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000일 후에 조교 당하는 음침녀 (3)
* * *
유진 칼리오페...
눈치챘을 땐 그의 이름을 적고 있었다.
***
어릴 적부터 언니는 모든 게 뛰어났다.
그에 비해 나는 멍청하고, 느렸으며 아무런 재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님과 어머님도 무너져가는 가문을 다시 일으킬 인물로 언니만을 바라보았다.
슬펐지만 그래도 가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의 생일날.
모두가 언니를 축복하던 날.
...그리고 지독한 감기 때문에 나 혼자 밤을 지새웠던 그 날.
방 밖에서는 파티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기침 때문에 목이 갈라져 피를 토하던 나에게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날 깨달았다.
나는 언니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걸.
***
‘...부르셨어요. 언니.’
‘응, 비비안. 축하하렴. 이 언니가 카르네아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됐단다.’
어느 날 정원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던 언니가 말했다.
영원히 언니의 아래에서 살아갈 거로 생각했던 나에게는 꿈만 같은 소리였다.
깊숙이 밀어 넣었던 줄 알았던 희망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카르네아 아카데미는 모두 기숙사제다.
그런 곳에 언니가 입학한다는 건 3년 동안은 언니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언니랑 떨어질 수 있었다는 게 너무나 기뻤다.
‘카르네아 아카데미에 입학하다니 정말 축하드려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언니가 없다면 아버님과 어머님도 나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의 자리를 빼앗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 따위가 언니를 대신 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언니가 받는 관심을 아주 약간...
정말 아주 약간만이라도 나눠 받으면...
나도 가족으로서 인정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이어지는 언니의 말은 희망을 쥐어 으스러트렸다.
‘응, 잘됐지. 그러니까 너도 내년에 들어와.’
‘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풀려나게 되는 줄 알았더니 다시 언니의 아래로 들어가라니….
'어, 언니 그게 무슨...'
‘너가 그렇게 대답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멍청해 보여. 너도 내년에 카르네아 아카데미에 입학하라고 말하는 거야.’
‘저, 저 같은 게 어떻게 카르네아에…. 무, 무리에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니에게 한 말대답.
‘...비비안.’
언니에게 이름을 불리자 온몸이 굳어버린다.
언니는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에 집어넣었다.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야?’
‘아.. 아니에요. 그런게..아니라.’
‘흐음...’
언니가 들고 있는 포크를 손가락으로 빙글 돌린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다리가 제멋대로 무릎을 꿇고 만다.
‘어, 언니. 제가 잘못했어요. 드, 들어갈게요. 어떻게든 들어갈게요.’
‘응, 당연히 그래야지. 들어오지 않으면 큰일 날 테니까.’
──푹
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에 포크가 꽂힌다.
'기다릴께. 비비안.'
‘네...네.. 언니.’
이럴 거면 희망이라도 품지 말걸.
참을 수 없이 슬펐지만, 나에게는 슬퍼할 자유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웃어. 비비안. 이 자랑스러운 언니랑 같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는데 웃어야지.’
‘어..? 헤..헤헤.. 죄송해요. 언니. 기뻐서 눈물이 나왔나 봐요.’
눈물을 소매로 닦고 떨리는 입가를 억지로 올린다.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림자는 결코 언니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
그날 이후 일 년이 지난 카르네아 아카데미 입학식 날.
150위로 간신히 입학한 나는 강당 끝자리에 앉아있었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니랑 같은 학교에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려웠으니까.
떨고 있는 사이 입학식이 끝나고 학생들은 무리를 지어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혹시나 방에 있으면 언니가 찾아올까 봐 두려웠으니까.
도서관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홀로 앉아있다 돌아갔다.
침대에 누우니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까.
죽고 싶었지만,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
...하지만 용기없는 나에게 감사했다.
그날 죽어버렸다면 나는 유진 칼리오페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는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도와주었다.
굼뜨기 짝이 없는 나를 위해서 발을 맞춰주었고, 그 역시 지쳤을 텐데 날 위해서 일부러 넘어지기까지 했다.
미안한 마음에 그를 일으켜 세우려던 순간 신경 쓰지 말고 달려가라는 눈빛까지 보냈다.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니가 아닌 나를 위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날 나는 도서실에 가는 대신 강의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다는 한마디를 말하기 위해 연습에 집중하느라 유진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청소도구함에 숨어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진이 물을 마시는 걸 지켜보았다.
“크으으.”
기뻤다.
설령 내가 한 것인지 몰라도.
그가 마셔주었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내가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다음날에도 나는 강의실에 일찍 도착했다.
언니에게서 도망치는 마음도 있었지만, 혹시나 유진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오지 않았다.
‘안 오는 건가….’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기대하고 침울해지다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유진 칼리오페였다.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그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공책에 낙서하며 그의 옆모습을 힐끗 훔쳐보는 중 펜을 떨어트렸다.
‘아...’
떨어진 펜은 그의 발아래에 멈춰섰다.
난 왜 이렇게 맨날 실수만 하는 걸까.
자신을 책망하는 사이 유진이 펜을 주워 건넸다.
"자, 여기."
"고, 고마워..."
"별거 아니야."
정말 사소한 친절.
그러나 메마른 마음속에 녹아들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아침 대화를 나누었다.
“오, 유리우스 헌리의 책이네.”
“...유리우스도 알아?”
“알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데.”
시시콜콜하기 짝이 없는 대화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아! 아퍼! 아프다고.”
“엄살은. 이 정도로 뭐가 아프다고.”
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과 사이좋게 떠드는 유진이 보였다.
내게는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람이지만….
그에게 나는 많은 친구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느끼고 말았다.
그가 다른 애들과 떠들고 있는걸 보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울게 되면 유진을 당황하게 만든다.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뭘 기대한 걸까.
뭘 바라던 걸까.
처음부터 알고 있던 주제.
...알고 있었지만, 너무 괴로웠다.
내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강의가 끝나고 나는 도망치듯 기숙사에 돌아갔다.
‘...바보.’
이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비련의 여주인공 흉내라니 창피하기 짝이 없다.
정신을 차리고 환기라도 시킬 겸 창문을 열어보니 창틀에 편지 한 장이 꽂혀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혹시 언니의 편지일까 두려웠다.
제발 오늘만큼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봤지만,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작가님께.
제가 이 작품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툭.
놀라서 편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작년, 여름.
나는 최악의 선택을 한 적이 있었다.
너무 괴롭고 슬퍼서 누군가 내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비틀린 마음에 나를 주인공으로 한 야한 책을 판매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책을 모두 회수했는데.
“어...어떻게...”
전부 회수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편지가 온 걸 보면 분명 책에 있는 편지지를 사용한게 분명하다.
제법 비쌌지만 만에 하나 편지가 오면 가문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 책 가장 뒷장에 내방으로 직접 도착하게 하는 편지지를 넣어놨으니까.
“어..어떻게 하지.”
이 편지지를 사용해서 보냈다는 건 다행히 내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는 거지만 누군가 자신의 책을 보고 있다는 초조한 마음에 기숙사 방을 이리저리 왕복한다.
[낡은 서점에 들어가 이 책을 고르게 되었고 운명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책을 봐왔지만...]
하지만, 초조함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도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책을 읽고 편지를 써주었다는 건...
적어도 이 사람에게 나는 의미가 있다는 거니까.
‘무시해야 해.’
평범한 책도 아니고 그런 내용의 책이다.
친해져서 좋을 것이 없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편지에 적혀있는 저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나인걸... 모를테니까.. 딱.. 한 번만.’
자신에게 변명하며 비비안이 책상에 앉았다.
***
“즐거워 보이시네여. 주인님.”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내방을 청소하고 있는 루시아가 말했다.
즐겁다. 이 답장은 비비안의 공략이 제대로 되고 있다는 증거니 즐거울 수밖에.
“...루시아. 시킨 일은 잘 했겠지.”
“네! 들키지 않게 몇 번이고 의뢰자를 세탁했으니 문제 없어요. 그리고 분위기를 보니 주인님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곧 일어났을 거 같았어여.”
루시아의 대답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이끄는 내가 말 하기는 뭐하지만….
비비안은 괴롭히기 딱 좋은 위치에 있는 녀석이다.
귀족이기에 평민들의 무리에는 낄 수 없다.
그렇다고 귀족들의 모임에 끼어들기에는 베아트리스 가문은 저물어가는 태양이었다.
더욱이 소심한 성격에, 사교회도 나가지 않았으니 친구도 지인도 없고, 입학 성적마저 최하위다.
그리고 무엇보다….
2학년에 있는 능력 좋고 싸가지없는 비비안의 언니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게 문제다.
그녀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은 직접 말을 못 해도 그녀의 동생은 충분히 괴롭힐 힘을 가졌으니까.
‘이렇게 보니 언니가 거의 만악의 근원이네.’
비비안이 힘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도 이렇게 소심한 성격을 가지게 된 것도 다 언니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고유능력을 각성한 그녀가 비비안을 괴롭히고 무시하고 윽박질러서 비비안이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도 못하게 했으니까.
'쯧쯧, 언니만 없어도 아카데미 졸업은 무난히 했을 텐데.'
비비안에게 있어서는 안 됐지만 앞으로 한동안은 괴로울 거다.
'뭐, 나야 잘됐지만 말이야.'
내게 의존하는 비비안을 조교 할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