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변대훤(13) (36/41)

3. 변대훤(13)

얼마 만에 함께하는 샤워일까. 체온과 같은 온도의 수돗물이 몸과 마음을 어루만졌다.

지수와 난 따듯한 물줄기를 맞으면서 서로를 껴안았다. 서로의 피부를 만지고 서로를 가엾게 여기듯 보듬고 쓰다듬었다.

거기엔 애정보다 위대한 마음이 있었다.

측은지심일까. 이해와 공감일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처럼 다르지 않은 전체이자 반쪽이란 거였다.

구태여 입씨름할 필요도,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도, 적당한 말을 건넬 필요도 없이 합일을 이룬 순간이었다. 느낌은 앎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분명한 프로세스였다.

날 그냥 안아줘. 내가 널 그냥 안아버리듯이.

네가 내 맘에 상처를 낸 건 증명할 길 없는 허상이다. 네가 내 몸에 상처를 낸 것 또한 진리가 아니라 다만 가설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끔찍한 사건은 참이 아니라 단지 착각에 불과하다. 아니라면 지난 시간을 누가 무슨 수로 증명할 텐가?

전자 코드로 된 사진이나 동영상 파일 몇 개로? 비천한 금속 기계 안 메시지 몇 통으로?

피부 아래 잉크 몇 방울로? 하잘것없는 의식 속 흐릿한 이미지 몇 조각으로?

삶의 순간순간은 너무 쉽게 휘발하는 탓에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의심케 한다. 그런데 고작 안 좋은 기억의 편린 때문에 무엇이든 포기해야 할 까닭이 없다.

유일하게 진실로 믿을 수 있는 건 이 감정. 따듯한 마음.

슬픈 세상에서 서로를 외롭지 않게 덥히고 어둡지 않게 밝히는 너와 내 광명.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이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서.

뉘우칠 길 없는 잘못을 뉘우치는 우리야말로 무고한 연인. 사랑할 수 없는 널 사랑하는 내 사랑만이 마침내 진실한 사랑.

우리가 없다면 우주도 없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없다.

오직 있는 건 널 향한 사랑. 끊임없이 모습을 바꿀 뿐 사라지지 않는 생명처럼, 빛처럼, 물처럼, 이 순간 영원한 사랑의 기분.

불은 물이 되고 얼음은 숯이 되듯이 그저 끝없이 되풀이하는 너와 내 사랑. 그래서 즐거운 우리.

즐거워해도 되는 김지수와 변대훤. 너와 난 그렇게 즐거우려고 태어난 한 쌍.

크고 작은 잘못을 너무나 많이 저질러왔기 때문에 죄가 없는 우리는 이제까지와 다름없이 사랑해도 괜찮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완전한 우리니까.

사랑해.

지수가 마음으로 말했다. 텔레파시는 8년 차 커플의 특권이었다.

아니,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처음과 끝을 이미 인쇄해놓은 책을 읽듯 순간순간 페이지를 넘길 뿐, 모든 것은 완벽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건 우릴 위해 준비된 이야기. 너와 내 무의식이 자유의지로써 지은 소설의 내용을 너와 내 의식은 까맣게 잊은 채 운명이란 길을 따라 두근두근 밟아나간다.

우리가 우리에게 선물한 이야기의 끝은 뭘까. 기대되지 않니.

지수를 꽉 끌어안았다.

우리 몸을 적시는 물처럼, 우리 몸속을 채우고 흐르는 바로 그 물처럼, 우리 사랑은 땅 밑 가장 추운 곳까지 스며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물처럼, 있는 줄 모르는 어둠처럼 우리 곁에 머물다가 힘들고 지칠 때 촛불이 되어 나타난다.

고요하자. 적적하자. 어둡고 축축하자.

난 인제 불같은 그 애처럼 널 타오르게 하지 못하지만, 대신 물처럼 언제나 모든 곳에 있을게. 얼음처럼 얼어도, 안개처럼 흩어져도 절대 사라지지 않고 늘 있을게.

다신 널 집어삼켰던 한강이나 세찬 비바람처럼 몰아치지 않을게. 너란 나무가 뿌리 내릴 수 있게 필요한 만큼만 날 줄게.

이 세상엔 너와 나. 우주에 오직 나와 너.

우리 단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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