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7화 (7/354)

〈 7화 〉 수상할 정도로 몸매가 좋은 동급생 (3)

* * *

“죽을 것 같다….”

정말 죽을 만큼 힘들다.

계단 하나 오르는데 다리가 마구 후들거렸다.

“로레오스... 그 씹새끼”

세 바퀴를 추가로 뛰니까 늦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로레오스는 늦었다는 이유로 나를 단련실로 따로 불러 추가 훈련까지 시켰다.

왜.

도대체 왜!

내가 뭘 했길래!

첫날부터 나만 이렇게까지 괴롭힌단 말인가!

그나마 예상할 수 있는 이유로는 칼리오페 가문에서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청탁한 거지만….

‘...그럴 리 없지.’

로레오스는 죽으면 죽었지 돈이나 권력으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냥 내가 싫은 거다.

내가 마지막에 지쳐 쓰러졌을 때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더욱 확실하다.

‘고작 이정도 훈련으로 정말 쓰러진 건가? 한동안은 계속 추가 훈련이 필요하겠군.’

“씨발..”

아무래도 게임 타이틀을 바꿔야 할 거 같다. '아카데미의 조교사.'가 아니라.

'아카데미 첫날 교수에게 찍혔다.' 로 말이다.

***

카르네아 아카데미가 조용하다.

당연히 조용할 수밖에 없는 게 내가 단련실에서 추가 훈련받을 때 아카데미는 이미 끝날 시간을 한참 지났다.

이런 시간까지 훈련을 시켜놓고 고작 이정도라고 하는 로레오스의 인성에 의문을 가지며 강의실에 들어가자 내 책상 위에 물통과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누가 올려놓았는지는 뻔하다.

반에서 나를 챙겨 줄 사람 따위는 없으니 당연히 루시아 우르엘라겠지.

아카데미 안에서는 조교 받기 전의 자신을 연기하라고 하니까 직접 나오지는 못하고 이렇게 수건과 물을 준비했나 보다.

이렇게 챙겨준 건 고맙지만 부디 들키지 않았으면 좋으려만...

“크으으.”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고 방금 막 떠 놓은 것 같은 차가운 물을 마시니 좀 살 것 같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나로서는 이런 호의를 받았다면 당연히 감사 인사를 돌려줘야 하지만 루시아에게 아니었다.

장담하는데 루시아는 감사 인사를 받는 순간 주인님으로서 자격이 떨어졌다고 의심할 거다.

오히려 암퇘지 주제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하면서 침을 뱉거나 뺨을 때려주는 걸 더 좋아하겠지.

감사를 전하는 방식이 뺨 때리기와 침 뱉기라니... 참으로 앞날이 막막하다.

물통과 수건을 가방에 넣고 기숙사를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자 멀리서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새벽에도 그렇고 도대체 얼마나 나를 기다리는 건가.

한숨을 한 번 내쉰다.

그리고 부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구부정했던 허리를 곧게 펴며 1회차 주인공의 모습을 연기한다.

“...”

정문 밖에 나서는 순간 달려들까 봐 조금 긴장했지만, 루시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아닌 거 같아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그렇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세 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루시아가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아침에 조금 떨어져 걸으라고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지킬 줄이야.

“...”

고개를 돌려 루시아의 얼굴을 보았다.

확실히 조교 받기 전의 루시아가 떠오를 정도로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미묘하게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내게 반말을 내뱉을 자신이 없어 참는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했다시피 아카데미가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날 시간이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멈춰 서자. 루시아도 걸음을 뚝 멈춘다.

“...아무도 없으니 노예답게 말해도 좋다.”

“에..? 아! 헤헤, 감사합니다. 주인님!”

루시아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려고 하자 내가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멍청한 년. 내가 말을 하라 했지 허락도 없이 다가오라고 했나?”

“하읏... 죄, 죄송해여. 다시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아, 그렇다고 주인님이 다시 조교해주신다는게 싫은 건 아니고….”

횡설수설하며 다시 물러나는 루시아.

그래, 최소한 이정도 거리는 떨어져 있어야 누가 보더라도 어떻게 둘러댈 수 있다.

내가 다시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서 계속 여기서 기다린 거냐? 내가 분명 조교 받기 전에 너를 연기하라 하지 않았나.”

루시아의 외모는 눈에 띄어도 너무 띈다. 한참이나 여기서 기다렸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한 학생도 있었을 거다.

그러자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아니에여.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잘 숨어있었어여.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님이 나오질 않으셔서 저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무슨 일? 로레오스 교수에게 특별 훈련을 받았다. 네년도그걸 알고 물병을 가져다 놓은 거 아니냐.”

“물병...이여?”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뻑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루시아.

“...저, 저는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계속 주인님의 은혜를 모르던 멍청한 루시아를 연기했는데여….”

루시아가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

이번에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물병을 루시아가 준 게 아니라면 누가 줬다는 말인가.

“네가 책상 위에 이 물병을 올려놓지 않았다고?”

가방 속에서 물병을 꺼내 루시아에게 건네주었다.

“...물이 차갑네요. 방금 떠온 것 처럼..”

물병을 한참 만지작거리더니 작게 중얼거리는 루시아. 그리고 5반이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본다.

“...그러니까 누군가 주인님 책상 위에 물병을 올려놓았다는 거네요?”

“멍청한 네년이 까먹은게 아니라면 그렇겠지.”

“흐음….”

물병을 관찰하고 있는 루시아의 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뭐지?’

보통 야겜에서 이런 분위기는 질투를 의미하지만, 적어도 루시아에게 있어서는 그럴 리가 없다.

루시아는 질투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질투할 수 없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1회차 때 조교를 하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루시아의 질투 같은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아카조교사’에서는 메인히로인 말고도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고 나 역시 가끔 심심할 때면 다른 여자들을 공략하고 다녔다.

하지만 질투하는 루시아에게 찔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루시아가 질투를 느끼지 않게 조교 했다.

그 결과 루시아는 내가 다른 암컷을 조교 하는 것에도 행복해하는 정신상태를 가지게 되었다.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른 여자들을 꾀어서 내게 바칠 정도로 말이다.

그런 루시아가 질투할 리가 없지 않은가.

“잘됐어요! 누군가 주인님의 매력을 알아채고 말았네요!”

내가 느낀 게 착각이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루시아는 밝은 목소리로 환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정말 잘 됐어요! 주인님 부디 그 암컷에게 은총을 내릴 때는 저도 꼭 돕게 해주세요.”

“...시끄러우니 입 닥쳐라.”

아무리 주위에 사람이 없다지만 이렇게 큰 목소리로 암컷이라고 떠들어대는 건 좋지 않다.

“히잉..죄송해여.. 너무 들떠서.”

루시아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어깨를 움츠린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흘리며 루시아에게 말했다.

“...네년이 해줘야 할 게 있다. 잘 해내면 상을 내려 주지.”

“사..상이여?”

뭘 상상했는지 루시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면 침을 꼴깍 삼킨다.

“일단 고서점에서….”

나는 그런 루시아를 애써 무시하고는 비비안 세뇌 조교 루트를 위한 준비 필요한 것을 속삭였다.

***

방에 들어와서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그래도 특훈이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능력치]

근력 10 민첩 10 체력 10

지력 10 마력 10 행운 20

...라고 말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빌어먹을 상태창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하긴 하루 체력단련을 했다고 능력치가 올랐으면 전투 난이도가 빡세다고도 말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훈련을 한 학년 내내 받아야 체력이 15는 찍을까 말까다.

“끄으으..”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말이다.

온몸에 근육통이 장난이 아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두드려 맞은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침대에서 일어날 힘도 없어서 손을 뻗고 기다린다.

[염동력 (Rank E)]

책상 위에 물병이 염동력으로 감싸듯이 들어 올려지며 내 손에 달라붙는다.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확실히 고유능력을 택한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고통받는 상태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마법이었다면 계산하느라 한참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활용도도 게임보다 더 커졌고.’

게임 속에서는 염동력은 물건을 들어 올려 날리거나, 상대를 짓누르거나 하는 정도로만 사용됐지만, 지금은 이렇게 활용할 수도 있다.

양쪽 손바닥을 마주 보게 들고 손바닥 사이에 염동력으로 구(?)를 만들어낸다.

우웅­

이걸 날려서 상대방을 후려치면 일반적인 염동력의 사용방법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할 것은 게임 속에서는 없었던 이곳에서 내가 직접 개발한 능력이다.

구 형태의 염동력을 양쪽에서 힘을 가해 압축한다.

머리가 욱신거리고 땀이 조금 흐르지만, 무시하고 더욱 정신을 집중한다.

어느 순간 구 형태의 염동력이 타원형처럼 변하더니 이윽고 칼날처럼 얇게 변한다.

샤악­

그렇게 압축된 염동력을 앞으로 쏘아내자 식탁에 올려져 있던 과일이 반으로 쪼개진다.

“후우...”

지금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위력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과일 자르는 수준이지만 계속해서 연습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만했다.

그 순간 갑자기 스위치가 꺼진 듯이 피곤함이 느껴진다.

염동력을 수준 이상으로 사용한 대가다.

“슬슬 잘까….”

비비안의 공략을 위해서는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훈련 때문에 몸도 정신도 만신창이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부디 내일은 좋은 일이 있기를 기도했다.

* *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