...주인님. 며칠째 아무것도 안 드셨어요. 조금이라도 드시지 않으면 큰일 나요.”
루시아의 양손에는 음식을 들려있었다.
머리를 알고 있다.
루시아가 나를 걱정해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라!”
“갑자기 기름진 걸 드시면 위에 부담이 갈 테니까 오늘은 담백한 음식으로 준비해….”
내가 명령해보지만, 루시아는 듣지 못한 척 부드럽게 웃으며 걸어들어왔다.
“빌어먹을!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집어 던졌다.
퍼억!
아무렇게나 날린 술병은 루시아의 손에 부딪혔다.
와다당
바닥에 떨어진 술병이 박살 나고 루시아가 정성 들여 싸 온 음식들은 방안에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주인님.”
“아...”
...루시아의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마..맞출 생각은 없었다. 정말이다.”
...또 다.
또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말았다.
그저 위협만 해서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술에 찌든 몸뚱이는 그것조차 해내지 못했다.
“미..미안하다...미안하다..”
“괜찮아요.”
울음이 터져 나올 거 같은 얼굴을 부여잡고 그저 사과를 반복했다.
“제겐 어떤 짓을 하셔도 괜찮아요.”
그러자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루시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토록 아름답게 웃는 루시아에게 내 추함이 옮을까 두려웠다.
내가 도망치려고 하자 루시아가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주인님만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것이 손을 다치게 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뭘 안다고 말한다는 말이냐….”
“알고 있어요.”
“아니, 넌 모른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무엇하나 내 잘못이 아닌 게 없다! 오롯이 나로 인해 그들이 죽었다!”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그 일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니 분명 그것은 나만의 죄였다.
“아니요.”
절규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루시아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말했다.
“저 또한 알고 있었고 막을 수 있었어요.”
“..하..하하하...”
내가 웃음을 흘렸다.
잠시나마 루시아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릴 뻔했다.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병사의 공이 지휘관의 공이 되듯 루시아의 공은 주인인 내 공이 되는 것이다.’
그때는 루시아를 단순한 도구로 취급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루시아를 공범으로 생각하다니.
제멋대로 유리하게 해석해 이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한 자신이 역겨워서 견딜 수 없었다.
“....너는 내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그렇기에 막지 못했다. 그러니 그것 역시 내 죄다.”
“아뇨, 주인님의 명령을 따른 건 제 선택이었어요.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것처럼 주인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죠.”
“....너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루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 제가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말했죠?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건 주인님의 잘못이 아니라고. 저는 그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하고는 있었어요.”
“설령 그렇다 할지라….”
“그러니 이건 제가 선택한 결과에요.”
루시아가 처음으로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합리화를 하면 뭐가 달라지지?”
아무리 변명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면 되는 거냐? 내가 죽인 거다! 무엇을 어떻게 변명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에머리 실베스터! 윈프레드! 엘로이즈! 그들 중 누구 하나 죽을 필요는 없었다!”
─루시아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 ─1회차 때는 발생하지 않은 사태였다. ─계획상으로는 누구도 다치지 않았어야 한다.
아무리 이러한 말들로 포장하고 감쌀지라도….
내가 그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들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내라고? 루시아. 무엇보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로레오스 교수는 내가 다른 학생들을 지켰다고 한다! 나를 영웅이라 생각한단 말이다! ....그리고 역겹게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여겼었다.
상태창에서 보여준 칭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만든 결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그러니 말해보거라... 루시아...이런 내가...어떻게 나를 어떻게 용서하란 말이냐...”
내 말을 들은 루시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주인님. 저는 주인님에게 자신을 용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내게 뭘 바라는 것이냐...무겁다..루시아...내겐 짐이 너무 무겁다.”
사람의 생명이란 이토록 무거웠다.
당장이라도 무게에 짓눌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인님은 결코 주인님의 선택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돼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주인님의 선택에 따라 죽을 수도 살릴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니, 나는 눈을 돌리고 말 거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이렇게 변명하며 언젠가 스스로를 속이겠지.”
그들이 눈에 보이는 지금조차도 자신에게 변명한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몰랐다. 그렇게 합리화를 반복했다.
결국, 나는 내가 죽인 그들을 아무렇지 않게 잊을 것이다.
“...그러니 제가 주인님과 함께 있을게요. 저와 주인님이…. 우리의 선택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주인님과 함께 끝까지 걸어갈게요.”
루시아의 손이 내 손과 포개졌다.
고개를 들자 루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니 주인님. 부디 절망하지 마시고 이 세계를 구해주세요.”
루시아의 목소리로부터 감출 수 없는 떨림이 전해졌다.
“...내게 세계를 구하라고? 고작해야 학생의 목숨도 구하지 못한 내가?”
“...예, 주인님. 그들의 생명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계를 구해주세요.”
루시아가 천천히 뻗은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지난 세계에서 우리는 종말을 뒤로 늦췄을 뿐 막지 못했어요.”
1회차의 세계에서 나와 루시아는 예정된 종말을 늦췄을 뿐 세계를 구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어요. 우린 세계를 구할 수 있어요…. 그러니 주인님. 부디, 죄를 인정하면서도, 선택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가 주세요.”
“.....”
루시아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이 세계를 구해주세요.”
천천히 다가온 루시아는 조용히 내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 우리가 세계를 구하고 나서도 주인님이 주인님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도, 너무나 슬퍼서….
“제가 주인님과 함께 죽어드릴게요.”
창문에서 흘러들어온 달빛 아래에서 루시아는 슬프도록 환하게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