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만찬장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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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했던 일과의 열기가 식어가며 날이 저물었다.
마왕성의 재건 공사로 전력을 다해 피로해진 백성들은 식당에 들러 정성껏 마련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기력을 회복한 뒤 각자의 주거지로 향했다.
본래라면 저녁 시간이 끝난 이후에는 식당을 깨끗이 정리하고 다음 날을 위한 식재료 손질에 들어가야 했으나, 오늘만큼은 식당의 일정이 완벽하게 달랐다.
백성들의 저녁 식사를 위해 운영되었던 식당은 곧바로 풍성하면서도 정갈한 만찬장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식당의 조리 인력들은 베아트리스의 지시에 따라 백성들이 사용한 이후의 식당을 깨끗이 정리하고 청소를 마쳤고, 고급스러운 테이블 클로스와 은촛대를 배치했다.
이후 만찬에 참석할 예정인 인원수에 맞춰 매끄러운 감촉의 체리목 의자와 고풍스러운 은식기를 배치했고, 식당에 입장하기 전에 손을 씻을 수 있는 깨끗한 물이 담긴 그릇도 마련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준비는 이만 마치고, 각자 위치로 돌아가세요. 지금 퇴근하시는 분들은 내일 더 일찍 출근하셔서 오늘 마치지 못한 식재료 손질에 임하셔야 하니 서둘러 주무셔야 합니다.”
베아트리스는 만찬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인원을 나누어 절반을 거주지로 귀가시켰다.
만찬의 준비로 내일 분량의 식재료 손질을 마치지 못했으니 만찬의 시중에 필요하지 않은 절반의 인원은 내일 새벽에 일찍 출근하여 식재료 손질을 마칠 수 있도록 귀가시킨 것이었다.
만찬의 시중을 들기 위해 식당에 남은 인원들은 베아트리스가 사전에 지정한 임무에 따라 각자의 위치로 서둘러 이동했다.
정갈한 검은색의 예복을 입은 남성들은 식당의 정문으로 나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열을 맞춰 나란히 섰다.
하얀 드레스 셔츠에 검은색 베스트와 스트레이트 핏의 트라우저즈를 입은 여성들은 식당에 들어선 손님들의 착석 안내를 위해 식당 내부의 출입구 옆에서 나란히 대기했다.
풍성한 검은 드레스와 흰 프릴의 앞치마가 인상 깊은 하녀복을 착용한 여성들은 요리의 서빙을 위해 주방에서 대기하기도 했고, 손님들이 착석할 예정인 자리마다 한 명씩 배치되어 의자의 뒤에 서 있기도 했다.
순백색의 조리복에 풍성한 볼륨의 모자를 착용한 나머지 인원들은 주방에서 만찬을 위한 요리를 준비하느라 전투적으로 손을 놀리고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베아트리스는 주방의 중심에 서서 무언가 잘못 되는 것이 없는지 모든 상황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으나, 그녀 스스로가 먼저 나서서 일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베아트리스는 그간 자신이 육성한 인원들이 자신이 없더라도 제 몫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베아트리스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주방의 인원들은 하나같이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베아트리스는 느긋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교육은 엄격하게 해왔지만 살아있는 존재가 늘 똑같은 성능을 보일 수는 없으니, 오늘만큼은 만찬의 진행에 차질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웬만한 실수 정도는 그냥 넘어가 줄 셈이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스의 싸늘한 지적을 받아본 이들이라면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밖에 없었으니, 전력을 다해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었다.
“넬라넬라님과 헤스티니아 위즈위치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메이드의 역할을 맡은 여성 하나가 첫 손님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 주방으로 달려왔다.
그저 평범하게 식당을 운영하는 일이라면 수없이 해왔었지만, 품위를 지키고 품격을 높이는 고위층의 만찬장 운영은 처음인지라 식당 내부의 인원들은 모두가 긴장감이 역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긴장했다고 해서 흐트러지거나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모든 것은 예정된 순서대로 정확하게 흘러갔다.
“어서오십시오. 예정된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어머, 늠름하기도 하셔라….”
드레스 셔츠에 베스트, 트라우저즈.
아리따운 외모의 여성임에도 남성용 정장 세트를 착용한 안내인은 절도 있는 인사와 함께 안내할 자리로 앞장서 나아갔다.
넬라넬라는 차분하고도 강직한 모습으로 짧게 감사를 표했고, 그녀의 모습은 남녀의 성별을 떠나서 누구나 호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단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스티니아는 정중한 모습의 안내인을 향해 끈적한 눈빛을 보이며 난처한 손님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황홀하기까지 하다는 듯 자신의 두 손을 포개어 가슴 위에 올려 두고 농염한 미소를 한껏 드러내는 모습.
평범한 여성이었다면 헤스티니아가 보이는 노골적인 추파와 유혹적인 몸짓에 난처함을 표하며 사고가 정지해 버렸을 테지만, 베아트리스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안내인은 속이 시커먼 마녀의 손아귀에서도 결코 당혹감을 보이지 않았다.
“후후.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넬라넬라님의 자리는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 남작님의 옆으로 배정되어 있고, 헤스티니아 위즈위치님의 자리는 러스테리아 서비 아브노아 비서관님의 옆으로 배정되어 있습니다. 지금 안내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헤스티니아는 다소 놀랍다는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날린 추파는 사소한 장난을 위한 것이었고, 그것을 상대가 거절할 거란 사실 또한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바였다.
그러나 이토록 동요 없이 예의를 지키며 부드럽게 받아넘겨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상정하지 못한 상황에 즉각 대응하는 상황에서 이토록 완벽한 대처를 보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과 경험이 필요한 것이었다.
헤스티니아는 이들이 그간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은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놀라운 부분도 있었으나, 마왕성의 식당이 세워진 이래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을 떠올려 보자 이들을 교육한 베아트리스의 수완에 순수한 감탄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베아트리스님은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이라니까요. 마왕님 너무 부럽다…….”
머지않아 만찬장에는 예정된 참석인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넬라넬라와 헤스티니아 다음으로 크로포드가 입장했으며, 그 뒤로 아티스와 오운이 잇따라 참석했다.
그 뒤로 러스테리아가 만찬장에 도착했으나 육백 멘톨의 거구인 오운이 정문을 비집고 들어오다 끼어버렸기에 만찬장의 밖에서 그의 등을 힘껏 밀어주어야 했고, 만찬장의 정문을 다소 으스러뜨리며 넓히고 나서야 입장에 성공한 오운의 뒤로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이며 입장에 비로소 성공했다.
“우리 비서관님 땀 좀 봐… 어머, 고생 많으셨어요…….”
“하우으…….”
헤스티니아는 가슴의 사이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자신의 옆에 착석한 러스테리아의 땀을 정성껏 닦아 주었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체력 자체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러스테리아였기에, 육백 멘톨의 돌벽과도 같은 거구를 밀어붙이는 일은 상당히 힘겨운 것이었다.
러스테리아는 헤스티니아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식기를 조금 밀어 둔 채, 식탁에 엎드려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후로는 카디스텔라와 베리베리가 함께 입장했는데, 근래 사로잡은 휴미안군의 지휘관들을 고문하고 온 모양인지 조금 전 새롭게 얻어낸 정보의 신빙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말하지 않고 감추려면 감췄지, 이제 와서 그런 거짓을 꾸밀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들도 자신들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사실은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믿음은 정황상의 예측에 불과하지. 간사한 휴미안 놈들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결과가 있을 수도 있지. 거짓 정보로 인해 우리가 함정에 빠진다거나. 아니면 우리의 역습이 잘못된 정보로 인해 차질을 빚는 동안 구조 병력을 기다린다거나.”
“흐음… 그건 분명 있을 만한 일이로군요…….”
“그러니 우리는 그 정보가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또 다른 정보가 필요해. 그 뒤에도 수색대를 파견해서 모든 정보가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하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생기는 불상사는 정확히 차단해야지 않겠어?”
베리베리는 카디스텔라와 대화를 나누며 안내인을 따라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그러나 베리베리의 옆으로는 넬라넬라와 아티스가 자리해 있었으므로 카디스텔라는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앉아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대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동안 잘 생각해 보고 있으라구.”
“유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카디스텔라의 자리는 긴 탁자의 가장 끝에 위치한 상석인 네로멜티아의 자리 바로 옆이었다.
자신의 임의대로 자리를 고를 수 없어 대화가 끊긴 것에 다소 불만이 생기려던 참이었으나, 자신의 자리가 무려 네로멜티아의 옆이라는 사실에 카디스텔라는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후후후. 그래. 마왕과 함께하는 자리라면 나 정도 되는 존재가 어울리지 않겠어?”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배정받은 자리에 흐뭇해하던 카디스텔라는 문득 자신의 반대편 자리의 주인이 궁금해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대로라면 마왕의 옆이자 자신의 반대편의 자리에 앉을 만한 인물은 명백히 정해져 있었다.
여성을 좋아하는 네로멜티아의 특성상 마왕군 간부 중에서 그 자리를 배정받을 인물은 손가락에 꼽힐 만큼 특정되는 것이었다.
베아트리스는 현재 만찬의 진행을 총괄하고 있기에 합석할 수 없었고, 속이 시커먼 마녀는 네로멜티아가 애초에 곁에 두는 것 자체를 꺼린다.
결국 남는 것은 러스테리아와 넬라넬라.
그러나 그 둘은 이미 다른 자리에 앉은 상황이었다.
카디스텔라는 의아함을 느끼고 주변을 더욱 자세히 둘러보았다.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모든 마왕군 간부들이 이미 자신의 자리에 착석을 마친 뒤였다.
그럼 네로멜티아의 반대편 옆자리를 비롯해 남은 빈자리들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때 안내인의 낭랑한 음성이 주인의 방문을 알렸다.
“지고하신 마왕 폐하,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님께서 입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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