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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1화 (21/354)

〈 21화 〉 루시아는 웃고 있다 (4)

* * *

“후우...”

체력도 돌아오고 멘탈도 다잡았다.

예상치 못한 황녀와의 만남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기에 이젠 움직여야 했다.

‘...땅굴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내가 이렇게까지 땅굴에 집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땅굴 안에 잠들어 있는 히든피스,‘세계수의 축복’은 신체능력과 재생능력을 증폭시켜주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걸 획득한다고 스탯이 엄청 올라가는 건 아니다. 고작이라 하긴 뭐하지만 육체 스탯의 2~3 정도의 상승하는 정도.

그런데도 이 특성이 왜 꼭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능력치보다는 효과에 달린 재생능력 때문이다.

회복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관에서 상처 치유의 대부분은 회복 계열의 고유 능력자에게 달려있다.

고유 능력자는 마법사보다 더 희귀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회복 계열은 더욱 희귀하다.

회복계열의 고유능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다른 조건 없이 입학 할 수 있는 힐러 전용 아카데미 ‘파르테논’이 '카르네아'랑 동급으로 여겨진다면 그 위상을 알겠는가.

뭐,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희귀한 힐러를 항상 데리고 다닐 수 없으니 개인적인 회복 수단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런데 여기가 맞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닌 지 십 여분,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도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황녀에게서 도망치는 것만 생각해서 미처 굴이 있는 방향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다시 돌아가서 확인해야 하나?’

지금이라도 거목으로 돌아가서 방향을 다시 잡는 게 빠를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 황녀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장소로 돌아갈 용기는 없었다.

황녀가 나를 살려둔 것도 변덕에 불과하다.

반대로 말하면 죽이는 것도 변덕이란 뜻이다.

물론 ‘세계수의 축복’이 중요하기는 하다.

그렇다고 당장 목숨을 내다 버릴 만큼 중요하진 않다.

어차피 이게 다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일이지 않은가.

‘..좀만 더 찾아보자.’

게임 속에서도 헤매다 보면 나왔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실제로 숲을 돌아다니는 것과 모니터 너머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나침반으로 삼은 ‘거목’이야 말 그대로 거대하니까 알아볼 수 있던 거지 다른 나무는 다 거기서 거기로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마침내 기억과 비슷한 장소를 발견했다.

“....뭐야?”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나무뿌리로 감춰져 있어야 하는 땅굴은 대놓고 드러나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나뭇가지로 피를 찍어보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여길 들어가야 한다고?’

...피투성이가 된 굴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은 상당했다.

억지로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보면 핏자국이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으니 최소한 안에는 ‘늑대’가 없다는 것 정도다.

‘그래도 가야지.’

무서웠지만 ‘세계수의 축복’을 고작 무섭다고 버릴 순 없다.

곧 루시아가 교수진을 불러올 시간이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반드시 세계수의 축복을 얻어내야 한다.

‘후우…. 그럼 가자.’

내가 마음을 다잡고 땅굴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땅굴은 그리 넓지 않았다.

가로로는 양팔을 벌릴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세로는 고작해야 내 가슴에 닿을 정도였다.

당연히 허리를 숙이고 걸어 다녀야 했다.

“....”

조금 안으로 들어가자 굴은 완벽한 어둠으로 감싸졌다.

발광석이라도 챙겨왔으면 좋았겠지만, 시험에서는 모든 마도구 사용금지이기에 그럴 순 없었다.

‘이럴 거면 바람 속성이 아니라 불 속성 마법을 빌려올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연습한 게 바람 칼날뿐이고 염동력과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바람 계열이다.

다른 계열의 마법을 바람 칼날 만큼 익숙하게 연습하기에는 시간도 재능도 부족했다.

“...윽.”

안으로 들어갈수록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파고든다.

이제는 참기 수준이라 입과 코를 한 손을 막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저벅, 저벅

길은 온통 울퉁불퉁했고 허리도 반쯤 숙이고 걸어가야 해서 발걸음이 불안정했다.

조금만 실수하면 바로 넘어지겠지….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미끄러질 뻔했다.

쿵­

간신히 벽을 붙잡고 서자 수십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팔을 타고 올라온다.

“씨발!”

본능적으로 비명이 튀어나온다.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가 몸을 타고 오르는 건 정말 소름 끼쳤다.

“왜…. 나만...이런... 히든피스 언제 나와….”

내가 보던 겜 빙의 소설의 주인공들 보면 던전 들어가서 히든피스 한두 개는 뚝딱 해치우던데 나는 이런 쓰레기겜에 전생해서 고작 벌레 따위에 놀라야 하는가.

...정말 울고 싶었다.

***

그 뒤로 얼마나 걸었을까 1시간? 2시간?

어쩌면 10분 정도밖에 안 지났을 거 같기도 하다.

시간 개념이 사라진다.

그도 그럴 수밖에 허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는 어두운 굴속에서 짙은 피 냄새와 각종 벌레가 함께하다 보니 정신력이 마구 깎여나간다.

­케륵.

...진짜 정신이 이상했는지 이젠 이상한 소리마저 들리는 거 같다.

­케륵, ­케륵.

“....!”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진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몸을 최대한 낮추자 반대편에서 나는 소리가 커지며 동시에 희미하게 보이던 불빛이 점점 가까워진다.

“케륵..?”

횃불을 들고 있는 하급 마물.

고블린 3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겨주었지만 나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는 이런 이벤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씨발...현실은 현실이라는건가.”

불평해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곳은 세로는 좁고 가로는 넓은 공간.

키가 작은 고블린에게 유리하다.

그것뿐만 아니다.

장소, 숫자, 장비, 모든 게 열세였다.

...그러니 아직 저 녀석들이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을 때 맨 앞 고블린의 머리를 날린다.

[염동력 (Rank E)]

퍽 소리와 함께 맨 앞에 있던 고블린이 머리가 터져 죽었다.

“케륵! 케르륵!”

동시에 다른 두 마리가 무기를 꺼내며 좌우로 멀어진다.

[염동력 (Rank E)]

나도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염동력을 오른쪽에 있는 고블린을 향해 다시 날렸다.

케르륵!

그러나 고블린도 눈치가 있는지 염동력을 날림 동시에 뒤로 물러나 머리를 날리려고 했지만 한쪽 팔 밖에 못 잘랐다.

그 사이에 왼쪽에 있던 고블린이 내게 단검을 던졌다.

“끄아아!”

왼쪽 어깨에 깊숙히 틀어박힌 단검.

이렇게 부상은 입은건 처음이라 그런지 진짜 존나게 아프다.

마음 같아선 바닥을 나뒹굴면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개새끼야!!”

[염동력 (Rank E)]

퍼억­!

그래도 꾹 참으며 다시 한번 염동력을 날려 외팔이 고블린을 마무리 지었다.

이제 남은 건 한 마리.

폭!

그 순간 작은 통에서 침이 발사된다.

깜짝 놀라 재빨리 몸을 날려보지만, 침이 오른쪽 다리에 박혔다.

...이 빌어먹을 굴이 조금만 높았으면 어떻게 피했을 거 같은데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으니 참으로 괴로웠다.

케르륵!

고블린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비웃는 듯 떠들었다.

“웃지말고 뒤져, 이 새끼야!”

「바람─칼날」

촤아­!

응축된 바람의 칼날이 마지막 남은 고블린의 머리통을 가른다.

“하아...씨발...”

하급 마물이라고 하지만 숫자와 공간의 이점을 가지고 있으니 그냥 죽을 뻔했다.

주저앉아서 확인해보니 허벅지에 박힌 침과 어깨에 박힌 단검이 더 아프게 느껴진다.

“빼야... 겠지?”

‘아카조교사’의 설정상 고블린이 쏘는 침에는 독이 발라져 있다.

건들기도 무섭지만, 독이 더 흡수되기 전에 빼내야 했다.

부욱­!

혹시 혀를 깨물까 대충 옷을 입에 처넣고 단숨에 침을 잡아 뺀다.

“끄...으으으!”

천을 그렇게 씹었는데도 이빨이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마취도 없이 맨살을 휘젓는 건 진짜 미친 짓이었다.

아직 어깨에 단검이 남았지만 이건 빼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씨발...씨발..”

욕이 저절로 나온다.

교복을 찢어 대충 붕대처럼 감았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한가지 긍정적 소식이 있었다.

‘...그래도 거의 다 왔어.’

지금까지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횃불이 있으니 확실히 알겠다.

유독 이 주변 토양은 기름졌다.

농사에는 전혀 문외한인 내가 알아볼 정도니 이것이야말로 ‘세계수의 축복’이 근처에 있다는 증거였다.

단도가 박힌 팔로 횃불을 주워들고 반대쪽 팔로는 벽을 두드려댄다.

똑똑­ 똑똑­ 똑똑­

“...제발.”

똑똑­ 똑똑­ 똑똑­

지금 와서 되돌아가기는 늦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계수의 축복’을 찾아야 했다.

“하아...하아..”

계속 벽을 두드리자 독이 돌기 시작한 거지 아니면 피를 많이 흘려선지 시야가 점점 흐릿해진다.

...‘늑대’도 아니고 고작 고블린에게 죽는 건가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똑똑. 똑똑. 통통.

그때 분명히 다른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다시 한번 벽을 두드려봤지만, 여전히 소리가 다르다.

‘여기다!’

[염동력 (Rank E)]

「바람─칼날」콰앙­! 콰앙­!

남아있는 정신력과 마력을 전부 사용해서 벽을 부순다.

지금은 힘을 아끼니 마니 할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세계수의 축복을 얻지 못하면 끝이었다.

쩌저적­!

가뜩이나 몸 상태가 최악이었는데 마력과 정신력마자 급속도로 줄어들자 죽을 맛이다.

‘제발...!’

[염동력 (Rank E)]

그래도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서 염동력을 날리자.

콰앙­!

마침내 벽이 무너지고 비틀거리는 몸은 그곳으로 굴러떨어지다시피 쓰러졌다.

쿵!

아찔한 낙하의 충격이 온몸을 감싸더니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래도 떨어지면서 내장마저 다친 모양이었다.

“끄으으...”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그래도 희망이 보였다.

저 앞에 스스로 미약한 빛을 뿜어내는 씨앗이 있었다.

「세계수의 축복」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굳게 쥐었다.

저것만 얻으면 일단 살아날 수 있다.

...그런데 씨발, 다리가 부러졌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겠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움직이는 건 단검이 박힌 왼팔뿐.

“끄으으윽!”

왼팔 하나로 몸을 지탱하며 기어간다.

움직일 때마다 고통으로 머리에 있는 혈관이 다 터져나가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바닥을 기어서 다가갔다.

하지만 정신력으로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씨앗을 코앞에 두고 끔찍한 고통이 한 번 팔을 타고 올라오더니 팔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조금만...!’

필사적으로 손가락을 뻗어보지만

...약간 ...정말 아주 약간의 거리를 놔두고 손가락은 닿지 않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갑자기 불이 꺼진 듯 시야가 어두워진다.

‘세계수의 축복을 눈앞에 두고 죽는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회복 수단이 눈앞에 있는데 사용도 못 하고 죽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씨...발...좆망겜..’

유언치고는 참으로 서글펐지만, 그 말과 함께 내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

.

..

...

....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 쳤기에 이루어낸 기적일까.

단검이 박힌 곳에서 흘러나온 한 방울의 피가 유진의 내뻗은 손가락 끝을 타고 내려가 씨앗에 떨어졌다.

꿈틀­

떨어진 유진의 피를 빨아드린 씨앗이 부르르 떨더니….

화아악­!

이내 주위를 가득 채울 정도로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둥둥 떠오른 씨앗이 유진의 몸에 내려앉는다.

몸에 씨앗이 흡수되자, 이번에는 유진의 몸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상처들이 하나씩 회복된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발광하던 유진의 몸에서 빛이 사라지고 다시 굴속에 다시 침묵과 어둠이 내려앉았다.

“...”

그 누구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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