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변대훤(11) (34/41)

3. 변대훤(11)

펜션이 외졌다. 좀 촌스럽지만 아담하고 정다운 맛이 있는 곳이었다.

가랑비가 새로 내렸다. 지수는 ‘그날’의 사고 이후 물을 싫어하게 된 터라 우린 풀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물놀이할 기분은 아니었다.

지수는 영문 모르게 꺼져버린 숯불을 피우느라고 열심이었다. 사람을 부르면 되지 자기가 하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지수가 낑낑대는 동안 장 본 것을 정리하고 푸성귀를 씻었다. 상차림을 마칠 때까지도 지수는 불을 붙이지 못했다.

“내가 할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할 테니까.”

네가 못하니까 말이지.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상하다. 나 불 잘 붙이는데.”

네가 불장난에 일가견이 있기는 하지. 역시 속으로만 생각했다.

“내가 해볼게.”

이러다간 저녁을 굶을 것 같았다. 지수가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소주에 맥주를 말았다.

불은 금세 붙었다. 불붙인 김에 고기까지 구웠다.

“허허. 야, 대박 맛있어. 오늘 여기 오길 잘했네. 대훤아, 너 고깃집 차려도 되겠다. 그만 굽고 인제 와서 좀 먹지?”

“어. 이거만 마저 굽고.”

지수가 좋아하는 양송이까지 구워서 테이블에 올리고 자리에 앉자 어느덧 어둑어둑했다. 비가 푸슬푸슬 내리는 외딴곳 풍경이 스산했다.

지수가 반기듯 내 잔을 챙기고 자기 잔을 잽싸게 부딪쳤다. 그리고 내가 목을 축이자마자 상추쌈을 커다랗게 싸서 들이밀었다.

“내가 먹어도 되는데…….”

“이런 데 와서 내가 싸주면 그냥 ‘아’ 하는 거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고마우면서 좀 당혹스럽고, 좋긴 한데 어쩐지 미안했다.

어린 남자는 지수의 친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지. 무뎌질 만큼 익숙하겠지.

어린 남자가 부럽고 미웠다.

“옛날 생각난다. 그렇지?”

지수가 잔을 또 한 번 가볍게 내밀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잔에 손이 갔다.

지수가 간단히 건배하고 노란 액체를 꿀꺽꿀꺽 넘겼다. 그 모습을 보자 옆구리가 괜스레 찌릿찌릿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한테 미안한 짓 많이 했지.”

지수가 다리를 떨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무슨 미안한 짓.”

국산 맥주잔을 깨끗이 비우고 물었다.

“어?”

“나한테 미안한 짓 많이 했다며. 뭐가 미안한데.”

지수가 잘생긴 눈으로 날 빤히 보면서 연기를 깊게 빨았다. 그러나 난 지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 왼쪽 손바닥 흉터. 그거 내가 만들었잖아.”

문득 내 왼쪽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흉은 인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간 잊고 살았는데.

담뱃불이 닿던 순간의 작열통을 떠올리자 목덜미가 뜨끈하게 달았다. 지수는 그때처럼 담배를 태우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날 치기 어린 애증의 흔적마저 사랑의 추억이 된 지 오래지만, 그래도 그때를 불러일으키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미안하다.”

“……!”

진짜 지수의 목소리였다.

지수는 이제껏 내 손에 화상을 입힌 데 대해서 한 번도 사과한 적 없었다. 나 또한 지수가 사과하길 기대한 적 없었다.

그래서 사과를 바라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지수의 한마디를 듣자마자 지난 시간이 아프게 사르르 녹았다.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심하게 굴었어.

“……뭐, 무릎도.”

화장실에서 기거한 기억 또한 깜빡하고 지냈다.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괜스레 오른무릎을 옷 위로 만졌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거뭇거뭇한 무릎을 갖게 되었구나.

“너 놔두고, 딴짓하고……. 속 썩인 것도 미안하다. 근데 철들었다. 우리 인제 그럴 나이 아니잖아.”

“…….”

“나 너랑 여태 어떻게 어떻게 만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잘 만나려고 오늘 여기 오자 그랬다. 오랜만에 이렇게 앉아서 얘기도 좀 하고, 서로 속상한 거 있으면 욕 한 사발 하고 풀고, 정리할 거 다 정리해서 내일 기분 좋게 들어가자. 변대훤. 알았지?”

“여긴 누구랑 왔었어?”

“어?”

“솔직하게 다 말해봐. 서로 풀 거 풀고 정리하자며.”

“……진짜로? 너 자신 있어? 중간에 딴말하기 없다.”

지수의 입에서 나온 건 내가 상상도 못 한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너무 오래돼서, 또 너무 짧게 알아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은, 어릴 적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잠깐 같이 일했던 동생이었다.

“걔랑? 언제……?”

“꽤 됐어. 작년인가, 마지막으로 봤을걸.”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스무 살 초반에 스쳐서 기억도 잘 안 나는 누군가를 네가 작년까지 여기서 만났다고?

정수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그니까 이런 얘길 뭐 하러 해. 재미없잖아.”

“그 친구랑……. 여기서 뭐 했어?”

“뭘 뭐 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속속들이 다 알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못 물어볼 건 뭔가.

지수가 우물쭈물 답했다.

“똑같지 뭐. 물놀이 좀 하다가……. 고기 구워 먹고…….”

“무슨 물놀이. 저기 저 수영장에서?”

“어.”

“저기서 물놀이 어떻게 했는데?”

“그냥 했지 뭘 어떻게 해.”

“네가 걔 물에 빠뜨렸어? 걔가 빠뜨렸어? 물속에서 둘이 껴안았어?”

“…….”

이런 질문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지수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고기는 누가 구웠어?”

“내가.”

“네가 고기 구울 동안 걘 뭐 했어?”

“밥했어.”

“무슨 밥?”

“그냥 햇반 덥히고……. 찌개 끓이고.”

“무슨 찌개?”

“김치찌개. 아, 걘 순두분가?”

“맛있었어?”

“별로.”

“맛없었어?”

“그냥 그랬어.”

“밥 먹고 나서 뭐 했어?”

“밥 먹고 잤지, 뭘 뭐 해.”

“섹스했어?”

김지수라면 당연히 했을 줄 알면서 물었다. 지수가 질린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 나빠야 하는 건 난데. 왜 지수 네가 불쾌한 표정을 짓지?

“어떻게 섹스했어? 네가 덮쳤어? 아니면 걔가 너한테 먼저 달려들었어?”

“걔가.”

“걔가 너한테 뭐부터 했는데? 손잡기? 기대기? 키스? 포옹?”

“키스.”

“사랑스럽게 키스했어? 아니면 시끄러운 소리 내면서 추잡하게 했어?”

“다 했겠지.”

“그러고 섹스했어? 맨 처음 할 땐 앞으로 했어? 나랑 처음 했을 때처럼 겨드랑이 밑으로 끌어안고 키스하면서 했어?”

“…….”

“콘돔 끼고 했어, 그냥 했어? 집 가기 전까지 총 몇 번 했어? 걘 갈 때 무슨 표정 지어? 넌 걔랑 할 때 무슨 표정 지었어?”

“…….”

“살살 부드럽게 박았어? 아니면 거칠게 박았어?”

“…….”

“걔 구멍은 어떻게 생겼어? 걔 것도 내 것처럼 주먹 쑤셔서 다 벌려놨어? 아니지? 걘 어딜 어떻게 해주는 걸 좋아해? 넌 걔랑 할 때 뭐가 제일 좋았어? 너 근데 걔랑 왜 했어?”

“…….”

“걔 그냥 평범하잖아. 아니면 너 나처럼 평범한 애가 취향이야? 근데 탑기는 안 평범하잖아. 그냥 대주면 누구든 상관없나?”

“…….”

“나랑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애라서 걔랑 했어? 그럼 더 흥분돼?”

“…….”

“내가 거기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을 때 걔랑 처음 했어? 아니면 나 관두고 나서 했어?”

“…….”

“왜 대답을 안 해, 지수야?”

“너 거기 다닐 때 처음 했어.”

“왜?”

“……걔가 들이댔어.”

“아아. 그러면 걔 탓이네?”

“…….”

“걔랑 할 때 내 생각 안 났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데.”

“그냥 솔직한 대답.”

“안 났어, 네 생각.”

“…….”

“그러고 있는데 네 생각을 왜 해. 그게 더 개새끼 아니야?”

“그래? 여긴 그럼 걔랑만 왔어?”

“아니.”

“또 누구랑 왔어?”

지수가 뜸 들인 끝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지수의 입이 시간을 한참 들여 수많은 이름을 줄줄 뱉었다.

개중엔 내가 아는 이름도 있고 모르는 이름도 있었다. 이 거지 같은 펜션에 지수와 함께 다녀간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근데 지수는 그것도 이름이 기억나는 사람만 따진 수라고 했다.

“넌……. 이 펜션만 와……?”

“아니.”

김지수는 이어서 전국 팔도 방방곡곡에 있는 별의별 펜션에 관해 이야기했다. 역시 기억나는 곳만 추린 듯했다.

“넌 모텔은 안 가?”

“씨팔, 모텔 이름을 어떻게 외워. 허.”

지수는 그 말을 하면서 어이없고 우습다는 양 피식거렸다.

“왜 나랑은 안 하고……. 나랑만 안 하고 딴 사람이랑은 그렇게 많이 했어?”

“그냥.”

“나랑 하기 싫었어?”

“아니.”

“나랑 헤어지고 싶었어?”

“아니.”

지수가 낯을 확 찌푸렸다. 마치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근데 왜? 왜 나랑은 안 했는데?”

“아! 미안해!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는 말 들으려는 거 아닌데. 궁금해서 묻는 건데.”

지수가 한숨을 낮게 쉬고 술을 넘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문하는 내 쪽에서 한숨지어야 맞는 것 같은데. 삶이란 알쏭달쏭했다.

“진짜 솔직하게 말해? 변대훤 너 화 안 낼 자신 있어?”

화는 내가 아니라 김지수가 이미 내고 있었다. 지수가 표정을 가라앉힌 채 짤막한 꽁초를 길게 빨고 오래 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딴 건 네가 근데 알아서 뭐 하게. 왜 물어보는데.”

“네가 말하면 나도 말할게.”

“뭐……?”

지수가 얼굴 근육을 차갑게 굳혔다. 8년을 만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김지수한테 저런 귀여운 얼굴도 있었군.

“싫으면 관둬.”

“네가 뭘 말해. 네가 말할 게 있어?”

지수의 눈에 검은 불길이 일었다. 그 눈동자를 보자 어쩐지 땅에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궁금하면 너도 내가 궁금해하는 거 다 대답해.”

“뭐. 뭐가 아직도 그렇게 궁금한데.”

“왜 바람피웠어?”

지수가 뺨을 찌그러뜨리고 날 노려보았다. 심장이 꾹 죄었다.

굴하지 않고 물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랑, 그것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랑, 나랑 만나고 있는 와중에, 왜 그랬어? 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 게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내가 싫으면 나랑 헤어지고 딴 애 만나면 되는 거 아니야? 근데 왜? 왜 그랬어?”

지수는 잠시간 날 말없이 지켜보았다. 지수의 눈빛이 복잡해서 감정을 알기 어려웠다.

한심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언뜻 동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아까처럼 경멸하는 시선이 나았다.

“착각하지 마, 변대훤.”

“무슨 착각.”

“네가 뭘 어째서 내가 널 놔두고 바람을 피운 게 아니야.”

“그럼?”

“너랑 상관없어. 걔네 만날 때 네 생각 안 나. 네가 어디가 모자라서 내가 걔넬 만난 게 아니라고. 걔넨 걔네대로고 넌 너대로고 따로따로라고. 네가 나한테 아무리 잘하고 존나게 섹시하고 떡도 기가 막히게 쳐줬다 그래도 똑같아. 뭔 말인지 알아들어?”

“…….”

“너랑 아―무 상관 없다고. 너 때문 아니라고.”

그게 더 절망스럽단 걸 왜 몰라. 그게 더 잔인하다는 걸 왜 알지 못하느냔 말이야.

고개 숙인 채 있다가 말했다.

“하긴. 나도 너랑 상관없긴 했어.”

지수가 손을 부서뜨릴 듯 세게 주먹 쥐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차근차근 말했다.

“난 그런 거에 내가 마음이 흔들릴 줄 몰랐어. ‘그 사람’ 만나고 처음 알았어. 부드럽고 자상하게, 나한테 진심인 것처럼, 진짜 나 좋아하는 것처럼……. 그 사람이 나보고 좋아한다고 했거든.”

“누가.”

“아는 동생.”

“…….”

“그전까진 네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멋진 친구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하니까……. 솔직히 좀 떨리더라. 그 순간엔 나도 네 생각 같은 거 하나도 안 났어.”

“…….”

“그래서 지수야, 나도 네 말 이해해.”

“…….”

“그니까 내가 이해 못 하거나 상처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돌려 말할 필요 없어. 서로 다 터놓자며.”

“킥.”

지수의 표정이 살벌했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왜? 싫어? 하지 마? 그만해?”

“아니. 해. 너 나랑 오늘 한번 갈 데까지 가보자.”

지수가 담배를 끄자마자 새 담배를 꼬나물고 물었다.

“대훤아. 그래서 그 새끼가 누군데. 내가 아는 새끼야?”

“어.”

“……너 설마 그 새끼랑 했냐?”

“뭘?”

“섞었냐고. 그 씨팔 좆같은 새끼랑 떡 졸라게 쳤냐고.”

“그 사람이 나한테 넣었냐고? 아니면 내가?”

“…….”

지수가 더럽다는 듯 실망스러운 눈길로 날 훑었다.

“어. 했어.”

“…….”

“아닌가?”

“…….”

“좀 애매하긴 한데, 했다고 하는 게 맞을 거 같아.”

지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러다 불현듯 대단한 걸 생각해낸 양 물었다.

“그 새끼가 너한테 병 옮긴 그 새끼냐?”

“그럴걸? 근데 아닐 수도 있어.”

“그 새끼 말고 또 있어?”

“아니.”

“그러면 그 새끼네. 넌 너한테 병 옮긴 새끼한테 열도 안 받냐? 누군데. 말해. 아! 누구야!”

“왜?”

“왜는 왜야. 감히 허락도 없이 내 거에 더러운 거 몰래 넣고 쌌으면 씨―팔놈 가서 죽여놔야지.”

네 수많은 상대가 나한테 허락받고 너와 뒹군 건 아니었는데. 멍하니 입술과 혀를 움직였다.

“안 쌌어.”

“무슨, 뭐?”

“그 사람. 나한테 넣기만 하고 싸진 않았어.”

“너 지금 뭔 개소리하냐? 너 나랑 장난치냐?”

“내가 너 버리고 자기한테 오면, 내가 그 사람 좋아하게 돼서 그 사람 마음 받아주면 그때 쌀 거래. 그전까진 아무한테도 안 쌀 거래. 같이 뉴질랜드 가서 결혼하재.”

“미친 변태 같은 사기꾼 새끼.”

지수가 애써 웃음 지었다.

“근데 자꾸 생각나. 날 좋아한다는 그 사람 말이 진심인 건 아닐까, 그 사람이랑 만나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끔 그런 생각 들어.”

“그래서.”

“그래서 고민돼. 만약 그 사람이랑 만나게 되면 너처럼 나도 너랑은 그냥 이대로 똑같이 지내면서 그 사람은 너랑 별개로 생각하고 만나야 되나? 이해해주겠지? 그 사람이라면 이해해줄 거 같은데. 그 사람한테 한번 연락해볼까?”

“그딴 걸 이해해줄 새끼가 세상천지에 어딨……. 후. 일어나.”

김지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위압하듯 내 앞까지 성큼성큼 닥쳐왔다.

“일어서서 네 폰에 당장 그 새끼 번호 찍고 전화 걸어. 안 받으면 내가 너 여기서 죽인다고 전해.”

“넌,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 날……. 죽이고 싶어?”

“그 새끼 번호 찍으라고 두 번 말했다.”

“그럼 난 널 몇 번이나 죽였어야 돼?”

“…….”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딴 사람 좀 만나라며. 만날 사람이 그렇게 없냐며. 어지간하고 대단하다며.”

“…….”

“난……. 온몸이 지우러 갈 수도 없는 문신투성이인데……. 옷 입고 있어도 남한테 보일까 봐 조마조마해. 이렇게 평생 살아야 되는데, 나한테 그냥 다 없애고 싶은 기억밖에 없는데 입도 벙긋하지 마?”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네 몸에 문신 생긴 게 나 때문이야? 어?”

“이거 봐. 난 무슨 말도 하지 마? 누가 너 때문이래?”

“…….”

“가슴에, 뭐가 막, 잔뜩 쌓여있단 말이야. 숨이 안 쉬어져. 흐읏…….”

“…….”

“뭐라도 좀 털어놓고 싶고 네 대답 듣고 싶은데 그럼 어떡해. 가만있다 갑자기 죽을 만큼 무서운데.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면 숨 막혀서 살 수가 없는데.”

“…….”

“나도 미안한데, 진짜 미안한데 미쳐버릴 거 같아서 그래……. 아직도 내가 왜 그래야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

“다 너 때문은 아니지만, 너 때문이 아닌 것도 아니잖……. 읏!”

지수가 내 목덜미를 끄잡아 일으켰다. 참혹한 기억보다 더 날 질리게 하는 건, 무엇도 조금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김지수의 거짓된 태도였다.

지수는 날 풀장까지 끌어다가 빠뜨릴 듯 아슬아슬한 모서리에 세웠다.

“흐웃…….”

풀장에 빠지는 것쯤이야 좀 귀찮을 뿐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나 물을 무서워하게 된 지수에게는 나름 거대한 위협인 듯했다.

지수는 언제나 그랬다. 내 맘이 제 맘 같은 줄 알았다.

지수가 남은 손으로 내 주머니를 뒤져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 새끼한테 전화 걸어라. 아니면 너, 그 새끼 찾을 때까지 내가 한 명 한 명 다 전화 걸어? 그걸 원해?”

내가 원하는 것. 그게 뭔지 사실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널 괴롭히고 싶은 걸까. 네가 한없이 미안해하다가 내 앞에서 비참하게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걸까.

아닌데. 그냥 내가 느꼈던 감정을 지금의 너도 똑같이 느낀다면, 비로소 내 마음을 이해했다면, 네 솔직한 심정을 터뜨리고 나한테 나눠주길 바랄 뿐인데.

그렇게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건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미안해.”

“…….”

“미안해, 지수야. 윽, 흣……. 흐욱.”

괜한 말로 널 건드려서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

네 진실한 고백을 바라면서 정작 난 진실한 방법으로 너와 대화하려고 하지 않아서 미안. 인제 너한테 설명이나 변명 같은 노력조차 하기 귀찮고 지치는 나라서 미안해.

어쩌면 널 이런 지저분한 방식으로 떨쳐버리고 싶으면서 절대 직설하지 않고 나 자신조차 속이는 비겁자라면 미안해.

떠올려선 안 되는 그 애가 머릿속에 자꾸 떠올라서 미안. 나도 왜 갑자기 그 애가 생각났는지 모르겠어.

아니, 계속 생각하는 중인가?

“내가 미안하다고, 김지수.”

날 내려다보는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딱했다. 하반신이 박살 나고 민물 아메바에 감염된 채 병상에 누워서 날 붙잡고 빌 때보다 훨씬 더 괴로워 보였다.

그렇다면 그만큼이나 가혹한 짓을 내게 왜 했지?

희한했다. 내가 이해하고 용서했던 지수의 모든 잘못이 지금에 오자 이해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는 줄 알았던 일들이 알고 보니 그럴 수 없는 일들이었다.

난 한결같이 나쁜 사람이었다. 네가 한창 바람피울 적엔 무작정 덮어놓고 한마디 하지 않은 주제에 면역 없는 네게 내 상처를 되돌려주려고 했으니 어떻게 내 잘못이 더 크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내가 붙잡고 있는 단 한 가지 희망은…….

찾았다. 내가 원하는 것.

거짓이어도 좋은, 영원의 약속.

사과면 되는 줄 알았어. 끔찍한 사고 정도면 마음이 풀릴 줄 알았어.

근데 아니야. 심보 고약한 난 그걸로 부족해.

불친절한 진실보다 안심되는 거짓의 한마디면 만족할게. 너나 나나 세상 사람의 반인 피노키오 가운데 두 영혼일 뿐이잖아. 피차 코가 길쭉한 목각 인형 신세인데 내게 거짓말을 해주지 못할 까닭이 없잖아.

몸이 뒤로 기울었다.

풍덩!

꾸루룩. 차갑고 푸근한 물이 온몸을 감쌌다.

풀장 바닥 가까이 가라앉은 순간 느낀 감정은 평온과 자유였다. 지수의 목소리가 제대로 닿지 않는 액체 속에서 비로소 쉴 수 있었다.

죽음이 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조금은 죽음과 친해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흡?

다급한 손이 날 낚아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얼굴을 찌푸리고 물거품을 뿌글뿌글 뱉었다.

누구지. 김지수?

지수는 물을 무서워하는데. 설마 탑기인 건 아닐까?

날 좋아하는 탑기가 지수와 나 단둘이서 여행을 온 걸 알고 화가 나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 아닐까? 지수를 벙찌게 하고 바보 같은 날 이 으스스한 펜션에서 구해주려고?

두 미남이 날 두고 쟁탈전을 벌이겠지? 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척 탑기와 함께 사라져야 하나?

그럼 지수 네가 날 조금 더 소중하게 생각해줄까?

‘누군가의 손’은 날 더욱더 세게 그러쥘 뿐이었다. 물 위로 끌어 올려줄 마음은 없는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야트막한 풀장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마찬가지로 야트막한 풀장에 뛰어든 주제에 두 발도 제대로 못 딛고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리는 8년 지기 녀석이 보였다.

“어픕, 어픗! 커흑……. 꿱. 꾸륵? 쿠루룹……!”

지수가 코앞의 나조차 올려다보지 못하고 수영장 물을 다 마셔서 없앨 기세로 쿨럭댔다. 물을 그렇게 무서워하게 됐으면서 뛰어들긴 왜 뛰어들어.

제 딴엔 날 구하려고 그랬겠지.

잘생긴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만큼 불쌍한 생쥐 꼴을 한 지수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허우적대는 지수를 허리에 두르고 일으켰다.

“어헉, 어허헉! 흐억…….”

지수는 내 품에 붙어서 물 밖으로 나오고 나서도 진정하지 못하고 엎드려 물을 토했다. 내 옷깃을 움켜쥔 채 웅크려서 발작을 참듯 파들파들 떨었다.

“지수야, 괜찮아?”

낯빛이 새파랬다. 지수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심장을 부여잡았다.

어떡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수의 머리를 무작정 가슴에 끌어안았다.

청동빛 팔이 기다렸다는 듯 내 허리를 감았다. 지수가 가쁘게 쌕쌕 뱉는 숨을 명치로 느낄 수 있었다.

젖은 채 눈을 꼭 감고 내게 안겨 떠는 모습이 예쁘고 애처로웠다. 어릴 적 그 언제 같았다.

그러고 보면 지수 넌 이미 나한테 갚을 수 없이 큰 선물을 줬구나. 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통째로 내게 안겼구나.

나 아닌 누구도 네 그 시절을 나만큼 알지 못하겠지. 영원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