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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지수(6) (7/41)

1. 김지수(6)

하룻밤 더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점점 정신병자가 돼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너무 경솔했다.

지수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분명 내 탓도 있었다.

어쩌면 내 탓이 더 컸다. 동생인 지수보다 형인 내가 당연히 더 신경 써야 했다.

제대로 된 생활은커녕 아무것도 손에 잡을 수 없었다. 그 전에 그냥 살아지지가 않았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허파가 가루로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딜 봐도 거기에 김지수가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내 거대한 무언가 없이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난 김지수 없이 살아보지 않았다. 연습조차 해보지 못했다.

김지수가 이거 좋아하는데. 지수는 이거 싫어하니까 안 되겠다. 나중에 지수랑……. 김지수한테 그 말을 해야 됐는데.

내가 이러다 어디서 콱 죽어서 변사체로 발견되면 김지수는 무슨 표정을 지으려나. 신경이나 쓸까.

김지수는, 김지수가, 김지수 때문에…….

그런 생각이 삼 초에 한 번씩 튀어나올 때마다 몽둥이로 심장을 때려 맞는 듯했다. 그렇게 삼 초에 한 번씩 생겨난 통증은 온몸 구석구석 퍼져 손가락 발가락까지 어릿어릿하게 했다.

지독한 고통이었다. 8년을 만나면 원래 이런가? 아니면 몇 년을 만나든 관계없이 헤어지면 누구나 이렇게 아프고 힘든가?

유행가 속 이별 가사는 최대한 오버해서 써놓은 건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진짜였다니.

이런 고통을 얼마나 더 지속해야 할까? 드문드문해질 뿐 평생 사라지지 않고 한 번씩 복병처럼 튀어나온 슬픔이 날 죽기 전까지 괴롭히면 어쩌지?

계속 이렇게 아파야 한다면 차라리 다시 만나달라고 비는 게 나았다.

그 순간 뇌리에 번개가 스친 듯했다. 맞네. 그럼 되잖아.

시간이 흐르면 좋은 기억밖에 남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덜떨어져서 우리 좋을 대로 새기고 되살리는 바보라서가 아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시간이 결국 사랑으로 향하기 때문이었다.

난 삼 일째 밤에 전화를 걸었다. 잊어본 적 없는 번호를 눌렀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통화료가 부과됩니…….

긴장한 게 무색했다.

핸드폰이 꺼져있나? 한 번 더 걸어보자.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통화료가…….

메시지를 남겨놓아야 하나. 설마 날 차단한 건 아니겠지?

뭐라고 보내지. 김지수? 왜 안 받아. 어디야. 전화 좀. 전화해라. 죽을래?

한참 망설이다 손가락을 천천히 옮겼다.

[전화해줘]

그리고 지수를 기다렸다. 핸드폰 잠금을 풀어 확인하고 잠그고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확인했다.

김지수의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 암울한 방 안에서 핸드폰을 더듬었다.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도로 잠들면 연락이 오는 꿈을 꿨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그런 일은 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빈 핸드폰 화면이었다.

김지수는 꼬박 이틀 내내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지수야]

한 통 더 덧붙였다. 소용없었다.

사이사이 건 전화도 받지 않긴 매한가지였다. 전화를 거는 족족 신호음 한번 들어보기도 전에 똑같은 안내 음성만 줄줄 흘러나왔다.

“……!”

삼 일째에 드디어 지수가 메시지를 읽었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눈 비비고 다시 봐도 ‘1’ 표시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뿐이었다. 부재중 전화 목록과 모든 메시지함을 뒤졌지만 여전히 답장이나 전화는 코빼기도 없었다.

“아…….”

도대체 읽어놓고 답장은 왜 안 하는데. 돌아버리겠네.

고문이 따로 없었다.

학교에 있는 내내 김지수랑 연락할 방법에 관해 생각했다.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공중 전화박스를 찾았다.

요즘은 공중 전화박스 찾기도 쉽지 않았다. 어릴 때처럼 동전을 집어넣고 유일하게 외운 번호를 꾹꾹 눌렀다.

이번에도 안 받으면 여기 서서 밤새도록 걸어댈 작정이었다. 신호가 울렸다.

그런데 곧 전화가 연결되었다.

―누구.

나쁜 자식.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좋아서가 아니었다. 서러워서였다.

김지수를 잡아 죽이고 싶었다. 길거리 공중 전화박스에서 전화통을 붙들고 이런 궁상을 떨게 만든 작자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하지? 빨리 대답 안 하면 전화를 끊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생각해둔 말이 많았는데.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수야.”

―…….

“나야…….”

―왜.

김지수가 번개같이 물었다.

그러게. 내가 왜 전화했을까. 갑자기 후회가 밀려들었다.

“어디야?”

―헤어지자며.

지수가 짜증 난다는 듯 말꼬리를 늘였다.

그래서 진짜 헤어져 보잔 소리냐? 이 자식아? 그걸 원해?

그렇게 말하면 전화를 끊을 것 같았다.

치솟는 화를 내리누르고 서운함은 스스로 달랬다. 그래, 내가 형이니까 참자.

김지수가 나보다 연상이었다면 내가 더 참지 않아도 됐을 텐데. 왜 연하여서 이렇게 날 힘들게 할까.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던 게 분명했다.

깊게 심호흡하고 최대한 부드럽고 어른스러운 어조로 느릿느릿 말해보려고 했다.

“일단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

이게 아닌데.

―그니까 왜.

그때였다. 수화기 너머로 ‘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만나쟤? 큭큭. 왜, 오라 그래.’

―오라 그러라고?

‘응. 자기한테 만나자는 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으냐’고 묻다니.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런 다정한 말 나한텐 안 해주면서. 네가 나랑 만나는 데 왜 그 자식 허락을 받아야 돼.

―그럼 일로 오든가.

거기가 어딘지 알고 가, 이 자식아. 그리고 내가 너희 둘이 있는 델 왜 가야 되는데.

“어디로 가면 돼?”

김지수가 말한 곳은 지하철역과 연결된 주상복합 오피스텔이었다.

“도착해서 전화하면 돼? 받을 거지?”

―712? 712 호출하래. 아기야, 근데 그럼 우리 저녁 언제 먹…….

뚝. 전화가 끊겼다.

이런 자식 땜에 내가 가야 하나.

가긴 가야 했다. 김지수 너 없인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까.

기분 나쁜 건 좀 참고 일단은 김지수를 아파트에 데려다 놓아야 뭐가 돼도 될 것 같았다. 내 걸 남의 집에 하루라도 더 갖다 놓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 김지수, 넌 내 거다. 한시도 아니었던 적 없다.

오피스텔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자 역내에서 상가로 통하는 길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712호를 호출했다. 기분 나쁠 만큼 아늑하고 더운 층에 내리자 문제의 712호가 있었다.

남의 호실 앞에서 머뭇거릴 여유 따위 없었다. 화상 김지수를 잡기 위해 초인종을 눌렀다.

쿵쿵쿵. 그런데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지수 것이 아니었다.

경쾌한 도어록 소리와 함께 발소리의 주인이 철문을 열었다. 어린 남자였다.

“형님!”

“…….”

“얼굴이 왜 이래요. 많이 상했네요.”

“…….”

“아닌가. 원래 상해있었나. 아, 쉰 건가?”

쳐다보는 것조차 부끄러울 만큼 눈부신 얼굴이 처음 그날과 다르지 않았다. 어린 남자는 어디서 공연이라도 막 마치고 온 것처럼 말쑥한 차림새였다.

남자다운 쿨―워터 향기도 났다. 어린 남자가 날 지그시 내려다보고 덧붙였다.

“그래도 잘 찾아왔네요.”

“지수는요.”

“불러줄까요?”

“…….”

“싫어요? 부르지 말까요?”

천하의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내가 여기 왜 왔는데.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재깍 부르기나 할 것이지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걸까. 선심 쓰듯 약 올리는 남자의 태도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하지만 괜히 이 애 신경을 건드렸다간 지수를 안 불러주겠지……. 내겐 무엇보다 지수랑 만나는 게 급선무였다.

“불러주세요…….”

어린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날 비웃는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내가 웃긴 듯했다. 아니면 내 얼굴이 저랑 다르게 웃음이 나오게 생겼든가.

“잠깐 있어요. 자기야!”

쿵.

어린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자 자연히 철문이 닫혔다. 한참이 지나서야 김지수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때깔 한번 좋네. 삼 일 내내 잘 먹고 잘 산 모양이었다.

김지수가 미루적미루적 호실 바깥으로 나와서 문을 닫았다. 짝다리를 짚고 벽에 기대선 모습이 훤칠했다. 남의 집에서 나오니까 괜히 더 훤칠해 보였다.

“해.”

“어?”

“얘기하라고.”

“어…….”

“…….”

“언제까지 밖에 있게?”

“네가 나가라며.”

“…….”

“경찰 불러서 꺼지랄 땐 언제고 왜 물어보는데.”

“그땐 네가 아니라 한 명 더 있…….”

“헤어지자며.”

“아니, 안 그래도 그것 땜에 얘기 좀 하자고 한 건데, 그땐 내가 너무 화가 나서…….”

화났지. 많이 났지.

네가 열받게 했잖아, 이 자식아. 그니까 왜 열받게 하는데.

같은 말을 하면 망하겠지. 싸우려고 온 건 아니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나도 생각을 해봤는데, 진짜 그러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고…….”

“아! 뭔 말이 하고 싶은데.”

“안 헤어질래.”

김지수가 다그치자 말이 불쑥 튀어 나갔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김지수가 비웃고 말했다. 그러나 난 알 수 있었다.

내 칠칠찮은 김지수가 입가에 묻힌 건 안도의 미소였다. ‘네가 그럴 줄 알았다’ 내지는 ‘네가 그럼 그렇지’ 하듯 마음 놓을 때 짓는 표정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지수야, 난 다 안다. 알면서 너한테 이런다.

너라서 이렇다.

“장난하는 거 아니야. 헤어지기 싫어.”

너도 싫잖아. 내 욕심 많은 김지수. 내가 널 모를까.

“헤어지기 싫은데 어쩌라고.”

“집에 가자…….”

“…….”

“맛있는 거 해줄게. 너 좋아하는 담배도 보루로 사줄게.”

“…….”

“소주 맥주 막걸리 사서 들어가자. 네 거 선인장에 물은 줘야지. 물 안 준 지 너무 오래됐잖아.”

“…….”

“아무리 선인장이라도 그러면 말라 죽어. 네 건데……. 네가 줘야지.”

내가 불쌍하게 굴면 맘 약해지는 널 안다. 내가 내 자존심을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모습을 보며 네 맘속 깊은 곳에 감춰둔 무엇을 해소한다는 걸 안다.

내 몰골이 못나지면 못나질수록 마치 내가 된 듯 맘이 동하는 널 안다. 내가 한없이 어리석고 미련하게 행동할 때마다 너로 하여금 날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네 무의식이랑, 너보다 내가 더 친하니까.

잘난 네 우월감 덕분에 난 널 아주 약간 다룰 줄 알게 되었다.

“나 너랑 안 헤어져. 그니까 일단 나랑 집에 가. 다른 건 아무것도 지금 생각 안 할래.”

“얘랑 같이?”

김지수가 철문에 눈짓했다. 어린 남자를 말했다.

“걘 왜……?”

“그럼 나만 가? 얘랑 나랑은 한 세트야. 넌 나랑 헤어졌지만 얜 나랑 안 헤어졌어.”

“나도 너랑 안 헤어졌어. 네가 알겠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너만 오면 안 돼?”

“어. 안 돼.”

너야말로 나랑 장난치냐. 절대 싫었다.

“밖에서 친구 만나는 건 뭐라 안 할게. 이때까지 내가 뭐라 한 적 없잖아. 집엔 나랑 둘이 가. 어?”

“…….”

“그러려고 구한 집이잖아. 우리 둘이 살려고 있는 데잖아.”

“…….”

“너도 알잖아. 왜 알면서 그래. 나 숨 좀 쉬게 해주라.”

“…….”

“지수야.”

싸운 적은 지겹게 많았지만, 네가 다른 사람이랑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내게 데려온 적은 없었잖아.

근데 그건 아니지.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옳지 않잖아.

“가자…….”

“싫어.”

“왜?”

“너도 네 좆대로 살아. 나도 내 좆대로 살 테니까.”

“…….”

“가라.”

“잠깐만, 너도 나랑 이렇게 끝낼 건 아니잖아.”

“뭐 어쩌라고. 어? 얘랑 같이 간대도 싫다, 바깥에 있겠대도 싫다.”

발칵.

어린 남자가 호실 문을 열고 지수에게 물었다.

“뭔 얘기를 이렇게 오래 해?”

“몰라.”

김지수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어린 남자의 형형한 눈이 날 위아래로 훑었다.

“큭. 우리 자기가 형 따라가기 싫대요?”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어린 남자를 칩떠보다가 한마디 했다.

“그쪽은 빠져요.”

김지수가 끼어들었다.

“얠 빼긴 왜 빼. 변대훤, 아직도 정신 못 차리지? 넌 나보다 얘한테 더 잘 보여야 돼. 눈치가 없냐.”

“앗!”

“가.”

김지수가 내 어깨를 밀쳤다. 뒷걸음질 쳐버린 사이에 두 사람이 문 안쪽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지수의 팔뚝을 붙잡았다. 이대로라면 지수를 다시 어린 남자한테 뺏기게 될 거고, 그럼 내 인생의 오늘 밤은 또다시 엉망이 되고 만다.

“안 돼, 싫어. 나랑 가. 지수야. 김지…….”

“나랑 계속 살고 싶어?”

김지수가 물었다.

“어.”

“그럼 얠 인정해.”

김지수가 어린 남자를 향해 턱짓했다. 어린 남자가 얼굴 가득 승리자의 미소를 띠고 눈썹을 으쓱해 보였다.

“싫은가 봐. 큭큭!”

어린 남자가 당황한 날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김지수가 성마르게 물었다.

“못 하겠지?”

“보니까 자기 애인이 욕심이 많네.”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린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때였다.

“대훤아.”

“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김지수가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내 남자한테 눈깔 그렇게 뜨지 마.”

“…….”

“한 번만 더 하면 가만 안 놔둬.”

그럼 난? 쟨 네 남자고 8년 만난 난 그럼 뭐 아무것도 아니야?

“헤어지자고 한 건 너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그래서, 나도, 헤어지잔 뜻 아니라고 말하러 온 거야.”

“어쨌든 간에 오래 만난 너랑 그렇게 헤어지는 건 나도 좀 아닌 거 같아서 얘랑 셋이 같이 살자 한 건데 넌 그것도 싫다 했어.”

“당연히 싫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럼 더 할 말 없네.”

“아아! 문 닫지 마.”

“변대훤.”

지수의 표정이 잔인하게 가라앉았다. 지수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땐 한순간뿐이었다.

기억이 날 얼어붙게 했다. 벌레처럼 말과 행동을 그쳤다.

“어……?”

“한마디만 더 하게 하면 알지.”

“…….”

어린 남자가 배를 잡고 웃어젖혔다.

“아하, 아하하! 형 존나 귀여워.”

김지수가 날 한심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말했다.

“너도 이번 기회에 혼자 좀 있어봐. 어? 딴 놈도 좀 만나보고, 만나서 그것도 실컷 하고. 너 만날 사람이 그렇게 없어?”

“…….”

“하긴, 없으니까 이러겠지. 너도 참 어지간하다. 대단하다, 변대훤.”

뭐가 대단하고 뭐가 어지간한데. 너랑 꼭 붙어있고 싶은 내 마음이 너한텐 그렇게까지 조롱할 거리인가.

너나 네 옆에 있는 애처럼 ‘쿨’하지 못한 내가 덜떨어진 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어, 김지수?

“형이 너무 박력이 없네. 땡.”

어린 남자가 말했다. 어린 남자에게 눈길조차 한 번 흘리지 않고 지수한테 한 걸음 다가섰다.

“알았어. 읏. 지수야, 내가 잘못했어.”

“…….”

“내가 어지간해서, 딴 사람도 못 만나고 너만 귀찮게 해서 미안. 셋이 살자는 거 하나 이해 못 해주는 좀생이라서 진심으로 미안한데, 그래도 나 너랑 떨어져 있기 싫어.”

“…….”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해도 괜찮아. 고치라는 거 다 고칠게. 내가 그렇게 재미없고 지겨우면 얘처럼 바꿀게. 그니……. 흣?”

지수가 날 호실 안으로 홱 끌어당겼다. 돌발행동에 놀랄 겨를 따위 없었다.

퍽쾅!

“말조심 눈깔 조심 하라고 했지.”

“아. 하아아……!”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가 잘 안 들렸다.

머리통이 띵하다는 것과 어디 세게 부딪혔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딴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수모를 당할 만큼 내가 못났나. 누가 보면 내가 무슨 미저리 스토커인 줄 알 판이었다.

잘못한 건 너희 두 사람이잖아. 두들겨 패도 내가 패야지.

“억울해. 하읏, 하……. 이건 아니지.”

“네 집 가서 혼자 실컷 억울해해.”

“내 집 아니야. 우리 집이야.”

“변대훤. 넌 자존심도 없어?”

“없어. 그니까 당장 나와. 집에 가게.”

“대훤아.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봐. 너 같으면 너랑 가고 싶겠냐?”

내가 너라면?

생각하래서 생각하려는데 그사이에 김지수가 날 문밖으로 밀어냈다. 긴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자 무자비한 발길질을 퍼부었다.

“아. 흑……!”

“입장 바꿔 생각해. 네가 나면 어떨 거 같은지.”

“난 좋아. 윽, 입장 바꿔 생각해도 좋을 거 같단 말이야.”

“뻥치네.”

“지수야!”

쿵. 지수가 문을 닫았다.

머리가 멍했다. 김지수가 행패 부릴 때야 많았지만, 내가 어르고 달래고 애걸복걸하면 못 이기는 척 끌려오고, 풀어지고 그랬다.

어린 남자가 보는 앞이라서 나한테 더 심하게 구나. 지수도 진짜로 헤어지길 바라는 것 같진 않았는데.

그래, 김지수는 헤어질 생각이 없다. 확신할 수 있었다. 눈빛만 봐도 아는 팔 년 지기였다.

그렇다면 원인은 따로 있었다. 우리 사이 변수는 유일무이했다.

어린 남자였다. 난데없이 굴러와서 지수를 혼란에 빠뜨리고 지수답지 않은 짓을 하게 부추기는 악마의 씨였다.

지수를 구해야 했다. 삿된 마법사의 농간으로부터 건져내야 했다.

지수 없이 텅 빈 아파트로 돌아가서 차디찬 소파에 앉아 지수를 생각하고 과거를 그리고 헛된 망상에 빠지고 후회에 시달리고 환영을 보고 꿈을 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출근길에 속을 태우다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수업 중엔 정신이 나가있고 모래 맛 밥을 씹고 일과 중에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굴러떨어지고 퇴근할 땐 차 안에서 오열하기 싫었다.

널 품에 안으려면 내가 못 할 게 뭐야.

얌전히 기다리면 언젠가 올 것도 안다. 그간 수없이 바람을 피워온 네가 언제나처럼 금방 흥미를 잃겠지. 어쩌면 반대하는 나 때문에 더 불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네가 그 앨 진짜 사랑하게 된다면? 내가 너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것만큼이나 네가 그 애 때문에 가슴 아파진다면?

난 너 없으면 못 산단 말이야. 처음엔 나도 널 쓰레기처럼 갖다 버리고 나면 통쾌하고 홀가분할 줄 알았단 말이야.

근데 맘이 안 놓여. 손 놓고 있다간 네가 영영 안 올 것 같단 말이야.

왜냐하면……. 그 앤 너무…….

매력이 넘치니까.

“지수야!”

쾅쾅쾅. 문을 두들겼다. 초인종을 연달아 땡땡땡 눌렀다.

‘그 애’의 얼굴과 몸, 목소리와 말투, 힘쓸 때와 관계할 때의 모습이 마음속에 떠오른 순간 주먹이 문을 찾아 때렸다.

흉악범에게 쫓기듯 맘이 급했다. 어린 남자는 지수뿐 아니라 나까지 정신 못 차리게 하고 있었다.

“문 열어.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잠깐만 다시 나와봐. 어?”

벌컥.

“형님 미쳤어요?”

어린 남자였다.

“지수한테 할 말 있어요. 비켜요.”

“어딜 맘대로 들어와요. 여기 내 집이에요.”

“그럼 지수보고 나오라고 해요.”

“싫은데요. 내가 형님 종이에요?”

“그건 아닌데…….”

“형처럼 나도 경찰 불러요?”

“아니요.”

“볼에 뽀뽀해봐요. 그럼 불러줄게요.”

“예?”

어린 남자가 낄낄거렸다.

“뽀뽀하라고요. 어차피 지수는 안에 있어서 못 봐요.”

“…….”

진짜 해? 그건 아니지. 뭐야. 왜 이래.

“안 할 거면 문 닫을게요.”

“저기……!”

“응. 자.”

어린 남자가 반짝이는 구릿빛 뺨을 들이밀었다. 몸이 저절로 물러났다.

안 하면 내쫓을까. 하면 진짜 불러주긴 하나. 그렇다고 할 순 없잖아.

“부탁, 할게요. 지수 좀……. 불러주세요.”

“뽀뽀하면 안에 들어오게 해주―지!”

“안 들어가도 돼요.”

어린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알았어요. 데리고 나올게요. 기다려요.”

어린 남자가 별안간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든 제 기분 내키는 대로인 건 변함없었다.

어린 남자 입장에서도 내가 달갑진 않을 텐데, 불러달란다고 순순히 불러주는 걸 보면 대인이거나 아니면 그냥 나처럼 바보인 모양이었다.

아닌가. 지수를 별로 안 좋아해서 신경 안 쓰는 건가.

그럴 리가. 저 애가 아닌 체한다고 해서 방심할 필요는 없었다.

언제는 우리 집에서 살아야 지수랑 사귀겠다고 해놓고 아직도 같이 붙어있는 꼴을 보면 저 자식 저것도 안될 자식이었다. 그 말대로면 우리 집에서 나가고부터 저희네 사이도 끝났어야 되는 거 아닌가.

애초에 김지수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 미운 정이 무서운 거랬다.

김지수는 미운 정 생성기, 아니면 미운 정 김치냉장고나 다름없었다. 미운 정이라면 아주 맛깔나게 잘 버무려 익혔다. 신세대인 어린 남자가 그런 맛을 모르기만 바랄 뿐이었다.

“야!”

깜짝이야. 간 떨어질 뻔했다.

김지수가 노발대발한 얼굴로 소리쳤다.

“너 빨리 집에 안 가?”

“네 말대로 할게.”

“얘랑 셋이서 사는 거 받아들일 거야?”

김지수가 미웠다. 김지수는 너무 나빴다.

“알았어, 받아들일게. 어흐흑…….”

“진짜지? 탑기한테 물어보고. 민탑기!”

“아, 왜!”

어린 남자가 귀찮다는 듯 얼굴만 빼고 외쳤다. 김지수가 물었다.

“얘가 너랑 나랑 같이 들어오라는데?”

“형님, 진짜 가지가지 하네요. 어휴, 자기는 좋겠다? 집 나가면 찾으러 오는 시츄도 한 마리 있고.”

시츄? 설마 내가 시츄란 소린 아니겠지.

어린 남자가 내게 말했다.

“우리 자기한테 형이 헤어지자 그랬잖아요. 나도 괜찮다는데 형이 뭔데 우리 자기한테 헤어지재요. 그런 말이 그렇게 쉬워요? 우리 자길 뭘로 보길래 그래요?”

그러는 넌 버리고 가겠다느니 지수 보는 앞에서 출장 뷔페를 차려 먹겠다느니 안 그랬어? 그랬잖아.

하고 생각만 했다. 어린 남자가 날 다그쳤다.

“아까부터 자꾸자꾸 불러내서 남의 집 앞에서 무슨 민폐예요.”

넌 우리 집 안까지 들어와서 나한테 민폐 끼쳤잖아.

그때였다.

“사과해.”

“뭐……?”

김지수가 좀처럼 주둥아리를 다물지 않았다.

“우리 아기한테 폐 끼친 거 사과하라고.”

우리 아기. 우리 자기. 난 뭔데. 그냥 시츄냐.

하는 수 없이 어린 남자 쪽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합니다.”

“나가라 그럴 땐 언제고 다시 들어오라고요? 누구 맘대로요? 뭔데 이래라저래라해요. 형님 우리 자기한테 싹싹 빌려고 예까지 온 거 아니에요? 태도가 영……. 성의도 없고…….”

김지수가 끼어들었다.

“야. 얘가 너 맘에 안 든대.”

김지수가 말해놓고 웃기는지 허허허 웃었다. 어이없이 올려다보는데 어린 남자가 날 불렀다.

“형님.”

“네?”

“무릎 꿇고 빌어요. 그럼 갈게요.”

“내가요……? 내가 왜요?”

“형님이 헤어지자는 말로 우리 자기한테 상처 주고 집에서 내쫓았잖아요. 사과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

“형님이 뭐 나 무시하고 그러는 건 괜찮은데요, 우리 자기한테 그래 놓고 인제 와서 이러는 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요. 우리 자기를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사과받아야겠어요.”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과는 바람피운 두 사람한테 내가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김지수를 쳐다보았다. 김지수가 입 속 껌을 굴리며 복도 바닥에 눈짓했다.

어린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미안해요. 지수한테 헤어지자고 한 거 다 내 잘못 맞아요. 근데 진짜 진심으로 한 말 아니에요. 지수야……. 미안해. 내가 이렇게 사과할게.”

어린 남자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형님 뭐 해요? 무릎.”

“지수야, 다신 그런 말 안 할게. 나도 너한테 미안해서 며칠 동안 반성 많이 했어. 엄청 괴로웠어. 앞으로도 계속 반성할게. 그니까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줘.”

“큭. 형님.”

“네?”

“개수작 떨지 말고 바닥으로 내려가요. 왜 귀 안 들리는 척해요.”

“싫으면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숨이 멎을뻔했다. 조종당하는 생체 로봇 두 벌 같았다.

“싫다는 게 그냥, 그니까…….”

“선택해요.”

“예?”

어린 남자가 카메라 렌즈처럼 까만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제대로 사과하고 나랑 우리 자기 한 세트로 형님 집에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조용히 혼자 집 가서 내일부턴 인생 새 출발 하든지 알아서 정하라고요.”

“…….”

“형님. 사람은 선택을 잘해야 돼요. 살다 보면 선택을 안 할 수가 없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거든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잖아요. 게임처럼요. 게임 해봤죠?”

“…….”

“나이 많아서 게임 같은 거 할 줄 모르나.”

어린놈의 자식이 아는 척하는 꼬락서니만 보면 양주 노자 귀퉁배기도 후려갈길 수준이었다. 남자가 지독한 말투로 물었다.

“잘못된 선택 때문에 한순간에 나락 갈 수도 있는 게 인생 아니겠어요?”

나락이라니? 울상을 감출 수 없었다. 어느 쪽이 나락이란 소릴까.

지난 며칠을 돌아보았다. 김지수 없는 생활이 분명 지옥 같긴 했다.

내 일부를 떼놓고 어떻게 멀쩡히 밥 먹고 숨 쉬고 살까. 김지수 없이는 간 뺏긴 토끼 신세나 다를 바 없었다.

김지수는 내 애인이야.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결정은 지수를 안 순간 이미 내리지 않았나.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수랑 함께해야 했다. 난 그러려고 태어났으니까.

“사과할게요.”

“사과하고 우리 셋이 사는 거에 동의할 거예요?”

“네.”

“좋아요. 형님 말에 책임질 자신 있으면 꿇어요.”

“근데, 안에 들어가서 하면 안 돼요? 여기서 하면, 누가 지나가다 보면…….”

“상관없어요.”

내가 상관있는데…….

말해도 안 통하겠지. 입이 한숨과 함께 저절로 툭 빠졌다.

왜 나만 혼자서 두 명을 상대해야 되는데. 불공평했다.

머리는 무릎 꿇을 것을 명령하는데 가슴은 온몸에 싫다고 외치는 기분이었다.

‘한 세트’를 주장하는 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내 눈을 뽑고 싶었다.

두 남자가 복도에 서서 업신여기는 눈빛을 내리꽂는 모습이 마치 잡지 겉장 같았다. 내 멍청할 꼬락서니와 머릿속에서 겹치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도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린 안 들어봤는데. 평범한 외모 수준은 된다고 믿고 나름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우리 엄마 아빤 나보고 잘생겼다고도 그랬다.

내가 못생긴 게 아니라 그냥 김지수가 너무할 만큼 잘생긴 거잖아.

그래서 좋긴 하지만 그거 땜에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해서 만나게 된 사람이 운 좋게 끝내주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런 이유로 만날 시기는 훌쩍 지나지 않았나. 빛나는 외모도 삼 년만 지나면 크게 감흥 없……. 이건 아닌데.

아무튼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외모에 관해 깊게 생각해본 적 자체가 없었다. 외모 때문에 주눅 들거나 고통스러워해 본 경험도 거의 없었다.

지수는 사랑하는 애인이니까 마냥 좋았다. 8년을 만나는 동안 지수의 잘생긴 얼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순간이 죽을 듯 힘들었다. 정체 모를 열등감이 등 뒤에서 오금을 차 마음속에선 날 벌써 비참하게 무릎 꿇린 지 오래였다.

누군가는 내가 보는 광경을 아주 보고 싶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게 깔보는 눈빛에 뒷골이 찌릿했다.

“꿇어요.”

어린 남자가 명령했다.

연한 구릿빛 피부에 펼친 생김생김이 늑대처럼 짙었다.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한가로운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의 김지수는 내 오랜 애인답게 아무 생각 없는 얼굴이었다. 무심한 김지수의 시꺼먼 실루엣이 바벨탑같이 높았다.

이렇게 잘생긴 두 사람 앞이라면 그렇게까지 창피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깟 무릎쯤 얼마든지 꿇어도 괜찮은 거 아닐까.

“…….”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어린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당기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변대훤. 괜찮아.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꾹 참자. 지수를 되찾아야 한다는 처음 목적만 잊지 말자.

지난 슬픔을 떠올리자. 며칠 간의 흑암과 환란 같은 밤을 돌이켜라.

8년 동안 지어온 농사를 예까지 와서 망칠 순 없잖아. 아직 우리 알곡은 구경도 못 했는데.

무릎이 바닥을 때렸다. 어깨가 주인을 배신하고 스스로 벌벌 흔들었다.

“사과할게…….”

너무나도 고요했다. 차라리 아까처럼 비웃기를 간절히 빌었다.

지수야, 무서워. 내가 이렇게 해서 널 되찾지 못하고 도리어 너와 멀어지게 되진 않겠지?

구해줘, 김지수. 외면하지 말고 제발 도와줘.

난 8년 만난 날 두고 바람을 피운 남자와 그 상대를 향해 무릎 꿇은 것으로 모자라 두려움에 떠는 중이었다.

“미안해. 정말로…….”

“…….”

“용서해줘…….”

김지수가 선심 쓰듯 말했다.

“얘도 너랑 똑같은, 아니다. 지금은 너보다 훨씬 이뻐하는 내 새 애인이니까 인정하고 깍듯이 해. 까놓고 말해서 네가 얘보다 나은 점이 나랑 몇 년 더 만난 거 말고 뭐가 있어?”

“맞아요. 인제 내가 형님 동생이라고 인정부터 해요.”

넋 없이 혀를 움직였다.

“동생 맞아요.”

“그럼 동생이라고 해봐요.”

“동생.”

“왜요, 형님?”

“……해보라면서요.”

“큭큭. 네. 잘했어요. 큭큭큭!”

김지수가 날 향해 끝끝내 나불거렸다.

“얜 너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랑 다르게 존나 잘해. 잘됐네. 퇴근하면 집에서 놀지 말고 좀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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