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하얀 가운과 커다란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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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과 동행하여 맥켄지 광산에 다녀온 넬라넬라는 돌아오자마자 설계도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맥켄지 광산에 체류한 지 사흘의 시간이 지났고, 그간 쌓여 있었던 업무는 휘하의 관리직들이 나름대로 알아서 처리를 했음에도 상당량 밀려 있었다.
그러나 넬라넬라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기에, 밀려 버린 사흘 치의 업무를 조금 더 미루기로 하고 눈앞에 직면한 긴급 업무부터 처리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긴급 업무라는 것은 마왕성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가축 90마리였다.
블랙 캐틀 40마리와 빅 보어 50마리.
드베릭 왕에게 산더미 같은 금화를 쏟아주고 데려온 귀한 식량.
이유나 방식은 그렇다 하더라도 일말의 준비도 없이 데려온 터라 마왕성에는 이 가축들을 키울 먹이는커녕 잠을 재울 축사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밖에 누구 있으면 잠시 들어와 보겠나?”
임시 방편으로 스토니 포트리스와 오우거 부족 마을에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작성한 넬라넬라는 그 두 장의 공문을 속히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찾았다.
그러나 넬라넬라의 부름에 응하여 들려온 음성은 넬라넬라의 예상을 완벽히 부수는 존재의 것이었다.
“네에~ 들어갑니다~”
“아앗…”
넬라넬라의 지휘 막사에 들어선 이는 헤스티니아였다.
평소와는 달리 연구자를 위한 하얀 가운에 큼지막한 안경을 착용한 헤스티니아.
그녀의 모습은 의복 그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분명 사무적이고 수수한 분위기가 날 법한 복장이었으나, 예상을 뒤엎고 첫인상부터 요염하고 관능적인 모습을 잔뜩 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운의 칼라가 무척 길고 헐렁하게 제작되어 있어 편하고 넉넉하게 입는 작업복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의상의 주인이 지닌 젖가슴의 커다란 크기 탓에 칼라의 넓은 사이로 도톰하게 꽉찬 윗가슴이 도드라지게 보이고 있었다.
본래 연구복 가운의 칼라 사이에는 그 안에 착용하는 드레스 셔츠가 보여야 마땅했으나,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네 개나 잠그지 않고 풀어헤쳐 활짝 벌려 놓은 탓에 젖가슴의 맨살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젖가슴 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라색 용액이 담긴 시험관 두 개가 꽂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빼앗아 젖가슴에 눈길이 가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헤, 헤스티니아님… 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우후후후. 카디스텔라님께 소식을 듣고 왔지요. 마왕님과 맥켄지 시티에 가셔서 새로운 가축들을 데려오셨다면서요? 아무래도 가축 관리에 협조가 조금 필요할 듯해서 찾아왔는데, 도착하자마자 힘껏 저를 불러 주시니 무척 반가웠답니다?”
“… 헤스티니아님을 부른 건 아니었습니다…….”
간략하게 상황과 용건을 요약하여 설명한 헤스티니아의 모습에는 장난기가 한가득 배어 있었다.
넬라넬라는 그저 부하를 아무나 불렀을 뿐인데 예상하지도 못한 헤스티니아가 들어와 버렸으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거기다 헤스티니아의 복장이 여러모로 과감한지라 눈을 둘 곳을 모르겠는 탓에 시선이 마구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 가슴이라도… 잠그시는 게…….”
“아응… 저도 잠그고 싶었는데, 가장 큰 사이즈를 골랐는데도 도통 안 잠기지 뭐예요? 원래는 정갈하게 넥타이까지 해줘야 하는 건데, 속상해라…….”
헤스티니아는 자신의 활짝 펼쳐진 드레스 셔츠를 최대한 끌어 당겨 보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컸던 젖가슴 탓에 단추를 잠그는 건 고사하고 열린 부분이 한데 모이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것 좀 보세요! 이렇게 안 잠긴다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잠그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내친 김에 헤스티니아는 넬라넬라의 앞에 자신의 가슴을 들이 밀고 드레스 셔츠의 잠기지 않는 양 칼라 부분을 잡아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젖가슴을 받치고 있던 드레스 셔츠가 연신 당겨지며 도톰하게 노출된 윗가슴 부분이 요란한 물결을 보이며 출렁대는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그 광경을 보는 것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돌린 채 한껏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넬라넬라는 목격하지 못했으나, 헤스티니아가 장난스럽게 실실 웃으며 넬라넬라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분명 헤스티니아는 넬라넬라를 놀릴 심산으로 일부러 야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인 것이 틀림 없었다.
“그나저나… 헤스티니아님께선… 혹시 시력이 좋지 않으십니까?”
“어머, 왜요?”
“그… 못 보던 안경을 쓰셨기에…….”
당황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말을 돌렸던 넬라넬라.
그러나 분명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꺼낸 화제였으나 내심 궁금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안경을 착용한 헤스티니아는 처음이기에, 혹시 시력이 좋지 않은 사실을 평소에는 감추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헤스티니아가 착용한 안경은 렌즈가 무척 크고 동그란 형태를 지니고 있어, 멋으로 착용할 만한 안경은 결코 아니었다.
시력이 매우 좋지 않은 이들이나 착용할 법한 커다란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으니 넬라넬라의 의문은 더욱 깊어지는 것이었다.
“에이, 이런 건 기분이에요. 기분 내기라구요.”
“… 기분… 입니까…?”
“후후후. 이렇게 연구자 가운도 입었고, ‘나 책벌레예요’하는 것 같은 커다란 안경까지 끼니까 진짜 업무에 찌들 대로 찌든 연구소 소장 같지 않나요? 의상만 입어선 어떤 연구자인지 잘 모를 테니까 이렇게 잘 보이는 위치에 시험관까지 두 개 꽂아 뒀어요. 잘 꾸몄죠?”
“…….”
헤스티니아는 마왕성의 마도 공학 연구소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티내고 싶었던 것 같았으나, 넬라넬라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건 너무 야하게 보여서 눈 둘 데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릴 용건은요, 제가 관리하고 있는 태고의 숲에서 가축의 먹이를 절반 정도는 부담할 수 있으니 우선 카보니 숲에서 나머지 먹이를 부담해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 마왕성의 농장 건설에 있어 우선시 되는 건 가축용 먹이 재배가 아니라 축사라는 거예요. 블랙 캐틀은 밀 같은 곡식의 줄기를 여물로 먹이면 되고 빅 보어는 카보니 숲에서 하시던 대로 남긴 음식이나 식재료의 버려지는 부산물을 먹이면 되겠죠. 태고의 숲에서 간간이 과일 같은 것도 채취해 먹일 예정이니 영양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예요.”
“…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건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을 텐데요……. 절반만 부담한다 해도 가축 90마리를 먹일 만한 자원을 언제까지 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아, 그건 매우 합리적인 의문이네요. 이해해요.”
가축 90마리가 먹어 치울 먹이의 양은 상당한 것이었다.
당장은 어떻게든 먹일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긁어 모은다 할지라도 언제까지고 그런 식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가축 먹이의 확보 루트가 있어야만 마왕성과 카보니 숲 주민들의 생계가 위협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블랙 캐틀과 빅 보어는 번식을 통해 헤모니겐트의 모든 이들이 고기를 양껏 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 수를 늘릴 예정이었기에, 미래의 문제는 당장의 상황 유지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보니 숲과 언더 바르커스를 제외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대지가 전혀 없지요. 그 외에 깨끗한 토양을 지닌 장소는 마왕성의 영역 뿐인데, 성벽 안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땅을 파헤칠 수도 없구요. 결국 마왕성 일대의 농사는 성벽 외곽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왕성의 성벽 밖은 온통 오염된 토지 뿐이지요. 가축을 위한 것이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든 농사는 오염을 정화한 다음의 일이라는 겁니다.”
“… 폐하의 마법으로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넬라넬라는 내심 마왕이라면 그 정도는 가볍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네로멜티아의 능력은 전능 그 자체였고, 백성들을 위해 무엇이든 준비해 줄 만큼 자애로우니 분명 당장 직면한 토양 오염의 문제도 필요에 따라 즉각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었다.
그러나 넬라넬라의 생각이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올 때, 넬라넬라는 자신이 얼마나 대책이 없고 안일한지를 스스로 깨달았다.
분명 마왕이라는 존재는 토양의 정화 정도는 가볍게 해낼 수 있을 것이나, 그런 마왕의 헌신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안일한 모습에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깨달으셨군요. 무엇이든 마왕님께 기대려고 하면 안 되겠지요. 분명 마왕님께 그 정도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겠습니다만, 그런 단순한 방법을 바라며 마왕님께 마냥 수고를 끼쳐 드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저도 모르게 폐하께… 너무 많은 것을 기대고 있었나 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도 온전히 폐하께서 베푸신 것이고…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닌데…….”
헤스티니아는 자신의 안일함을 불경하다 여기며 자책하고 있던 넬라넬라의 축 처진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 주었다.
겉으로는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아차 싶어 아찔해진 헤스티니아.
그녀는 단지 다른 방법이 예정되어 있다 이야기하려 했을 뿐인데 너무도 충성스러운 넬라넬라가 스스로를 책망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는 헤스티니아가 바란 상황이 결코 아니었으니, 우선 넬라넬라를 달래주며 그녀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서 설명을 이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죄책감 가지지는 마세요. 마왕님께 정말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게 맞으니까요. 사과를 포크로 깎아 먹는 것보다 쉬울 걸요? 그 정도는 넬라넬라님 입장에서 충분히 기대고 바랄 수 있는 게 맞아요. 전혀 무례한 게 아니라니까요?”
“… 그럴… 까요…?”
“다만 농지를 개간할 일부 대지를 정화하는 것 정도는 간단하다 해도 아스타리스 대륙, 아니 테라리스 전체를 마왕님께서 일일이 정화하시기에는 무척 힘드시겠죠? 언제까지고 마왕님의 손을 빌리기 보다는 조금 더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답니다.”
넬라넬라는 비로소 헤스티니아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마왕의 은혜를 너무도 간단히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은 넘겨 두더라도, 적어도 마왕에게 있어서 정화 작업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라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꺼낸 헤스티니아의 체계적인 대책이라는 이야기 또한 십분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돌 한 두 개를 쌓는 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그것을 모으고 모아 돌탑을 쌓고 성벽을 이루는 건 혼자서 하기에 너무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것이다.
정화가 필요할 때마다 마왕이 일일이 나서서 해결해 줄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더 정확했다.
“제가 전에 언급 드렸었던 오염 물질 정화의 대책… 혹시 기억하실까요?”
“… 설마…….”
헤스티니아는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지은 채 팔짱을 끼고 말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당당하게 자랑하는 의기양양함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스티니아가 이룬 성과는 분명 스스로를 자화자찬해도 될 정도의 대단한 위업이었다.
“키메라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왕님의 손을 빌릴 게 아니라 실전에 투입해 봐야겠죠? 농사는 그 다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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