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변대훤(4)
“저, 지수 주인님? 식사하세요♡”
“하……. 허흣! 극. 탑기야. 민탑기. 어딨어, 너 어디 갔어…….”
“정말 병원에 안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얼굴이…….”
“안 간다고. 몇 번 말하는데. 면상 박살 난 채로 그냥 이렇게 있다 뒈질 거야. 얼굴 말고 볼 거 없는 놈 얼굴 망쳐놓은 새끼 내가 꼭 후회하게 만들 거야. 흐극.”
“그럼 식사라도…….”
“야.”
“네?”
“나 진짜 얼굴 빼면 볼 거 없어?”
지수가 고개를 머뭇머뭇 들었다. 피떡 엉긴 얼굴이 서러운 눈물에 퉁퉁 부어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지수의 애인이었다면 꼭 안아줬을 텐데.
네가 왜 얼굴 빼면 볼 게 없어. 그 앤 네 가치를 몰라도 너무 몰라.
당연하지. 걘 어린애잖아.
“아니요! 절대요. 주인님께서는 얼굴도 멋있으시지만, 사람 자체…….”
“됐어. 말하지 마. 내 어디가 어떻게 잘났든 민탑기한테 난 그냥 얼굴뿐인 거잖아.”
“…….”
“하, 내가 그 새끼랑 떡 칠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허허! 그 새끼 만족할 때까지 맞춰주느라고 몰래 약 처먹고 밤새 박을 때마다 몇 번이나 심장 터져서 죽을뻔했는지 네가 알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왜 몰랐을까. 어째서 진작 알아보고 마음 써주지 않았을까.
나 자신이 미웠다.
“그러고 나서부턴 오줌도 자꾸 이상하게 나오고, 장염도 안 낫고, 몸도 계속 안 좋고, 다 그 새끼 때문인데 내 자존심까지 짓밟고 내 얼굴 이렇게 만들어? 그냥 같이 죽자 이건가?”
“주, 주인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금방 화해하실 거예요♡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진짜?”
“네. 헤헹……♡ 빠구리도 매일매일 하시고 뽀뽀랑 키스도 많이 하시고 넘치게 사랑받으실 거예요♡”
지수 네가 나와 그렇게 지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날 봐, 지수야. 나한텐 네가 원하면 언제든 퍼부어줄 사랑이 있는데. 지금껏 그래왔듯 부족함 없이 정성을 쏟을 자신 있는데.
그 애가 아니어도 네겐 행복할 방법이 있잖아. 꼭 그 애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조금만 고개 들면 네 눈앞에 내가 있잖아.
“그게 언젠데. 잠깐도 못 기다리겠는데 어떡하라고. 그 새끼가 나 말고 딴 놈이랑 뒹굴어댈 거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 허아…….”
난 너 아닌 사람과 뒹굴지 않을게. 널 화나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하지 않을게.
“내가 걔한테 뭘 못 해줬냐? 어? 변대훤, 넌 옆에서 다 봤잖아. 내가 그 새끼한테 못 해줬냐?”
나한텐 그 반만, 아니, 반의반만 잘해줘도 만족할 텐데. 난 공손한 맘으로 네게 감사할 줄 아는데.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난 질투가 너무 많고 심성이 못된 장난감이었다.
“아니에요. 주인님께서는 정말 잘해주셨어요. 너무 부러울 만큼……. 아끼고 예뻐해 주셨어요.”
“그렇지?”
지수가 목소리에 겨우 힘을 실었다. 조금이나마 의욕을 되찾은 듯한 지수를 보자 가슴속 시기심이 금세 물러났다.
못된 심보를 누르니 내게도 작은 선물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바람난 끝에 버림받은 전 애인을 열심히 위로하는 내 맘속에도 언제나처럼 작은 기대가 싹텄다.
이대로 우리 마음을 잘 맞춰가다 보면 다시 전처럼 행복한 애인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지수야, 한번 떠올려봐.
돈독하고 성숙한 연인으로 거듭난 우리 둘을 질투 어린 눈길로 쏘아볼 그 애를 보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날 써.
이용당할 뿐이라도 좋아. 네 ‘무언가’로서 곁에서 살 수 있다면.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왜? 왜 필요도 없는 넌 내 옆에 지겹게 붙어있고, 내가 진짜로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한 놈만 날 개차반 단무지 취급하지?”
그건 아마도…….
궁둥이가 들썩거렸다. 실의에 빠진 지수를 귀찮게 하려는 건 아니지만, 드디어 지수와 나 둘만 남았다니 흥분을 가라앉힐 길 없었다.
그간의 긴긴 인내와 희생이 마침내 열매를 맺은 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기쁜지 지수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급하지 않게 넉넉한 시간을 들여 지수에게 스며야겠지. 알면서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실은 탑기가 언제 다시 ‘짠’하고 나타나서 상처받은 지수의 마음을 움켜잡고 마구 흔들다가 지수 간을 쑥 빼먹을지 몰라서 초조했다. 무엇보다 지수에게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단지 지수를 사랑하고 싶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3년 인생, 지수와 처음 만난 날부터 이 순간까지 쭉 해온 것처럼 세상을 떠나기 전 내 맘대로 실컷 사랑하고 싶었다.
비록 지금은 애인이 아니라…….
“지수 주인님♡ 마음 푸세요♡ 사랑해요……♡ 헤♡”
“그거 좀 그만해. 개좆같으니까.”
“네? 네……♡ 젯, 제성함미다♡ 근데 뭘 그만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알려주시면 고칠게혀……! 헤헷?”
“씨팔 그놈의 주인님 타령 좀 하지 말라고! 넌 그게 재밌냐? 존나 오글거려. 안 웃기는데 웃지도 마. 아니면 너 나 약 올리냐?”
“아닌, 아닙니다. 그럼 호칭을 어떻게…….”
“아, 그냥 원래대로 해! 존댓말도 하지 마. 넌 그 짓 하는 게 그렇게 좋냐? 욕 나온다, 욕 나와, 새끼야. 변태 같은 새끼…….”
지수가 날 경멸스럽다는 듯 쏘아보았다.
헷갈렸다.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라고? 갑자기 왜?
지수는 그동안 내가 말을 높이고 ‘주인님’ 호칭을 하는 게 달갑지 않았던 걸까? 그럼 왜 하게 했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 그저 지수가 원하는 대로 한없이 맞춰온 것뿐인데.
뭐가 문제지? 지수 맘이 바뀐 걸까?
아니면 지수는 일평생 내게 무엇도 원한 적 없었나.
“저……. 몸 상하세요. 아니, 몸 상해. 그니까 밥이라도…….”
높임말이 어느새 익숙해진 차에 말을 낮추려니 쉽지 않았다. 지수가 새빨간 눈으로 날 원망하듯 쏘아보았다.
“네가 나 같으면, 어, 밥이 넘어가겠냐? 넌 왜 그렇게 너밖에 모르냐? 지금 내 꼬락서니 안 보여? 나한테 민탑기가 없잖아.”
“죄, 아니, 미안……. 그래도 끼니 거르면…….”
“그만 좀 해, 제발, 그만, 좀! 네가 뭔데. 네가 내 애인이야? 내가 네 거야? 안 그래도 힘든 사람 왜 더 힘들게 하는데?”
“…….”
“마음이 아프다고. 씨팔 지금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거 같다고. 숨도 못 쉬겠다고. 흐으윽…….”
“…….”
“네가 내 기분이 어떤지 알기나 해? 네 상판만 봐도 개같이 뚜껑 열려!”
“…….”
“변대훤. 너만 없었으면 탑기 걔 그렇게 안 갔어. 알지?”
“……미안.”
“네가 이런다고 너한테 마음이라도 생길 거 같아? 정떨어진다, 대훤아. 넌 인생이 왜 그 모양이냐. 어? 너 왜 그러고 살아. 정신 차려. 멋있게 좀 살아. 불쌍한 표정 짓고 나랑 탑기 좀 괴롭히지 말고!”
“…….”
“씨이팔! 아! 변대훤 너만 보면! 어디 가서 그냥 죽어버리고 싶어. 알아? 널 죽여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그냥 확 죽어버리고 싶다고.”
“…….”
“근데 민탑기는 안 그래. 걘 내가 걜 죽여버리고 싶게 만들어. 걔랑 네 차이를 알겠어?”
“…….”
“미안한데 넌 안 돼. 넌 나한테 평생 안 돼.”
지수가 도망치듯 일어나서 집을 나가버릴 때까지 자리에 망부석처럼 주저앉은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가지 말라고 차마 잡을 수도 없었다.
지수가 날 너무도 미워하는 것 같아서였다.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내가, 너한테 평생 안 되는 나란 인간이, 십 년 가까운 세월을 네 옆에 붙어 널 괴롭게 했구나.
이럴 거면, 넌 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