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러스테리아는 다 컸습니다.
* * *
“이거 안녕들 하십니까! 반가운 분들도 계시는군요!”
“에에!? 니콜라스!? 리겐하르트!”
만찬장에 입장하자마자 경쾌한 인사를 건넨 인물.
자줏빛 안광이 유독 도드라지는 흑철의 갑옷, 리빙 아머 니콜라스 스트라스버그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서 말 없이 손짓만으로 가벼운 인사를 건네 오는 드워프 노인.
드베르그릭의 최고 명장이라 칭송받는 리겐하르트 아르비미르였다.
네로멜티아에게 한차례 혼이 난 카디스텔라는 기가 죽어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나, 갑작스럽게 등장한 과거의 인연들을 앞에 두고 다시금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 우아한 자태는 여전하시군요! 으으음!! 레이디 카디스텔라!! 변치 않은 아름다움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니콜라스님!!”
“오! 레이디 러스테리아!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습에 없는 심장마저 뛸 지경입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신장이 오백 멘톨에 달하는 거대한 풀 플레이트 아머는 그 육중한 크기가 무색할 정도로 재빠르게 러스테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니콜라스는 러스테리아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췄으나 그의 체격이 워낙 거대한 탓에 여전히 러스테리아보다 머리가 높았다.
그러나 니콜라스가 상체를 힘껏 숙이자 비로소 눈높이가 동일한 선상까지 낮춰지게 되었고, 그레이트 헬름 내부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한쌍의 자줏빛 안광이 러스테리아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드넓은 우주를 담아 작은 보석으로 빚은 듯한 신비로움! 그 내면에서 느껴지는 때 묻지 않은 순수! 여전히 제 영혼을 뒤흔들어 놓으시는군요!!”
러스테리아는 천 년만에 예고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니콜라스에게 상당히 놀라 있었고, 심지어 그가 만찬장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신에게 다가와 몸을 낮추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눈을 크게 뜬 러스테리아의 눈망울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재회의 기쁨과 상대의 무사(無?)에 대한 환희, 갑작스러운 만남에 대한 당황과 놀라움.
온갖 극적인 감정들이 어우러져 러스테리아의 이성을 어지럽히고 있는 가운데, 니콜라스는 놀란 러스테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 사이도 없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고 자신의 그레이트 헬름에 러스테리아의 손등을 갖다 대었다.
고귀한 레이디에게 기사가 갖추는 예를 충실히 실현한 것이었다.
“어머, 카디스텔라님이나 저도 있는데 비서관님께만 입맞춤인가요? 섭섭해라.”
“음후후후. 우리 비서관님은 특별하니까요!”
악마치고는 아기나 다름이 없는 열 살의 나이에 소환된 러스테리아.
서큐버스들의 어머니 릴리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도 전에 소환되었기에 러스테리아는 십 년을 제외한 유년기 전부를 마왕성에서 지냈다.
러스테리아에게 있어서 지옥은 형식상의 고향일 뿐, 그녀의 진정한 세계는 이곳 테라리스였고 마왕성은 그녀의 집이요 가정이었다.
마왕성의 많은 이들이 어린 러스테리아를 친절히 돌보아 주었었고, 그중 니콜라스는 도드라질 정도로 열성적인 보호자였다.
니콜라스에게 있어서 러스테리아는 마왕성의 모두와 함께 키운 소중한 아이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우리 비서관님, 못 본 사이에 어엿한 레이디가 다 되셨군요. … 으흑! 이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시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이 니콜라스! 공허의 강을 건너 명계에 발을 들인다 하여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주인님하고 결혼할 거예요!”
벅차오르는 감상에 훌쩍이기 시작한 니콜라스는 진심으로 감격한 모양인지 그의 안광이 한여름의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잠시 뜸을 들였을 때, 그에게서 쏟아진 이야기는 다름 아닌 러스테리아의 결혼.
눈치를 보아하니 그는 잠시 뜸을 들일 때, 러스테리아의 비어 있는 약지를 본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결혼 이야기에 러스테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소망을 여과 없이 내뱉어 버렸다.
그 순간 니콜라스의 안광은 꺼져 버린 촛불처럼 훅 사라졌고, 그는 잠시의 무거운 침묵을 가졌다.
“… 주인… 님…?”
“아아… 그러게… 천 년 만에 만났더니 러스가 드문드문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더라…? 요새는 아예 입에 붙어서 주인님이라고밖에 안 해!”
“아아. 주군을 이야기하는 것이었군요…….”
뭔가 당황한 듯한 기색의 네로멜티아는 그간 있었던 일을 주절주절 열심히 이야기하기에 바빴고, 그 모습은 마치 난처한 일이 들켜 변명을 하는 듯 보였다.
본래는 네로멜티아를 마왕님이라 칭했었던 러스테리아.
그러나 천 년 만에 만난 러스테리아는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섞어 쓰기 시작했고, 머지 않아 아예 주인님이라는 호칭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듣는 네로멜티아로서도 마왕님이라는 호칭보다는 주인님이라는 호칭이 더 설레고 마음에 들었기에 전혀 제지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니콜라스가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 사이의 연애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는 자라는 것이었다.
“저는 소환된 서큐버스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니까 주인님은 주인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오호라. 서큐버스로서의 책임입니까?”
그레이트 헬름의 내부에서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한 자줏빛 안광.
니콜라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네로멜티아를 바라보았다.
명백한 노기가 느껴지는 그의 안광은 기름을 잔뜩 먹은 횃불처럼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가 없었던 시간 동안… 혹시 우리 순진한 비서관님을 벌써 어떻게 하신 건 아니시겠지요? 그렇겠지요, 주군?”
니콜라스에게는 안된 이야기겠으나 그가 없었던 헤모니겐트 멸망 이후의 시간은커녕 헤모니겐트가 한창 건재하던 시절에서부터 네로멜티아는 러스테리아와 사랑을 나눠 왔었다.
애초에 네로멜티아는 아름다운 악마 여성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이유로 소환 의식을 행했고, 그에 응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이 러스테리아였기에 너무도 당연한 결과인 것이었다.
오히려 아기나 다름이 없는 러스테리아가 소환에 응한 것이 이상한 상황인 것이었었고, 지옥으로 가져갈 보상이 아무것도 없는 계약 상황에서 현세의 삶이 궁금하다는 호기심에 대뜸 소환에 응한 아기가 이상한 것이었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러스테리아가 응한 계약의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을뿐더러 자신이 마왕성에 건재하던 시절에도 이미 마왕과 비서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관계였다는 사실 역시 모르던 상황이었으니, 러스테리아를 딸처럼 여기던 니콜라스로서는 러스테리아의 선언이 충격 그 자체인 셈이었다.
네로멜티아로서는 자신의 여성 관계를 딱히 은폐하거나 숨기지는 않는 성격이었으나, 과거에는 백성들의 수도 방대했고 국가의 규모도 거대했던 까닭에 마왕으로서의 위엄을 생각해서라도 딱히 티를 내고 다니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네로멜티아의 연인 관계에 대해서는 눈치가 비상한 이들이 아니라면 눈치를 채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심지어는 마왕이 여성 취향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기에 네로멜티아는 관심도 없는 남성들의 수많은 청혼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마왕의 위엄을 세우는 일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 행한 일이었을 뿐, 충성심 강한 소수의 백성들만이 남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딱히 필수로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나 러스테리아랑 그렇고 그렇다! 내가 마왕이고 소환한 주인인데 그러면 안 되냐!”
“저는 주인님을 제일 좋아해요!”
“러스도 내가 좋다잖아! 눈에 불 켠 거 화력 좀 안 줄일래!?”
천 년 만에 부활한 이후로 네로멜티아는 여러모로 변한 부분이 많았다.
지금과 같이 거리낌 없는 진솔한 태도.
과거에도 네로멜티아는 마왕치고 상당히 유연한 인물이었으나, 현재는 아예 자유를 만끽하려 마음 먹은 듯 보였다.
“후후후. 아무렴 어때요. 비서관님이 행복하면 된 거 아니겠어요?”
“흠흠. 그래! 러스테리아가 어린 아이도 아닌데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 그리고 네로멜티아 정도면 아주 훌륭한 상대지 뭘 그래! 헤모니겐트에 네로멜티아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어디 있다고!”
아예 당당하게 치고 나오는 네로멜티아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힘껏 내뱉은 러스테리아.
그녀들의 뒤로 헤스티니아와 리겐하르트가 지원에 나섰다.
나긋한 분위기의 헤스티니아와 호방한 분위기의 리겐하르트.
각각 태도와 말하는 방식은 달랐으나 한 쌍의 연인들을 위해 나섰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조력자인 것이었다.
“나는 오늘 당신을 처음 만났지만, 적어도 당신이 주군의 부하인 건 알아. 그런데 부하된 입장에서 주군이 누구와 무얼 하시든 참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심지어는 오운까지 가세해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어디든 공식적인 석상이나 회담에서는 말을 아꼈었던 오운마저 한마디를 거들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얼음장.
니콜라스는 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활활 타오르기 직전이었든 그의 안광은 기세가 팍 죽어 버렸고, 다소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저는… 혹시나 러스테리아님이…”
“주인님! 저 배고파요!”
그나마 겨우 내뱉기 시작한 변명의 말조차 러스테리아의 가차 없는 외침에 툭 끊겨 버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영양가 없는 빈말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기에 아무도 니콜라스에게 동정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 만찬을 준비해 두고 너무 시간을 끌었어. 자세한 소개는 만찬을 시작하면서 하도록 하자.”
짝짝!
네로멜티아는 러스테리아의 요청을 즉각 받아들여 만찬의 시작을 알렸다.
네로멜티아의 가벼운 신호에 주방에서는 요리를 든 메이드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된 만찬에 모두의 시선은 준비된 요리들을 향해 있었고, 니콜라스는 쓸쓸하게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오백 멘톨의 거대한 풀 플레이트 아머가 그에 걸맞은 큰 의자에 앉자, 삐걱이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베리베리만이 니콜라스를 측은하면서도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바라볼 뿐이었다.
베리베리는 러스테리아에게 무시당하는 니콜라스의 모습을 보며 넬라넬라에게 잔소리를 할 때마다 무시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고 있었다.
베리베리는 어쩌다 보니 니콜라스가 지어야 했을 한숨을 대신 지어 주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