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변대훤(17)
신변을 정리했다. 더는 일상을 지속할 까닭이 없었다.
지수는 또다시 그 애한테 간 걸까.
그 애의 전화번호는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외워버린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면 될 문제였다.
그 애의 주소로 찾아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 애한테 연락하거나 그 애의 오피스텔 호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지수가 언젠가 뛰어내렸던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족과 친구를 포함한 주변인 몇 명이 아주 잠깐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다들 미안해요. 그렇지만 난 지수가 제일 좋다고요.
솔직히 지금 나한테 당신들 중 누구도 지수보다 안 중요해요.
그런데도 너한텐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난 그냥 혼자였구나.
넌 결국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단 한 번도 날 진심으로 대해준 적 없구나.
내가 없어져도 슬피 울어주지 않겠지. 날 오래오래 기억하고 그려주지도 않겠지.
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좋아.
사랑은 원래 받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사랑을 줄 수조차 없다면 내가 왜 살아야 하지?
내 삶에서 널 빼면 아무것도 없는데. 네가 없어진 난 아무것도 아닌데.
네가 이 난간에 매달려서 내게 애원할 때도 지금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겠구나. 넌 실수로 떨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때 너도 이젠 정말 나뿐이라고 울부짖었지.
보고 싶어, 지수야.
네가 보고 싶단 말이야. 이 나쁜 녀석아.
난 여기서 혼자 이렇게 지지리 궁상을 떠는데, 넌 어디서 뭐 하는데.
늦봄의 그날처럼 내 앞에 짠 등장해줘야지. 그땐 그랬잖아.
바보 같은 내 ‘보고 싶어’ 한마디면 열아홉 살의 넌 그 새벽에 슈퍼맨처럼 내 앞에 나타나서 날 놀라게 했잖아.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없이 안아줬잖아. 내가 널 보고 싶어 하는 마음 외엔 세상 무엇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네 품 안에서 달래줬잖아.
사랑이란 마법을 부렸잖아.
또 한 번 그렇게 해줄 수 있잖아. 단 5분간의 마법 같은 새벽이면 5개월의 마음고생쯤 얼마든지 까맣게 지우고 감동만 할 자신 있는데.
그니까 내 앞에 나타나란 말이야. 여기까지 왔는데도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내 심술이 그치지 않는단 말이다.
자꾸 널 후회하게 만들고 싶어진다고. 너랑 내게 씻을 길 없는 아픔을 입히고 싶어진다고.
우릴 벌주고 싶다고.
비정한 너와 멍청한 날 단죄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진단 말이야.
“……!”
그때였다.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번호 11자리였다. 전화를 받았다.
―형.
“…….”
마지막 연락이 이 애라니. 오점투성이인 내 인생 속 가장 큰 오점이었다.
이렇게 재수 없는 일진에 뛰어내릴 순 없었다. 날을 다시 잡아야 할 판이었다.
―나 형 연락 기다렸는데. 없길래 내가 걸었어. 잘 지내지?
“…….”
―형 애인 어딨는지 안 궁금해? 왜 안 물어봐?
너한테 왜 물어봐. 지수는 너랑 같이 있지 않은데.
지수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분명 다른 문제 때문일 것이다. 난 내 애인을 믿었다.
그런데 왜 한강 다리 위에 서있는 건지는 설명할 길 없었다. 그 앤 내가 아무 말 안 해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혼자 말했다.
―카톡으로 보내줄게. 형 설마 나 차단한 거 아니지?
“…….”
―차단했으면 차단 풀어. 끊는다. 사랑해! 쪽.
그 애 쪽에서 전화를 끊었다. 애초에 누구도 차단한 적 없었다.
차단 여부를 확인하려는 양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거절하려는 순간 손가락이 쓱 미끄러졌다. 나도 모르게 영상통화를 연결해버리고 말았다.
어떡하지? 다시 꺼야…….
―형! 우와! 대훤이 형! 안녕? 큭큭.
영상통화화면을 본 순간 굳었다.
―짠, 우리 봐라. 좋겠지? 아! 형도 같이 왔으면 더 좋았잖아. 그니까 왜 서로 연락을 안 해. 둘이 애인 맞아? 큭큭큭! 내가 김지수한테 분명히 형한테 존나 잘해주라고 했는데.
“…….”
내가 보는 화면을 믿을 수 없었다. 합성인가?
날 향해 웃는 민탑기. 그리고 옅은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계단을 통해 방갈로에 오르는 김지수.
작은 전자 화면 속 풍경이 어딘지 모를 리 없었다.
내가 그토록 지수와 함께 여행 가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몇 번이나 찾아보고 또 찾아봤던 곳이었다.
―지수가 나 여기 데리고 왔다. 난 진짜 계속 오기 싫다고 했거든? 근데 지수가 미리 예매 다 하고 나한테 제발 가자고 조르길래 그냥 어쩔 수 없이 따라왔어.
“…….”
―근데 형 없으니까 재미없다. 내 맘 알지? 지금 일어나자마자 형한테 전화한 거야. 아! 김지수! 절로 가. 폰에 물 묻어. 큭큭큭!
지수가 어떻게…….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여행을 간 걸까? 고작 낮에 몇 시간씩 일한 값을 전부 모아도 얼마 안 될 텐데. 돈이 어디서 났지?
지수가 사라질 때 같이 사라진 금고가 떠올랐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자꾸 떠올랐다.
―근데 형 어디야? 한국은 새벽 아니야? 밖에서 뭐 해? 대답하라, 오버.
검은 한강이 넘실넘실 춤췄다. 날 비웃고 있었다.
내가 왜 뛰어내려야 해.
마음을 바꿨다. 난간에서 돌아섰다.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오늘 하루를 완전히 망친 값을 두 사람한테서 받아내야 했다. 아니, 두 사람은 오늘 하루뿐만 아니라 내 인생을 책임져야 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날 끌어낸 인물이 다름 아닌 그 애라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신은 없어. 없어야만 해.
신이 있다면 내가 김지수를 사랑하게 하지 말았어야지. 김지수가 하라는 대로 하게 두지 말았어야지.
민탑기와 김지수가 더러운 짓거리를 벌이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좆이 개꼴리게 하지 말았어야지.
민탑기가 사악한 스리섬을 제안했을 때 단호히 뿌리치게 했어야지. 타락한 행위에 참여한 내 몸과 맘을 흥분하게 하지 말았어야지.
악취 나고 병든 몸뚱이를 얻고도 마치 인생을 본격적으로 망가뜨릴 구실을 얻은 양 들뜨게 하지 말았어야지.
아니, 신이 있다면 애초에 나로 하여금 남자를 원하게 하지 말았어야지. 같은 남자 성기를 똥 나오는 구멍에 꽂으면 기분 째지는 몸뚱이로 빚어내지 말았어야지.
두 사람의 노리개가 되어 학대당하고 인간 취급도 못 받는 동안 사실 행복해하게 하지 말았어야지.
모르는 아저씨 열댓 명의 욕정을 하루 만에 받아내고 머슴아이 떼거리한테 한꺼번에 돌림방을 당하면서 염원을 이룬 듯 즐거워하게 하지 말았어야지.
김지수만 바라보는 일편단심 민들레인 척 실은 세상 모든 수컷 거시기를 망가진 엉덩이 사이에 처박고 흔들고 싶어서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대기 중인 똥걸레로 타락하게 놔두지 말았어야지……!
그런 것도 못 하는 신이 무슨 신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내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정해져 있었다. 모두의 삶이 미리 정해져 있듯이 말이다.
태초부터 이렇게 될 일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고 눈꺼풀 한 번 깜빡인 일조차 전부 이 결말을 위한 과정이었다.
텅 빈 듯 공허하고 아픈 마음에 새 물결이 흘러들었다. 내게 지혜를 선물하는 치유의 샘물이었다.
두 번째 삶을 시작할 기회였다.
날 위한 선택, 가장 이기적인 선택을 하겠다. 지금부터 김지수 네가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할래. 나야말로 내 삶의 주체가 되겠어.
내 신은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