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마왕과 명장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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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방문한 리겐하르트의 요구로 인해 회의를 중단한 채 그를 따라나선 넬라넬라.
그는 마왕성의 재건 계획에 참여하지 않겠다 선언했으니 분명 공사 현장에 관한 용건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고 교류가 깊은 사이도 아니었고, 오히려 직접 마주하고 대화해 본 것은 오늘까지 세어 봤자 세 번째에 불과한 사이었기에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여지도 별로 없을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드워프의 살아있는 전설이 자신을 따로 불러낼 만한 이유를 짚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당당하게 발걸음하는 리겐하르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갈 뿐이었다.
“자! 이걸 자네에게 주겠네!”
“이건… 무엇입니까…?”
넬라넬라의 현장 집무실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공터에 도착한 리겐하르트는 커다란 목재 상자의 앞에 멈춰섰다.
상자의 내용물이 궁금했던 넬라넬라는 리겐하르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리겐하르트는 그저 상자를 열어보란 듯이 고개를 까닥거릴 뿐 내용물의 정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끼이이익
원목의 표면이 바스라져 목재의 먼지가 떨어질 정도로 낡은 상자였으나 뚜껑과 이어지는 경첩이 달려 있고 외관에 박힌 금속 테두리에 예스러운 덩굴 무늬까지 양각되어 있었던 고풍스러운 상자.
다소 육중한 무게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어 젖히자 낡은 경첩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건…”
“껄껄껄! 이 드워프 명장 리겐하르트 아르비미르가 손수 제작한 마력 무구일세!”
상자 내부에 들어있는 건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과 검, 그리고 방패였다.
은하수의 무리를 한데 모아놓은 듯 찬연한 은빛 광채가 상자의 밖으로 화사하게 새어나오고, 매끄럽게 깎인 마력석과 정교하게 양각된 복잡한 패턴의 문양이 고결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전설속에서나 들어봤을 드래곤 하트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짙은 진홍빛을 내고 있었던 타원형의 마력석은 루비 같은 보석으로 착각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그 심도 높은 마력이 피부를 타고 전해져 마력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걸… 왜 저에게…”
넬라넬라는 떨리는 음성으로 리겐하르트에게 이유를 물었다.
보기만 해도 전율이 흐를 정도의 보물이 눈앞에 놓여 있었고, 제작자인 리겐하르트가 자신에게 건네 주겠노라는 확답까지 한 상황이었음에도 넬라넬라는 그 무구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뭔가 떨떠름해 보이는구만. 무려 미스트릴(Mithtrill)로 제작한 것인데 별로인가?”
“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미스트릴이라는 귀중한 보물로 제작한 것은 몰랐습니다만… 리겐하르트님께서 제작하신 것이니 분명 한 나라의 국보 취급을 받아도 모자랄 정도의 귀한 보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미스트릴(Mithtrill).
신들의 땅 오드볼리스에서만 채취할 수 있다 하며, 악마나 언데드 등을 물리치는 파사(??)의 힘마저 담겨 있는 전설의 광물.
경도와 마나 운용력에 대해서는 아다만트나 스타더스트 등의 더 상위 등급을 차지하는 금속들은 일부 존재해 있었으나, 그것들은 손톱만큼의 양도 구하기 힘든 전설 취급의 보물들이었다.
거기다 경도와 마나 운용력을 동시에 최상위 등급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속은 오리칼쿰을 제외하면 감히 없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니, 미스트릴은 테라리스 역사상 최고의 금속 중 하나라고 손꼽을 수 있는 존재였다.
심지어 리겐하르트가 직접 제작한 무구라면 재료가 미스트릴이 아니더라도 분명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성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주저하고 있는 건가?”
리겐하르트는 오히려 더 의문에 휩싸였다.
자신이 제작한 물건의 값어치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선뜻 손을 대지 못하는 넬라넬라의 태도에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가… 이런 귀중한 것을 받게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폐하께 드릴 물건인 겁니까…?”
마왕에게 진상하는 물건이라면 오히려 이해가 될 일이었다.
하다못해 마왕군 최고 전력이라 손꼽히는 크로포드나 베아트리스 같은 강대한 간부에게 지급하는 물건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전력이 되지 못하는 미력한 자신에게 이런 보물을 지급해 준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인 것이었다.
복잡한 심경에 시선마저 떨려오고 있는 넬라넬라의 모습을 보며 리겐하르트는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허허!! 남들은 행여 마음을 돌려 무르기라도 할까봐 냉큼 손대기에 바쁜데, 우리 오크 아가씨는 사람이 참으로 순박하구먼!!”
“저는 크로포드님처럼 검으로 대지를 가르거나 카디스텔라님처럼 드래곤의 가죽을 손톱으로 벗기는 일 같은 건 못합니다! 그저 병사들과 함께 맨몸으로 부딪쳐 병장기를 휘두를 뿐입니다! 제게는 너무… 과분한 게 아닌지…….”
넬라넬라는 이 대단한 보물의 주인이 누가 되던 자신만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력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비행도 하지 못하며 특별한 신체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련을 통해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신체 능력을 보유하고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을 만큼의 검술을 보유했을 뿐이었다.
그저 두 다리로 지면을 박차고 달리며 오래 활동하면 여지없이 지치고 마는 평범한 존재인 것이었다.
눈앞에 놓인 미스트릴제의 강대한 무구는 평범한 자신보다 더욱 월등한 능력을 지닌 강자에게 주어져야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가씨에게 주는 걸세.”
“… 네…?”
“아가씨는 분명 마력을 사용해 마나 소드를 만드는 일도 하지 못하고, 마법도 사용할 줄 모른다. 내 그렇게 들었네만 이 말이 맞나?”
“네… 그렇습니다…….”
한치의 착각도 없이 정확한 리겐하르트의 말.
넬라넬라는 그의 말에 긍정하면서도 자신의 무력함을 언급하는 것 같아 어깨가 축 처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리겐하르트는 오히려 그런 자신 없는 넬라넬라의 모습에 더욱 흥이 돋는 듯 한층 더 경쾌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무구들에는 전부 마력석이 박혀 있지! 보이나!?”
리겐하르트는 진홍빛의 마력석들을 하나씩 짚어 보여주며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분명 검과 방패에도 마력석이 박혀 있었고, 갑옷에는 각 부위마다 마력석이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이 마력석의 주변으로부터 전체적으로 퍼져 나가는 문양, 이것은 마력 회로일세. 마력의 전체적인 보급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 그래도 모르겠나?”
“아…!”
리겐하르트의 간단명료한 설명에 넬라넬라는 비로소 어렴풋이 그의 의도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넬라넬라가 이해한 그의 의도는 분명 정답이었다.
“네로멜티아가 이야기 하더구만. 의기와 열정도 충만하고 검술도 오크군 최강의 검이라 불릴 정도로 탁월한데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크로포드 경한테 져버렸다지?”
“… 네… 그랬습니다…….”
과거의 아픈 구석을 찔러 오는 리겐하르트의 이야기에 넬라넬라는 다소 힘겨운 모습으로 답변했다.
헤모니겐트의 소드 마스터이자 블랙 나이트의 단장이라는 위대한 직함을 가진 크로포드에게 패배한 것이니 당연한 패배였다고 인정하고 넘어갔었던 사건이었으나, 패배는 패배였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쓰라린 감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팔십년을 조금 넘게 살아온 어린 오크가 수천 년을 살아온 소드 마스터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으나, 그럼에도 자신이 그동안 수없이 겪어온 단련의 순간들이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자 마음이 아팠던 것이었다.
그저 크로포드가 마나 소드를 사용하는 것으로 넬라넬라의 바스타드 소드와 카이트 실드는 처참히 갈라져 고철이 되어 버렸었다.
넬라넬라를 제압하는 일에는 그저 단 한 번의 참격으로 충분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그럴 일 없을 걸세! 이 무구가 있으면 아가씨도 마나 소드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
“그것 뿐인가! 방패와 갑옷에도 마나를 둘러 상대의 마나 소드를 막아내는 것 역시 가능하지!”
리겐하르트의 이야기는 넬라넬라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크로포드에게 무력화된 사건 이후 넬라넬라는 마나 소드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력을 다루는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그 힘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전투의 엘리트 집단인 블랙 나이트 단원들조차 마나 소드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할 정도였으니 그 경지는 분명 마력 훈련을 시작조차 못한 넬라넬라에게는 요원한 도달점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훈련 과정을 생략하고서 마나 소드를 사용할 수 있다니.
심지어 전신의 갑옷과 방패에 마력을 둘러 운용해 상대의 공격을 방어할 수도 있다니.
정말이지 꿈만 같은 이야기인 것이었다.
“나는 뭔가를 공짜로 해 주는 사람이 아니네. 천만금을 가져와도 내가 싫으면 그만일세. 그런데 네로멜티아가 부탁하더구만. 아가씨가 크로포드 경에게 지고 나서 울적해 하는 모양이니 그에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정말이지!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쉽게 패배하지 않을 정도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고 한소리 해 줬지!!”
“… 뭔가… 제가 죄송합니다…….”
넬라넬라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과를 건네기까지 했다.
내색하지 않겠다 노력했으나 네로멜티아에게는 자신의 우울함이 다 들통난 모양이었고, 그 때문에 리겐하르트까지 귀찮은 일을 떠안았으니 주변에 여러모로 폐를 끼쳤다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리겐하르트는 오히려 호방하게 웃으며 넬라넬라의 어깨를 힘껏 두드려 주었다.
“으허허허허허!!! 신경쓰지 말게나!! 이 미스트릴은 모두 네로멜티아 녀석이 준 거야!! 이 정도 되는 양의 미스트릴을 만져볼 일은 좀처럼 없거든! 기껏 해봐야 손톱만한 미스트릴에 강철을 부어 만드는 게 고작인데, 이토록 많은 미스트릴이라니!! 간만에 재미있겠다 싶어 흔쾌히 수락했지! 제작하는 동안 나도 퍽 즐거웠으니 걱정하지 말게!!”
“폐, 폐하께서…”
넬라넬라는 네로멜티아가 자신을 위해 이토록 귀중한 물건을 선뜻 내어주었다는 사실을 듣고서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전능한 마왕이라 할지라도 신들의 대륙 오드볼리스가 원산지인 미스트릴을 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었다.
심지어 신들과 적대 관계에 놓인 것이 마왕이었으니 더더욱 힘든 일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만큼 대단한 양의 미스트릴을 내어 주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사실상 이것이 네로멜티아가 가진 미스트릴의 전부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 그리고. 조금 남은 미스트릴은 내가 몰래 챙겨 두었다네. 이건 비밀일세? 껄껄껄껄!!! 아주 좋은 거래였어!! 아무렴! 드워프의 물건을 바라려거든 공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리겐하르트는 유쾌한 웃음과 함께 넉살 좋은 모습으로 넬라넬라의 등을 두드렸다.
다소 과장된 듯한 그의 유쾌함은 분명 자신의 노고는 신경쓰지 말라는 배려가 흠뻑 담겨 있는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마음 깊이 흘러나오는 감사함에 눈시울이 붉어져갔다.
이런 과분한 은혜를 받아도 되는 것인지 몸둘 바를 모르게 될 뿐이었다.
여전히 주저하는 넬라넬라에게 리겐하르트는 나무 상자에서 미스트릴제 검을 꺼내어 쥐여 주며 진지한 조언을 덧붙였다.
“쉽게 얻은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네. 앞으로 검을 뽑을 때는 신중하도록 하게나.”
쉽게 얻은 힘.
그 단순한 말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넬라넬라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검을 쥐기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이 힘을 얻을 자격이 충분한가.
복잡한 심경은 고민과 갈등에 물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겐하르트는 넬라넬라의 손을 감싸 검을 제대로 쥐여 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 힘에 대해 부정하는 건 아닐세. 결국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건 수단이 아닌 사용자의 의지니까 말일세. 다만 방향을 잃은 칼날만큼 위험한 게 없으니 힘을 얻은 만큼 앞으로는 검을 겨누는 일에 있어 더욱 주의를 기울였으면 하네.”
늙은 드워프 노인의 눈가가 구부러지며 잔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따뜻한 손을 가진 노인의 인자한 미소는 무척이나 푸근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나와 네로멜티아는 아가씨를 믿네. 아가씨는 바른 성품을 지닌 아이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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