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변대훤(15)
“대훤아, 일어나.”
지수 목소리였다. 그제야 몸을 포근하게 가둔 무게를 느끼고 눈꺼풀을 들었다.
지수가 날 커다란 덩치로 덮친 채였다. 강아지처럼 빛나는 눈이 날 내려다보았다.
눈을 비비고 이불 속에 숨어서 말했다.
“나 좀만 더 잘게.”
“안 돼. 밥 먹어야지. 너 아침밥 먹이는 게 내 딱 하나 있는 중요한 일인데. 허허허!”
“뭐 했어?”
“시원―한 김치 콩나물국. 맛있겠지?”
“흠…….”
“얼른 나와서 밥 먹어.”
“알았어…….”
“쪽.”
지수가 이불을 들치고 내 뺨에 기습 키스를 꾹 묻혔다. 졸린 눈을 떠서 슬쩍 곁눈질하자 지수가 흡족한 얼굴로 씩 웃는 모습이 보였다.
지수가 내 위에서 펄쩍 뛰어내려서 방 밖으로 달음박질쳤다. 싱겁게 웃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펜션 여행 이후로 지수와 난 전에 없이 가까워졌다. 또 내가 꿈에 그리던 모습처럼 다정해졌다.
지수와 난 때아닌 신혼 생활을 만끽 중이었다.
그렇게 지낸 지 어언 석 달째였다. 지수는 예전처럼 외박을 하기는커녕 낮에 잠깐 아르바이트하고 장 보는 것을 제외하면 나 없이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
인제 제법 주부답기까지 했다. 매일 아침 정성스러운 아침상을 차려놓고 날 깨우는 건 기본이었다.
“대훤아, 안 나와? 다 식는다!”
지수가 부엌에서 목청을 높였다.
“어, 갈게.”
누워서 뒹굴뒹굴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쉬울 정도로 아무런 개인 메시지가 와있지 않았다.
요즘은 음란 문자나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협박 전화 같은 것도 날 괴롭히지 않았다.
이부자리에서 느릿느릿 내려와서 침실을 나서자 훈훈한 밥 냄새가 끼쳤다.
지수가 날 보자마자 후다닥 밥과 국부터 떠서 내 자리에 올려놓았다. 지수의 밥과 국은 한참 전에 떠 놓은 듯 김을 내지 않았다.
말없이 내 자리에 앉았다. 지수가 그제야 날 따라 자기 자리에 앉았다.
내가 몇 술을 뜨고 나서도 지수는 쉽사리 식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내 반응만 살폈다. 맛이 어떤지 궁금한 눈치였다.
“……괜찮네.”
“진짜? 어허허!”
지수가 마음을 놓은 듯 소리 내 웃고 첫술을 허겁지겁 떴다. 출근 전 아침나절이 지나면 내가 귀가할 때까지 못 보니까 아침밥만큼은 꼭 같이 먹고 싶댔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꼭 애완 강아지같이 한참 달가워하고 잠들기 전까지 날 못살게 굴었다. 물론 예전과 달리 좋은 의미로 못살게 굴었다.
그렇다고 육체관계를 갖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수는 수술 후유증과 트라우마 때문인지 단 한 번도 요구하는 일이 없었다.
나도 지수한테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았다. 지수를 병간호하던 시절 지수가 용변을 볼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모습이 떠오르면 쉽게 바랄 수 없었다.
어차피 지수와 내가 그것 때문에 이제껏 긴 시간을 만나온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활발한 성생활을 해온 편도 아니었다. 급할 이유 없었다.
우리에겐 앞으로 시간이 많았다. 지수도 불구가 된 게 아닌 이상 차차 회복할 테고, 굳게 닫아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영혼을 섞은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우린 젊고, 서로 사랑하니까.
“갔다 올게.”
내 사랑을 구하는 지수의 눈빛, 내 반응 하나하나에 크게 기뻐하고 죽어버릴 듯 속상해하는 표정 한 번 한 번이 꼭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널 완전히 갖는 건 상상보다 훨씬 지루한 일이었다.
그렇게 맘속으로 허세를 부릴 때마다 입가에 매달리는 미소 때문에 간질간질했다. 행복이란 어쩌면, 행복한 줄 몰라야 진짜 행복인 게 아닐까.
매일매일 아침 햇살 아래 날 깨우는 지수. 지수가 매주 빨래해서 향기롭고 뽀송뽀송한 이불.
영화 보면서 맥주 한잔. 양푼에 밥 비벼 먹기.
산더미같이 쌓인 그릇을 하루 꼬박 걸려 설거지하는 지수의 뒷모습.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메뉴를 검색하다가 요리에 취미를 붙인 지수.
빨래 너는 지수를 구경하면서 커피믹스 마시기. 만화영화 채널을 틀어놓고 둘이 꾸벅꾸벅 낮잠 자기. 지수를 무릎에 누여놓고 책 읽기.
신문지 깔고 삼겹살 파티. 아닌 달밤에 푸시업 대결.
이젠 네가 먼저 나가자고 조르는 저녁 산책. 공원에서 농구 하거나 배드민턴 치기.
낮에 몇 시간 아르바이트할 때를 빼면 주야장천 집 안에서만 지내느라 수수한 차림의 지수. 지수의 목 늘어난 티셔츠와 고무줄 바지.
다가오는 설엔 만두도 빚고 떡국도 끓여 먹어야 하고, 그전에 크리스마스 시즌엔 트리도 꾸며야 하고…….
이만하면 살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