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김지수(5) (6/41)

1. 김지수(5)

어린 남자에 의해 내 집에서 쫓겨나고 나서, 난 동네 파출소 쪽으로 무작정 걸었던 것 같다. 순경 둘과 함께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핸드폰을 돌려받고 김지수랑 어린 남자를 쫓아낼 때까지도 내 정신이 아니었다.

병원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니 그냥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고 넘겼다.

토요일이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샤워만 하고 쓰러져 잠들었다.

다음 날은 눈뜨자마자 청소부터 했다. 일이 많았다.

지독한 지린내가 좀처럼 빠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마루 틈마다 오줌이 깊숙이 밴 듯했다.

비위도 좋지. 어떻게 이런 데서 뒹굴고 잠자고 밥까지 먹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애당초에 비위가 좋으니 바람을 그렇게 피워댔겠지만.

금수 같은 두 인간이 실컷 처먹고 난 식탁 꼬락서니를 보자 기가 찼다. 집구석이 온통 돼지우리였다.

“하…….”

설거지부터 해야겠지.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김지수랑 내 8주년 기념일을 위해 산 고블릿 잔을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아.”

수습하려다 손까지 벴다. 재수가 옴 붙으니 별것까지 다 훼방이나 놓고 날 안 도와줬다.

근데 왜 지수가 아무 반응이 없지. 내가 ‘아’ 소릴 내면 그래도 왜 그러느냐고 물어는 보는 인간인데.

거실에 없나?

“지수야.”

대답도 안 하네.

“지수야, 구급상자 어딨는…….”

그때야 생각이 났다. 맞다, 헤어졌지.

“…….”

허탈……. 아니, 속이 뻥 뚫렸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갔다. 김지수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었다.

두 인간이 오색 빛깔로 얼룩덜룩 물들여놓은 침구를 향긋하게 빨고 뽀송뽀송 건조까지 한 순간에는 특히나 더 상쾌했다.

그다음 순서는 꽃 처리였다. 아직 봉오리도 다 열지 않은 꽃을 통째로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녹은 초도 함께였다.

현관부터 화장실, 침실, 거실, 부엌까지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던 장소 일체를 미친 듯이 쓸고 닦고 소독까지 하고 나서 다시 닦았다. 온 집 안을 환기하고 향을 피워 연기를 쐬고 나서 다시 환기했다.

마음 같아선 온 집 안에 소금이라도 팍팍 치고 싶었다.

김지수의 물건을 그러모아 커다란 박스 하나에 다 처박았다. 그러다 문득 핸드폰에 저장한 김지수의 번호를 지웠다.

‘지수’. 지난 8년 동안 내 단축번호 첫 자리를 지켜온 이름이었다.

언뜻 여자 이름 같기도 해서 모르는 사람이 물어볼 때면 그렇다고, 여자친구라고 둘러댄 적도 몇 번 있었다. 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그 외에 지워야 할 사진 따위는 몇 장 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8년을 만났는데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없다고 하면 누구든 비웃을 터였다.

쓰레기를 내놓으러 갈 땐 좀 낯선 기분이었다. 그동안 쓰레기 담당은 줄곧 김지수였다.

집안일을 하는 내내 이상하리만치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김지수랑 한집에 있을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이별하면 원래 술 마시고 울고불고 아무것도 못 하지 않나. 이건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 거 아닌가.

어쩌면 그런 건 적당히 연애하고 헤어진 사이에나 해당하는지도 모르겠다. 8년을 묵어서 다 쉬어 터지면 그런 감정도 안 남나 보다.

어차피 김지수한테 더 쓸 눈물도 없었다.

“후…….”

할 일이 없을 때쯤 시계를 보자 늦은 밤이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차를 뜨겁게 끓였다. 8년 만에 혼자가 된 날을 어른스럽고 담담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거실 테이블에 머그잔을 올렸다. 소파에 앉아서 등을 기댔다.

바야흐로 차분하게 생각에 잠겨볼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흣?”

암살자 같은 고독이 들이닥쳤다. 적막을 기다리며 주위에 도사리다 무방비해진 날 집어삼켰다.

“흠, 흔.”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몸이 버들버들 떨었다. 병원에 가야 했나?

김 나는 머그잔에 손을 뻗을 자신이 없었다. 또 거실 조명이 너무 환했다.

불을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뭐가 문젤까. 내가 갑자기 왜 이럴까.

얼핏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베란다 쪽을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유리에 비쳤다.

변대훤. 너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이 그러면 안 되지. 네가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지자고 해놓고 그런 표정을 지으면 어쩌자는 거야.

종일 쓸고 닦고 수습하는 동안에는 안구 뒤편짝에서나 어른거리던 김지수의 환영이 멋대로 눈앞과 사방과 온 집 안을 다 휘젓고 다니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순간엔 곤히 잠들어있던 추억 수만 가지가 가슴 구석에서 팝콘처럼 튀어나왔다.

“흐읏, 흐웃…….”

요즘은 지수랑 같이 있는 날에도 늘 외로웠으니까, 떨어져도 똑같이 외로울 줄 알았는데.

지금 이 감정은 외로움이 아니었다. 고통이었다.

“허억…….”

거실 불빛이 너무 밝아서 몸을 숙였다. 부끄러운 머리를 감싸고 무릎 사이에 묻었다.

사랑에 실패가 어딨어. 그 사람과 보낸 모든 순간이 선물이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

지수 물건. 쓰레기차가 벌써 가져가진 않았겠지.

그걸 왜 그렇게 급하게 내다 버렸을까. 후회가 밀려들었다.

거기 우리 어릴 때 추억이 다 있는데.

이럴 때가 아니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린 지수를 가둬둔 박스를 찾아와야 했다.

슬리퍼를 발에 대충 꿰고 미친 사람처럼 쓰레기장으로 내달았다.

박스를 되찾는 건 다행히 어렵지 않았다. 품속 박스를 꼭 안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꼴도 보기 싫어진 박스를 현관 앞 복도에 내팽개쳤다.

소파에 다시 앉았다. 박스를 찾고 나자 인제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지수야.”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김지수.”

분명 속 시원했는데, 어느새 가슴이 갑갑하게 죄었다. 김지수가 갓 성인이 되었을 무렵의 모습이 눈앞을 가렸다.

납치범의 복면처럼 인질인 내 얼굴을 덮쳤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읏. 흣…….”

넌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었지만 모두 널 알았다. 엄밀히 따지면 네가 아니라 네 얼굴을 알았다.

대학 문턱을 밟지 못한 네가 학교 축제나 누군가네 과 엠티만은 고등학생 때부터 종종 끌려가곤 했던 걸 봐왔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도 너 때문에 알게 되었다.

후장 깨……. 아니, 도장 깨기 하듯 여러 학교를 섭렵한 네가 우리 학교 엠티까지 따라왔던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선뜩하다.

그날 과대가 널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서 같이 가자고 권유했나. 아니, 너한테 반한 게 비단 과대만은 아니었다.

그때 너랑 그 애랑 무슨 일이 있었나. 아아, 과대가 아니라 다른 애였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둘 다였나?

널 만나고부터 싫은 기억은 알아서 빨리빨리 사라져주는 통에 떠올리기 쉽지 않다. 뭐, 인제 와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네가 너무 인기 좋은 사람이기 때문일까. 매달리는 쪽은 거의 나였다.

가끔은 반대일 때도 있긴 했다. 네가 매일 우리 동네에 차를 대놓고 그저 날 지켜봤던 나날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저민다. 그만큼 슬프고 그만큼 설렜다.

내게 첫 자취방이 생겨서 비로소 너와 함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짐짓 점잖은 척 실은 몹시 기뻐하듯 세게 쥐던 네 주먹의 모양을 떠올렸다.

고작 낡고 비좁은 자취방을 나랑 같이 살 곳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좋아해 줬으면서. 왜 지금은 더 넓고 깨끗한 이곳을 좋아하기는커녕 지긋지긋해 달아나고 싶은 듯이 구는지.

그땐 그러지 않았잖아.

매년 설 본가에 다녀온 내가 늦게나마 네게 떡국을 끓여주고 네 눈치를 살필 때면, 넌 씩씩한 얼굴로 매번 맛있다고 말해주곤 했다. 떡국을 꾸역꾸역 비우는 널 보며 난 아픔을 감춘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고, 연휴 내내 날 기다리다 밝게 맞아주는 너한테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그리고 가슴이 찢어졌다.

그 알 길 없는 울컥함 때문에 참지 못하고 네게 막무가내로 덤비면, 넌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무안 주는 일 없이 진짜배기 사나이답게 날 안아줬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무조건 따르는 게 너로 하여금 날 덜 사랑하게 만든대도 어쩔 수 없다. 넌 널 강하게 틀어쥐고 휘둘러줄 사람한테 끌린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선 네 곁에 영원히 있을 수 없잖아. 그 끝은 결국 파국일 테니. 넌 누구보다 파국을 사랑하는 남자니까 말이다.

처음부터 넌 잡히지 않을 사람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마찬가지겠지. 그런 널 갖는 방법은 오직 널 자유롭게 하는 것뿐.

그게 내가 군말 없이 순종하고 헌신해온 이유였다. 우직하게 그저 널 바라보는 게 내 사랑의 방법이었다.

네가 재미없는 나 때문에 잠시 잠깐 방황하더라도 묵묵히 기다리기. 언젠가는 돌아봐 줄 때까지 충실한 집개처럼 네 뒤를 지키기. 만족을 모르는 가엾은 네가 언젠가 앉아서 쉴 그루터기가 되기.

내 사랑은 널 길들이는 게 아니다. 네가 길들 위인도 아니지만, 설혹 가능하대도 티끌만 한 부자유가 아주 조금이라도 병들게 한 널 손아귀에 쥐는 사랑은 싫었다.

자유 따위 없는 이 거칠고 황량한 세상에서 나 하나만은 네게 자유로이 머물 곳으로 화하고 싶었다.

난 널 숨처럼 마시며 살아왔는데. 적어도 널 만난 이후 내 삶의 중심엔 언제나 네가 있었다.

그럼 네가 없어진 난 뭐지? 널 잃은 날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나?

지금의 난 이제까지 긴긴 시간 모은 눈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너 혼자만의 다음번 행복을 위한 바다 거품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긴 싫은데.

“아어…….”

극복할 수 있었잖아. 이렇게까지 쉽게 내던질 사이는 아니잖아. 그렇게 무능력한 우리가 아니잖아.

난 그냥 네가 외롭고 힘들 때, 그리고 네가 마침내 뿌리내릴 그 순간에 너와 함께하고 싶은 것뿐인데.

네가 기쁠 때 옆에서 웃어줄 사람은 나 아니어도 많으니까, 그렇다면 나만은 슬픈 네 옆에서 너 대신 큰 소리로 울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네 눈물겨운 종착지면 족했다.

왜냐면 네가 날 용기 나게 하니까. 너만이 아낌없이 주고 싶은, 내 영원한 소년이니까. 내가 이때까지 소중히 여겨 보살피고 관심을 쏟고 마음을 바쳐 위해온 단 한 사람이니까.

내 곁의 가족도 친구도 동료나 선후배도 모두 고맙고 좋은 사람이지만, 그중 누구도 내 가장 쓸쓸하고 비밀한 외로움까지 채워주진 못한단 말이야. 그건 너만 할 수 있단 말이야.

“흑, 긋…….”

예전처럼 예쁘게 만나고 싶었는데. 그때처럼 남부럽지 않게 다시 사랑하고 싶었는데.

“븜. 으.”

언제부턴가 우린 우산을 따로 쓰게 되었다. 그런데 기억하니.

지난 장마 때 횡단보도에 서있던 여자애가 우산 없이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고 네가 네 우산을 말없이 쥐여줬잖아. 네 친절에 감동하기도 했지만, 네가 좋은 녀석인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보다 네가 그 후 내 우산 안으로 들어오던 순간에 널 올려다보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네 그 별것 아닌 행동에 몇 년 사이 그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우린 한 번 더 한 우산 아래 서봐야 한다. 그래야 한다.

네가 까마득한 옛날 나한테 무심하게 던져줬던 목캔디 생각이 난다.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그날이 밸런타인데이였지.

그래도 예전엔 그런 날도 왕왕 챙기고 했잖아. 다시 그렇게 잘 지내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니야, 이 자식아.

“후, 윽…….”

나도 그 애처럼 너랑 며칠씩 아무 방해 없이 밤낮으로 뒹굴고 싶었다. 핸드폰 따윈 던져버리고 세상이랑 아득히 멀어진 채 침대를 어지럽히고 그 위에서 배를 채우고 거기서 꼼짝 안 하고 싶었다.

또 사실은 나도 그 애처럼 널 놀리고 골리고 못살게 굴고 싶었다. 너한테 심하게 대하는 그 애를 흠씬 때려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네가 그걸 싫어하기는커녕 몹시 즐거워하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

내가 언제나 하고 싶은 건, 무언가에 열중하는 네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어깨를 감싸 안기. 우리 둘만 아는 농담으로 바깥에서 실성한 듯 웃어젖히다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눈총 받기.

전처럼 너랑 마트에서 다정하게 장을 보고 싶다. 카트에 넣을 것과 뺄 것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싶다.

무겁다고 질색하는 네 무릎을 베고 눕고 싶고, 네 머릴 붙잡아다 내 무릎에 누이고 싶다. 네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여주고 내 얼굴에도 마스크팩을 붙인 다음 시원한 거실 바닥에 늘어지고 싶다. 그 애처럼 나도 너랑 섹시한 마사지를 주고받고 싶다.

초등학생 유치원생보다 더 유치하게 티격태격하고 싶다. 따듯하게 보일러 땐 방바닥을 구르며 종일 만화책을 보고 싶다.

비 오는 날 부침개 부쳐 먹기. 네가 끓여온 라면을 국물까지 싹 비우기. 내기 포커나 맞고 치기. 진 사람이 설거지하기.

너와 가끔 걸으러 나가긴 하지만, 더 자주 개천을 따라 산책하고 싶다. 아예 매일 조깅이나 러닝을 하는 건 어떨까. 땀 흘려 끈적끈적해진 얼굴로 청소년 시절처럼 건강하게 웃고 싶다.

운동한 보상으로 아이스바를 하나씩 물고 시원한 맥주 캔까지 한가득 사서, 집에 오자마자 잽싸게 냉동실에 넣어놓고 옛날처럼 같이 샤워하고 싶다. 네가 내 머리를 감겨주고 내가 네 머리를 감겨주고, 나와서 머리를 서로 말려주고, 그때처럼 네가 네 옷을 나한테 입혀주고, 난 네가 근사한 몸에 순백의 티셔츠를 걸치는 모습을 훔쳐보다 얼굴을 붉히고 싶다.

샤워가 아니면 목욕도 좋다. 처음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땐 자취방에 욕조가 없어서 목욕은 못 했는데. 욕조가 생기니 인제는 같이 목욕할 일이 없다니.

욕조에 따끈한 물을 채우고 너랑 푹 잠기고 싶다. 몸이 찬 네가 밤에 잠을 설치는 일 없이 곤히 잘 수 있게 충분한 시간 욕조 안에 누워 장난치다 널 잠잠히 다독이고 싶다.

네가 사진 찍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랑 사진 몇 장은 꼭 더 남기고 싶다. 우리 앨범을 만들면 좋겠는데 그건 절대 안 될 거 아니까 양보한다고 치자.

내가 너랑 찍은 사진을 얻다 올릴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게 다 간지럽고 죽어도 안 된다면 사진관에서 딱 한 장만이라도 제대로 찍었으면 좋겠는데.

작게 뽑아서 지갑에 꽂아두고 싶다. 그 어떤 절체절명의 순간이 와도 지갑 속 네 사진을 보며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비 오는 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한잔하기.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에는 우산 없이 나가서 너랑 미친놈처럼 신나게 뛰어다니다 두꺼비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싶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종점까지 가며 졸고 싶다. 내가 널 한창 쫓아다닐 때 버스에서 나도 모르게 잠들어서 종점까지 가버린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넌 그땐 그것도 몰랐지.

아니면 지하철역을 따라 걷는 것도 좋다. 차가 생기고부터 우리 사이가 부쩍 멀어진 느낌이 들었으니까.

가끔은 차를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차가 있어서 생긴 추억도 물론 많다.

네가 운전할 때도 네가 듣고 싶은 노래만 듣고, 내가 운전할 때도 내가 듣고 싶은 노래는 절대 안 틀어주는 너지만, 그래도 외식 후의 드라이브가 좋다. 그러니까 그것도 해야 한다.

호수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집으로 향하는 가로수길의 가로수 모양이 종종 생각난단 말이다. 으스스한 터널을 지나다 귀신을 목격하고 둘 다 놀라자빠지면 더 좋겠다.

온 집 안 불을 다 끄고 심장 떨어지게 무서운 공포 영화도 몇 편 더 봐야 한다. 아무렇지 않게 잘 보는 너에 비하면 내가 무서운 걸 너무 못 보긴 하는데, 그래도 봐야 한다.

영화관에 가서 심야 영화도 봐야 한다. 팝콘이랑 콜라 세트에 버터구이 오징어까지 사서 맛있는 냄새를 팍팍 풍겨야 한다.

아니면 어릴 때처럼 새벽 영화를 보러 동대문에 가고 싶다. 길이 남을 당대의 히트작을 보고 나서 나중에 그 영화 생각이 나면 ‘우리 그때 그거 봤잖아!’ 알은척 외치고 싶다.

네가 좋아하는 컴퓨터게임을 같이 해도 재밌을 것 같은데. 어디서 들었는데 커플끼리는 게임 아이디를 맞춘다고 하더라. 낯간지럽긴 하지만 게임 속 세상인데 뭐 어때.

아니면 집에 콕 박혀 닌텐도나 플레이스테이션을 해도 재밌겠다. 같은 편을 먹고 신나게 놀다가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몸짓으로 피자를 시켜서 잔뜩 먹고, 기름 묻은 손도 닦지 않은 채 다시 게임 삼매경에 빠지고 싶다.

벚꽃이 피면 돗자리 깔고 치킨도 한 마리 뜯어야 하고, 채신머리없지만 우리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 롯데리아에 가고 싶다. 아저씨 둘인 걸 들켜서 창피당하려나.

놀이공원은 몇 번 가봤지만 단연코 다시 가야 한다. 가서 머리에 쓰는 그것도 쓰고 추로스도 먹어야 한다.

꽉꽉 채워서 싸간 김밥 도시락을 흑맥주랑 해치워야 한다. 풍문으로 들어온 귀신의 집에도 도전해야 한다.

회전목마가 불을 밝히면 서로가 목마를 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남겨야 한다. 먼 훗날 보면 눈물이 핑 돌 만큼 예쁘게 찍어야 한다.

넌 아마 유치하다고 칠색 팔색하겠지. 근데 원래 유치한 게 재밌는 거다.

격년으로 에어쇼도 보러 가야 하고, 사주나 타로 같은 것도 재미 삼아 보러 가고 싶고……. 맞아, 아쿠아리움도 또 가고 싶다.

찜질방에서 서로의 머리통에 계란을 깨고 식혜를 빨아 먹어야 한다. 찜질방에야 가봤지만 서로의 이마에 계란을 깬 적은 없으니 말이다.

네 쇼핑은 지금도 종종 하니 특별히 다를 건 없는데, 내 쇼핑도 널 끌고 가보고 싶다.

등산은 질색이다. 그래도 너랑 등산은 꼭 한번 가야 한다. 가서 삶은 오리알에 겉절이를 걸쳐서 동동주랑 꿀떡꿀떡 넘겨야 한다.

몹시 더운 나라로 여행 가서 그늘에 누워 아무것도 안 하기. 아침부터 아침까지 물 대신 싸구려 맥주를 마시기.

몹시 추운 나라로 여행 가서 부둥켜안고 진탕 취하기. 비계 요리를 잔뜩 먹기.

배 타고 바다낚시 가기. 바다에 휩쓸릴까 봐 무섭긴 한데 내가 빠지면 건져줄 거지?

넌 나 아닌 누가 물에 빠져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구할 녀석인 걸 안다. 그래서 동생인 널 늘 존경했다.

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니까.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언제나 목숨 바칠 준비가 된 사람이니까.

너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난 다른 사람 아닌 네가 빠져야만 바다에 뛰어들 거다.

너한테 친구가 많았으면 좋겠다. 바람 상대 말고, 진짜 친구 말이다.

네 친구한테 애인으로 소개받고 시끄럽게 어울리고 싶다. 진짜로 너한테 친구가 몇 없는지, 없는 척하는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스무 살 무렵처럼 네가 술에 취했다는 전화를 받고 데리러 가고 싶다. 백마 탄 왕자같이 멋있는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나고 싶다.

개반떼라서 백마는 아니고 회색 개지만……. 그때 그 시절처럼 숙취 해소 음료부터 사서 먹이고 많이 힘드냐고 묻고 싶다.

그땐 나한테 술주정하는 네 모습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나왔는데. 지금 그래도 한숨은 쉬겠지만 속으로는 무지 행복할 것 같다.

날 밝으면 숙취에 해롱거리는 널 태우고 패스트푸드 DT점에서 아침 메뉴를 바리바리 주문하고 싶다. 타코나 부리토, 길거리 케밥도 좋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까먹기 시작한 네게 “나도,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싶다. 지저분한 케밥 때문에 배탈이 나서 종일 고생하게 된대도 너와 함께라면 즐거울 거다.

괴짜 같나. 그렇지만 너도 나만큼이나 괴짜니까 이해하겠지?

너와 캄캄한 시골길을 걸으며 하늘의 별을 세다 고라니와 마주치고 싶고, 무궁화호를 타고 기차 도시락도 먹어야 하고, 눈이 허리까지 쌓이면 눈싸움은 물론 궁전 같은 이글루도 지어야 한다. 눈 내리는 노천 온천도 좋다.

겨울에 스키장은 필수다. 언제처럼 몇 명이서 같이 가는 것도 괜찮긴 한데, 항상 너한테 치근거리는 사람이 생기니까 문제다. 여럿이 가면 방 잡고 자고 오니까 더 싫다.

겨울엔 겨울 바다도 보러 가야 한다. 촌스럽다고 해도 별수 없다.

회 한 접시에 소주를 적당히 하고 해변 옆 여관방에 들면 괜스레 낯설고 어색한 그 기분을 다시 한번 느껴야 한다.

여름 바다는 너무 당연한 얘기다. 살갗에 불이 붙을 듯 뜨거운 한여름이면 여름 노래를 들으며 아무도 없는 해변을 찾아 차를 세워야 한다.

모래를 밟고 만지고 모래에 누워서 엉덩이와 어깨를 비벼야 한다. 맥반석 오징어 두 마리처럼 거기 몇 시간씩 퍼드러져 있고 싶다.

또 네가 날 풍덩 소리가 나게 수영장에 집어 던졌으면 한다. 나도 널 밀어 빠뜨리고 나서 너와 야단법석을 떨며 물장난을 치고 싶다.

넌 관심 없겠지만, 사실 난 너랑 도서관에도 가보고 싶었다. 너도 학생 땐 종종 갔던 걸로 아는데 공부하러 가는 것 같진 않았다.

서점에서 서로 책을 골라주는 것도 좋겠다. 그래도 네가 만화책은 좋아하잖아.

클래식 공연을 보러 나가서 맛있는 저녁까지 하고 돌아오고 싶다. 오페라나 뮤지컬, 네가 원한다면 다른 공연이나 전시회도 좋다. 지역 축제, 아니면 그냥 동네 오일장이라도 너랑 가면 난 다 좋다.

바다 건너 록 페스티벌에 가서 내내 씻지도 않고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싶고, 아예 네가 좋아하는 밴드 투어 일정을 따라 나라를 옮겨 다녀도 재밌겠다. 나한테 그럴 여유는 없으니 생각만 할 뿐이지만…….

너 몰래 단지 앞 피아노 학원에서 연습해서, 언젠가는 깜짝 이벤트로 드라마 주인공처럼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그러려고 네가 좋아하는 곡도 몇 개 기억해두긴 했는데, 대부분 우울한 내용이라서 좀 그렇다.

생일처럼 중요한 날엔 낭만 있게 손 편지를 써주는 것도……. 아, 이건 너무 갔나.

가끔은 무리해서라도 하늘 높은 데 올라가서 배 속에 기름칠도 하고 싶고, 한강 유람선도 타고 싶다.

노친네 같다고 하겠지. 그렇지만 유치한 거나 마찬가지로 노친네 같은 일이 또 재미난 법이다. 그런 게 오히려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될지 모른다.

언젠가 나이 들어 마당 있는 집으로 가게 된다면 큰 개도 두어 마리 키워야 하고 텃밭도 가꿔야 한다. 과일나무도 심고 마당에서 솥뚜껑에 삼겹살도 구워 먹어야 한다.

텐트 없이 오지 캠핑도 하고 싶다. 두 원시인처럼 야생 속에서 너랑 나만 숨 쉬고 싶다.

번지점프는 남자 둘이 뛰면 좀 그러니까 따로 하더라도 꼭 해봐야 하고, 패러글라이딩이나 스카이다이빙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도 해봐야 한다. 널 스쳐 간 많은 사람 중에 너랑 그런 굉장한 경험을 해본 남자는 나뿐이었으면 하니까 무서워도 참을 거다.

또 갑자기 좀비가 나타나면 당황하지 않고 멋진 모습으로 널 구할 거다. 이미 머릿속에서 갖가지 버전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연습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당구장 가서 네가 좋아하는 당구도 원 없이 치고, 볼링장 가서 내가 좋아하는 볼링도 원 없이 치고, 필드는 자신 없으니 스크린 골프장에서 연습 좀 하자. 너나 나나 젬병이니 동의하겠지.

노래방도 안 간 지 오래됐네. 김지수 너 노래 하난 끝내주게 잘하잖아.

내가 너 노래하는 모습에 반한 것도 있단 말이다. 네가 얼굴이랑 노래 빼면 볼 게 뭐가 있냐. 농담이다.

이왕이면 노인 코래……. 아니, 코인 노래방이 좋겠다. 거기 가면 좁은 방 안에서 둘이 딱 붙어있을 수 있잖아.

번화가 야구 연습장이랑 펀치 기계 했을 때가 진짜 재밌었는데. 그때 우리 완전히 취해서, 기억나지?

네가 언제나 그러듯 누구랑 시비 붙어서 내가 수습하려다가 더 망치고, 거기서 네가 걔 얼굴에 세게 한 방 먹이는 바람에 결국 너랑 나랑 미친 듯이 뛰어서 도망갔잖아. 달밤에 추격전 하다 아침에 먹은 순댓국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무튼 오락실도 가야 한다. 내가 쪽팔려서 말은 못 했는데, 사실 너랑 스티커사진인가 하는 거 되게 찍고 싶었다. 근데 넌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찍어줄 거 아니까 이건 패스.

이쪽 밥집이나 술집, 클럽 같은 데도 한 번쯤 같이 가보고 싶다. 넌 벌써 여러 번 가봤겠지만 나도 너랑 그런 데 가서 커플인 티도 팍팍 내고,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숨통도 틔우고 싶다.

까짓거 춤 좀 못 추면 어때. 내가 몸뚱이를 흔드는 꼴이 안타까워서 네가 창피해하더라도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너랑 나만 있는 것처럼 신나게 놀고 싶다.

절대 재미없게 빼거나 쭈뼛거리지 않을 거다. 진짜다.

요즘은 잘 안 하지만, ‘아저씨처럼 말하기’나 “아, 왜 그러느뇨?”처럼 우리 둘만 아는 말투도 있잖아. 우리가 맨날 추는 웃긴 춤도 있잖아.

네가 흥얼흥얼 노래 부르다 혓바닥을 롤롤롤 굴리는 장난도 있고, ‘김지게’나 ‘변대갈’ 같이 유치한 별명도 있잖아. 그것도 다시 다 한 번씩 해보고 춰보고 불러봐야 한다.

커플룩이니 커플 신발이니 하는 건 너무 닭살 돋는 거 인정. 그래도 다들 하는데 아예 안 해볼 수는 없고 커플 반팔 후드티나 커플 빨강 뿔테안경을 맞춰보면 어떨까. 너무 티 난다면 커플 양말이나 팬티 정도는 괜찮지?

네가 우는 걸 본 지가 너무 오래됐으니 한번 세게 울려도 줘야 하고, 기억에 천년만년은 지난 것 같은 모닝콜도 필수다.

네가 아침에 귀여운 뽀뽀로 날 깨워줬으면 하지만 그런 일은 해가 서쪽에서 떠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포기다. 뭣보다 네가 늦게까지 자니까.

요즘은 그냥 밤새 퍼질러 놀고 들어와서 오후까지 안 일어나는 거지만.

질투하는 네 모습도 한 번쯤은 보고 싶다. 근데 네가 질투할만한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는 게 문제다.

일부러 네 질투심을 유발하기는 좀 그렇잖아. 어차피 효과도 없을 테고.

우리 둘만의 조촐한 언약식, 아니면 피로 계약을 맺는 건…….

네가 나 학교 다닐 때 정문 앞에서 기다려줬던 것처럼, 지금은 직장이 된 초등학교 교문 앞에는 못 서있어도 근처에서라도 날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 전에 출근할 때 아침 햇살 아래 너와 함께 집을 나서고 싶다.

네가 어디서라도, 어느 것이라도 일을 시작하길 바랐다. 네가 일하는 모습, 일하고 돌아온 모습, 퇴근하고 나서도 늦게까지 공부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질까를 상상했다.

피곤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쓴 네 섹시한 얼굴을 몰래 건너보고 싶다. 내 흐뭇한 바보 표정을 들켜서 네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물러나서 널 위한 건강 음료와 간식을 준비하고 싶다.

오늘은 어땠느냐고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네가 마치 ‘여러 가지로 골치는 썩 아프지만 큰일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히어로 보듯 우러르며 눈을 반짝이고 싶다.

근무 시간엔 우리 어릴 때 종종 서로 보내곤 했던 음란 메시지를 나눠보는 것도…….

근데 난 김지수를 갖고 계속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왜 이런 망상을 하지?

우린 헤어졌는데.

눈의 초점을 거두어 머그잔을 바라보았다. 더는 김이 나지 않았다.

“…….”

헤어지는 것 말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지수야.

난 그냥 너랑 한없이 가깝고 싶어. 너랑 내가 한 치도 다르지 않았으면 싶어.

따듯함을 느끼고 싶어. 널 안고 네게 안기고 싶어.

네가 날 든든하게 느낄 수 있게 강한 남자처럼 널 꽉 안고 싶고, 세상 불쌍하고 못난 거지발싸개처럼 네 발밑에 무너져서 네게 안기고 싶어. 네가 날 아주 조금만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어떨까를 매일 마음속에 그려.

무서운 꿈을 꾼 날에 버릇처럼 네 품을 찾아 파고들고 싶어. 네가 잠결에 귀찮은 내색을 하면서도 날 향해 팔을 열어주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내 뒤통수와 등허리를 무심한 손길로 몇 번 툭툭 쓰다듬은 네가 다시 잠들었을 때 내는 숨소리를 듣고 싶어. 그 소리를 세다 소리에 맞춰 잠들고 싶어.

또 손을 잡고 싶어. 네 커다란 손을 꼼꼼히 매만지다 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서 꼭 그러잡고 싶어.

난 내 뜨거운 손이랑 다르게 시원한 네 손이 좋은데. 내 손의 온기로 네 손을 덥힐 때마다 내 마음까지 함께 전해지는 것 같았는데. 너도 그걸 느낀다고 믿었는데.

몇 번이나 널 끌어안고 조르고 살을 부대끼고 얼굴을 비비고 싶어. 네 팔을 끌어당겨 내 품 깊숙한 데 감출래.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그저께 밤 오랜만에 했지만, 더 많이 해야 했다. 귀에 딱지가 앉게 해야 했다.

귀를 파준 지도 너무 오래됐다. 손톱 발톱을 깎아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서로의 머리에 붙은 왕비듬을 떼주면서 덤 앤드 더머처럼 좋아라 했잖아.

그땐 네가 잠들기 전에 내가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도 기꺼워했잖아. 자장가라기보다 그냥 콧노래였지만, 그게 더 좋으니 계속해달라고 그랬잖아. 그러고 보면 나도 너한테 차츰 안 해주게 된 게 참 많네.

그때의 넌 어디에 있니. 잠시 숨었니.

언제 다시 내 앞에 나타나줄 생각이었는지. 늦어도 좋고 아주 잠깐이어도 좋으니까, 네가 아직 있단 것만 내게 확인시켜줄 순 없었니.

아주 사라지진 않았을 걸 믿지만 그래도 가끔은 확인받고 싶었는데.

대청소 날이면 말없이 쓰레기를 들고 나가는 네 듬직한 뒷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으니까 적어도 대청소 날까지는 헤어지자고 말하면 안 됐다.

너무 일렀다.

우린 해야 할 게 많은데. 너랑 못 해본 게 아직 너무 많은데.

우리 지난 추억 속 장소도 한 번씩은 꼭 다시 가봐야 한다. 우리가 들렀던 식당, 카페, 술집과 가게에 머물며 얼마간 시간을 보내봐야만 한다.

우리가 살던 집. 다니던 학교. 서로를 찾아 헤매던 그 동네와 같이 걷던 거리의 모든 길을 새로 밟아봐야 한다. 언젠가 놀러 갔던 촌구석 여행지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를 달려봐야 한다. 차 안에선 그때 우리가 듣던 유행가가 흘러나와야 한다.

그 시절에 네가 얼마나 날 사랑해줬는지, 난 그때 얼마나 서툴렀는지 돌이켜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정말 헤어지는 게 맞는지 깊게 되짚어야 한다.

이름 모를 촌스러운 펜션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땐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를 마시면서 반드시 우리 옛날이야기로 울고 웃어야 한다. 그러다 알맞게 취하면 불을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우린 분명 같은 기분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내가 말 안 해도 네가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네가 말 안 해도 난 네 마음을 안다. 그래서 더 널 포기하기 싫었던 건데.

너한테 해주고 싶은 게 한참 남았는데. 지금껏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는데.

네가 먹고 싶다고 해서 꽁치찌개 끓여주려고 사놓은 꽁치 캔도 찬장에 그대로 있다고. 꽈리고추는 오늘 안 하면 맛이 간단 말이다.

너 장조림 좋아하잖아. 감자볶음도 진미채도 계란말이랑 계란찜도 좋아하잖아.

그거 다 해줘야 하는데 이게 뭐야. 그니까 왜 일을 이렇게 만들어.

“……!”

소음이 귀를 찔렀다. 핸드폰이 울고 있었다.

김지수? 나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허…….”

알람이었다. 언제 아침이 된 걸까.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서니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그제야 피로가 몰려들었다.

현관문을 열 땐 김지수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없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왔나. 아닌가.

아, 당연히 안 먹었겠구나. 어차피 배도 고프지 않았다.

아침밥을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건 김지수의 지론이었다. 인제 나랑은 상관없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기어봉을 잡은 순간 오른쪽 눈에서 무언가가 굴러떨어졌다.

운전자는 실연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운전한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것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위험했다.

길거리와 신호마다 눈이 김지수를 찾았다. 혹 도로 위에 있는 건 아닐까 차마다 샅샅이 눈으로 뒤졌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김지수를 발견한다고 해서 어쩔 셈인 것도 아니었다.

교무실에 들자 내 괴물 같은 얼굴을 보고 다들 한마디씩 했다. 대충 둘러대고 직원 조례가 끝나자마자 특활실로 달아났다.

한숨 돌리고 나니 어김없이 김지수 생각이 났다.

지금쯤 뭘 할까. 그런 생각이었다.

어디 있을까. 그 애랑 있나. 아침 먹는 중일까. 아니지. 자겠지.

걘 뭐 하는 앨까. 김지수는 나랑 헤어져도 상관없나.

무슨 속셈이든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하겠지. 양심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김지수 네가 근데 사람이냐.

수업을 어떻게 했더라. 밥은 어떻게 먹었더라.

퇴근하려고 차에 올라 혼자가 되자 마음이 푹 꺼졌다.

김지수가 보고 싶었다.

이대로 집에 도착하면 지수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 기대 하나로 액셀 밟을 힘을 냈다.

차가 학교 앞 사거리에 서자 꽃집이 보였다. 지수와의 8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꽃을 한 아름 샀던 곳이었다.

“…….”

이렇게 청승 떨 거면서. 왜 객기 부렸을까.

지수가 와있다면 내 말실수를 인정하자.

결심하니 더는 괴롭지 않았다. 아픔이 씻은 듯 나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실로 진리였다.

막상 집 근처에 다다르자 혹 텅 빈 집이 날 기다리는 건 아닐까 싶어 단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돌았다. 김지수가 느지막이 마음 바꿔서 저녁쯤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차를 돌려 공연히 마트에 들렀다. 지수가 좋아하는 맥주와 안주를 사서 집에 도착해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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