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변대훤(9)
지수는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그건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수는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그리고 재활치료를 하면서 차차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지수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어쩌면 지수한테 진 빚을 청산하고자 하는 마음에 지극정성으로 곁에서 돌본 내 공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그보다 놀라운 기적은 지수가 그때 그 시절처럼 귀엽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거였다. 아니, 그때보다 한 뼘 더 자라서 성숙하고 조금은 어질기까지 한 남자로 성장해있었다.
지수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만 지수 곁에 있겠다는 내 다짐은 어느 순간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해맑은 지수와 아파트에 함께 돌아왔다.
탑기는 없었다. 원래 세상에 없었던 사람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았다.
탑기와의 지난 기억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리송했다. 옷을 벗어서 문신이 드러날 때나 핸드폰 카메라를 다리 사이에 디밀고 카레빵맨 입술같이 쭈글쭈글한 항문을 확인하는 순간에야 탑기가 실존했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탑기가 내 얼굴을 가리지 않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유포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증은 예전만큼 자주 날 넘어뜨리지 못했다. 도가 지나치게 괴로운 생각은 오히려 날 낙관적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에이, 설마. 그러진 않겠지. 탑기가 그렇게까지 나쁜 앤 아니잖아. 날 좋아한다고까지 했는걸.
그렇게 되뇌다 보면 만성적 불안이 씻은 듯 날아가서 오래 힘들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때처럼 쌓이곤 했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모든 건 마음에 달려있었다.
“대훤아, 뭐 해.”
지수는 나와 한집에 있으면서도 날 찾는 때가 잦았다. 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초조한 듯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려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심지어 화장실 문을 두드려대기까지 했다.
내가 눈에 띌 때마다 지겹고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쉬고 시선을 돌려버리던 때와 딴판이었다.
너와 내가 언제 이렇게 변한 걸까. 그간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다 겪어낸 데 대한 삶의 선물은 아닐까.
거실로 나오자 지수가 소파에 앉아서 쿠션을 끌어안은 채 날 향해 손을 뻗었다.
“일로 와 앉아. 내 옆에 있어.”
“……어.”
마지못해 지수 옆에 앉자 지수가 쿠션을 내팽개치고 히죽히죽 웃다가 내 무릎을 벴다. 내 웃옷을 들치고 그 사이로 얼굴을 감추거나 날 빤히 올려다보는 장난을 쳤다.
예전의 나라면 금세 얼굴을 붉힌 채 좋아서 어쩔 줄 몰랐겠지만, 지금은 그저 잠잠했다.
난 정말 지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걸까.
우린 무슨 사이일까. 언젠가 지수 말마따나 우리가 무슨 사이든 상관없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해도 관계없이, 우린 떨어지지 못하고 그냥 이렇게 평생 같이 붙어살아야 하는 운명인가.
지수를 향한 사랑이 영원할 것으로 굳게 믿었는데. 확신이 있었는데.
내 그 많던 사랑이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도 나 자신을 알 수 없었다. 지수를 예전처럼 대해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지수는 굴하지 않았다. 내 미지근한 반응에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듯 씩씩하게 말을 붙이고 우리 사이 차갑고 어색한 공기를 깨뜨리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하지만 부쩍 살가워진 지수와 내가 전과 같은 애인 사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미안하면 미안할수록 사랑은 줄어들고 미움이 자라난다는 것을.
지수야. 그래서 넌 날 미워했던 거구나.
“쟤 너 닮았어.”
“…….”
지수가 티브이 속 개그맨을 가리켜 말했다.
“너 옛날에 병철이 알지. 걔가 너 쟤 닮았다 그랬잖아. 기억나? 근데 진짜 좀 닮은 거 같긴 하다. 그렇지?”
“아.”
그렇구나.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너 걔랑도 닮았어. 왜, 요새 드라마 나오는 걔 안 있냐. 사위 역할.”
지수는 날 닮았다는 연예인을 줄줄 늘어놓았다. 지난날에 지겹게 들었던 예명 여럿이었다.
지겨운 레퍼토리를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해도 지수와 함께면 마치 처음 하는 얘기처럼 매번 새롭고 재밌었는데. 아직 무리하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집에서 티브이만 보는 지수가 어쩐지 더 멋없어 보였다.
지수가 제발 밖으로 좀 나돌지 말고 지금처럼 집에 콕 박혀서 내 옆에 앉아 같이 티브이를 보면서 깔깔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바라던 때가 있었는데.
난 간사한 인간인가. 인간쓰레기인가.
“변대훤.”
“어?”
“무슨 생각 해?”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너 근데 살 좀 빠진 거 같다?”
“그래?”
“살 빼지 마. 잘생겨지면 안 돼. 너 바람나면 나 운다.”
네가 바람날 때마다 내가 많이 울긴 했지. 수백 수천 번 울어서 바다를 만들뻔했지.
그런 슬픔을 겪게 할 순 없지. 누구도 그런 아픔을 겪어서는 안 되지.
“대훤아. 짜장면 먹고 싶지 않냐.”
“별로…….”
“왜. 쟤네 짜장면 먹는 거 보니까 갑자기 확 당기는데. 너 배 안 고파?”
“아직.”
지수는 집에 있으면서 온종일 배고프니 밥 먹자는 소리밖에 안 했다. 그게 가장 날 힘들게 했다.
“우리 옛날에 동묘에서 짜장면 먹었던 거 생각나냐.”
“어.”
“동대문에서 김치볶음밥 먹고 남대문에서 갈치조림 먹은 것도 기억나냐.”
“어.”
전부 맛없었다.
“그래도 난 을지로에서 너랑 맥주 마셨던 게 젤 많이 생각나더라.”
“아.”
“그때 너 좋아 죽으려 했잖아. 술 취해서 웃다가 의자랑 같이 넘어가서 길바닥에 무릎 갈았던 거 기억나?”
“어.”
당연히 기억났다. 우리 추억 가운데 이야기할만한 건 초반 삼사 년에 몰려있고, 입 아프게 몇 번씩이나 다 얘기했으니까.
지수 입에서 나오는 우리 옛 추억 중에 내가 모르는 건 없었다. 나만 알고 지수는 기억 못 하는 건 많겠지만.
원래는 지수가 지금처럼 나랑 옛이야기를 나눠준다면 아껴둔 초콜릿처럼 하나하나 맛있게 꺼내주고 싶었다. 근데 인제 피곤했다.
내 안에 소중하게 묻어놓은 우리 비밀 추억을 네게 일일이 설명하고, 놀라는 네 반응을 신나서 받아주고, 함께 추억에 폭 젖어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즐기는 일련의 과정이, 솔직히, 너무나 귀찮았다.
전처럼 가슴 뛰지 않았다. 재미없었다.
한순간 나이 든 기분이었다. 아니, 벌써 죽어버린 듯했다.
“그때 너 엄청 좋아했잖아.”
“어.”
“뭐가 ‘어’야. 너 내가 지금 뭔 말 하는지 알아?”
“어?”
“네가 뭘 그렇게 좋아했는데.”
“내가 그날 전부터 을지로 만선 되게 좋다고 너랑 같이 가고 싶다고 졸라서 갔는데 사실은 한 번도 와본 적 없다고, 되게 오고 싶었는데 나랑 와줘서 고맙다고 고백하자마자 맥주 원샷하고 취해서 네 앞에서 처음으로 주사 부렸던 날이잖아. 네가 다른 사람 취한 모습 보면 짜증 나서 원래 그냥 버리고 가는데 이상하게 난 못 버리고 가겠더라고, 그래서 나 진짜 좋아하는 줄 알았다며. 알아. 다 한 얘기잖아.”
아뿔싸. 신경질 내듯 쏘아붙이고 말았다.
그런데 지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양 말했다.
“와, 그걸 정확하게 다 기억하네. 감동이다, 변대훤. 너만 한 앤 내 평생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거다.”
“…….”
“갑자기 짬뽕이 당기네. 우리 전에 그 너 다니던 학교 근처 중국집 갈까? 너 거기 좋아했잖아. 인어루! 아직 있나?”
“모르겠어.”
“짬뽕 싫어? 변대훤, 나 봐봐. 갔다 오자. 너 고기 튀김이랑 셀러리 만두 좋아하잖아. 짬뽕 싫으면 고기 튀김 먹어.”
“먹고 싶으면 갔다 올래? 식탁에 차 키 있어.”
“아아아. 나 혼자 가서 먹으면 뭔 맛이야. 같이 가야 재미지. 가서 오랜만에 너 학교 다닐 때 생각도 하고, 비도 오는데 낭만 있게 원탁 돌리면서 기분 전환도 좀 하고. 좋잖아.”
“…….”
“내가 운전할게. 밥 먹고 호수공원 가서 커피 한 잔씩 때리고 오자. 어때. 콜?”
“나 진짜 생각 없어.”
넌 집에서 나만 기다리니까 심심하고 출출하겠지만, 난 아르바이트하고 온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지수를 병간호하느라 계약기간도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요새는 아쉬운 대로 몇몇 지역 어르신과 탈북자나 동유럽ㆍ중앙아시아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상대로 아코디언을 가르치러 다니는 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장이나 산까지 반주하러 다녔다. 그래도 병원비와 생활비를 메우기 쉽지 않았다.
금고만은 끝까지 남겨두고 싶어서 무리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든 게 다 의미 없어진 지금에도 한때 우리 사랑의 보물창고였던 은빛 금고가 아깝고 딱했다.
부질없는 집착이었다. 그래도 번쩍번쩍 눈부시게 빛나는 금덩이와 은 덩어리를 보자면 차마 써버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매일매일 이곳저곳 다니려니 피곤하고 지쳤다. 나도 지수를 냉대하는 내가 낯설고 버거웠다.
지금이 돼서야 지수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권태에 물들기 시작할 무렵의 지수가 왜 그렇게 차갑고 잔인했는지, 그 마음을 알다 못해 절절히 공감하고 남을 지경이었다.
“변대훤 너 그럼 딴 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너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자.”
“……나 그냥 이따 남은 밥이나 대충 먹고 치울래.”
“그러면 장 보러 갈까?”
“장?”
“어. 장 봐와서 내가 해줄게. 집에서 해 먹자.”
어차피 장 볼 때가 되긴 했다. 지수가 내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듯 얼굴을 활짝 폈다.
“콜! 가자, 변대훤. 일어나, 옷 입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