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변대훤(14)
샤워를 마치고 이부자리에 들었다. 지수가 몇 명을 데려와서 누였는지 알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런 건 인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조차 내가 사랑해야 하는 지수의 일부였다.
사랑한다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부정하지 않는 것. 판단하지 않는 것.
옳거나 그르다고 하지 않는 것. 옳은지 그른지 헤아리지 않는 것.
그냥 인정하는 것. 불쌍히 여기는 것.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 무조건 믿는 것. 몇 번을 속든 또다시 기쁘게 믿는 것.
돌아오면 두 팔 벌려 안는 것. 반기고 또 반기는 것.
그렇게 무한한 것. 세상 모든 경계를 허무는 방법.
아무리 삐딱한 선도 조금씩 조금씩 구부려서 전부 연결하는 공식.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주문.
오랜 두려움의 해법. 고통받는 영혼이 이미 가진 열쇠.
“대훤아.”
지수가 두 시간 가까이 지켜온 침묵을 깨뜨리고 말했다.
“미안한데, 나 아직은 좀…….”
지수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혼자 괜히 부담을 느낀 모양이었다. 사고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했다.
내 가련한 김지수. 불쌍한 우리 지수.
서늘한 품 깊숙이 파고들었다.
“너구리는 아침에 끓여줄게…….”
지수가 몽롱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대답 대신 지수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난 뭘 무서워했을까. 잔인한 사고 후유증 때문에 아직도 심신이 고단할 지수를 다 지난 일로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조금 전의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연한 흉이 남은 왼손을 머뭇머뭇 옮겼다. 그리고 지수가 다친 오른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헌 흉터와 새 상처가 닿았다.
다칠 거면 차라리 나처럼 왼손을 다치든가. 한동안 못 쓸 텐데 오른손이면 더 불편하잖아, 바보야.
너와 난 똑같다. 하나도 다르지 않다. 누가 더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다.
우린 인간이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맛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게 다 우리와 이 순간을 위한 거였다.
싸구려 펜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 한 자락도, 선선한 새벽 온도와 조금 눅눅한 이불도, 오는 길에 스친 도로의 나무 한 그루마저도 사랑하는 연인인 너와 나 때문에 있는 우주 만물이었다.
우리한테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전혀 새로운 여덟 번째 감각이 필요했다. 우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겪을 만큼 겪었으니 다음 수준에 오를 차례였다.
그렇지, 지수야?
우리가 이다음에 초월할 것은 뭘까. 우린 또 어떤 여정을 같이하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게 될까.
너와 함께라면 뭐든 좋아. 볕이 되자. 무지개가 되자. 바람이 되자. 비가 되어 내리자. 낙엽이 되어 지자. 천둥이 되어 울리자. 시냇물이 되어 흐르자. 무덤이 되자. 그리고 다시 싹을 틔우자. 눈물이 되자. 웃음소리가 되자.
지수와 난 새벽 속에서 무궁히 함께했다. 그것은 우리 새벽이 덧없이 짧고 유한한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