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1. 김지수(4)
“헤어지자.”
김지수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제대로 들어놓고 쓸데없이 되묻는 건 김지수의 유구한 버릇 중 하나였다. 하기야 놀랄만했다. 8년을 만나면서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헤어지잔 소리를 입 밖에 낸 적 없었다.
아무리 김지수가 꼴도 보기 싫고 갖다 버려버리고 싶고 차라리 두들겨 패서 불구로 만든 다음 들어앉혀 놓는 게 낫겠다 싶고 어쩔 땐 그냥 같이 죽어버리고도 싶어도, 그래도 장난으로나마 헤어지잔 말은 물론이고 비슷한 내색조차 해보지 않았다.
널 그동안 묵묵히 감내해온 내가 그런 말을 무심코 내뱉는다면 너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을지도 모르니까. 애초에 헤어지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왜?”
김지수는 지금 나한테 왜냐고 묻는 걸까. 비뚠 나무처럼 뻣뻣한 몸을 바닥에서 일으키려고 몸부림치며 말했다.
“핸드폰 줘.”
“뭐 하게.”
“핸드폰 내놓고 둘 다 나가.”
“싫어.”
“그럼 내가 나갈게.”
“진짜 나랑 헤어지게?”
김지수가 황당하다는 투로 물었다. 찌르듯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상하게 가슴이 문드러졌다.
“……어.”
대답하기 힘들었다. 머리끝까지 치솟은 불을 단숨에 꺼트릴 만큼 섧게 끼치는 감정이었다.
“변대훤.”
김지수가 내 이름을 부르자 언제나처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해 고개를 들었다. 헤어짐을 결심한 순간에도 내 몸에 축축하게 들러붙은 습관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답 안 해?”
대답 대신 지수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8년 동안 미친 듯이 사랑하고 헌신을 바쳐온 개자식이 거기 있었다.
“너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지.”
김지수가 비웃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장난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상관없었다. 김지수가 아닌 어린 남자를 힐긋 보고 말했다.
“친구도 얼른 집에 들어가. 세상 안 무서워?”
그런데 어린 남자가 별안간 김지수를 찾았다.
“자기야.”
“어?”
“얘 뭔데?”
어린 남자가 말하는 ‘얘’란 나였다. 어린 남자가 김지수에게 거듭 물었다.
“얘 뭐 하는데?”
“뭘 뭐 해?”
김지수가 어벙하게 되물었다.
“얘 뭐 해서 먹고사냐고.”
“아아. 얘 선생. 아, 강사인가?”
“뭐 어디 학원 선생이야?”
“아니, 초등학교.”
“초등학교 교사라고?”
“아닌가?”
“뭐 가르치는데.”
“멜로디언.”
“멜로디언?”
“아! 아코디언. 맞지?”
8년 만난 애인이 내게 확인하듯 물었다. 그걸 확인해야 아는 것도 따지자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뭐야. 정교산 줄 알았네. 그냥 기간제 돌보미 아니야. 근데 꼴에 선생질한다고 어제부터 싸가지 존나 없네.”
어린 남자가 날 똑바로 보고 말을 이었다.
“참 좆같은 것도 가르친다. 큭큭. 아코디언……. 수준 알만해. 요즘은 학교에서 애들한테 가르칠 게 그렇게 없나. 병신 같은 동네에서 어중간하게 악기 한번 시켜보려니까 저딴 거나 걸리지.”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매일같이 애들이랑 씨름하는 내가 남자한테 기가 죽을 이유라면 하나뿐이었다.
내 칙칙한 얼굴과 비교되는 남자의 탱탱한 외모 때문이었다. 어차피 다 끝난 마당인데도 어린 남자한테만은 뭐라고 받아칠 용기가 안 났다.
동물적 본능 같은 거였다. 어린 남자는 나랑 제대로 붙어보기도 전에 벌써 날 때려눕힌 지 오래였다.
“형.”
“윽, 겍.”
“나이 든 게 벼슬이에요?”
“…….”
“쭈글쭈글한 게 벼슬이냐고 묻잖아요. 형 나한테 한번 죽어볼래요?”
“…….”
“있잖아요, 형. 나 무서운 게 없거든요? 어떡할래요? 나요,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도 없다고요.”
“…….”
“형.”
“…….”
“그냥 꺼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