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포상을 바라는 흡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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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에 눈부신 태양이 떠 있는 도시.
평범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하늘에 명백한 천장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단단한 암석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천장은 현재의 장소가 지하 세계라는 것을 인지시켜 주는 하나의 증명이었다.
그러나 지하 세계라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도 대기는 맑고 깨끗했다.
이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산과 숲 그리고 농경지 덕분이었다.
“흙 파먹는 난쟁이들 주제에 제법이네.”
“카디스… 말은 조금 예쁘게 해줘.”
“……. … 드워프 주제에 제법이야.”
현재 이 지하 도시의 광활한 농경지를 걸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성들.
바로 네로멜티아와 카디스텔라였다.
맥켄지 광산의 농업 구역을 거닐며 천천히 목적지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고, 겸사겸사 맥켄지 시티의 식량 사정을 더욱 면밀하게 시찰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나올 수가 있어? 난쟁… 드워프 왕 녀석은 말 그대로 눈 뜨고 코 베인 셈이잖아.”
“워낙 물욕이 강한 녀석이었으니까. 운이 좋았던 셈이지.”
“아니, 전혀. 물욕이 강한 녀석일수록 의심이 강하잖아. 혹시 손해를 보진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면서 말이야. 그런 녀석이 미끼를 덥썩 물어 버리도록 만든 그 책략이 대단한 거지!”
네로멜티아는 전날 밤, 넬라넬라가 몰래 외출을 한 동안 카디스텔라를 은밀하게 불러들였었다.
설계된 계획에 있어 카디스텔라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네로멜티아는 넬라넬라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 책략의 자세한 내막을 카디스텔라에게 설명해 둔 것이었다.
모든 설명을 듣고 난 카디스텔라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마왕에게 다시 한번 감탄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전 같았으면 주변 인물들의 극찬에 내심 불편해 하면서도 짐짓 모든 것을 예견한 척 마왕의 위엄을 세웠을 네로멜티아였으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순수하게 의기양양해하며 자신을 향한 칭찬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계획은 누가 뭐래도 네로멜티아 자신이 홀로 짠 계략이었기 때문이었다.
“자, 도착. 여기서 데려가면 돼.”
“오! 드워프들이 고기에 진심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힘든 시대에도 블랙 캐틀을 온전히 키우고 있을 정도라니 저력이 대단한 걸? 이 정도 규모면 먹이를 확보하는 일만 해도 보통이 아닐 텐데.”
마왕과 선혈의 여제가 당도한 장소는 맥켄지 시티 농업 구역의 가축 농장이었다.
대외적인 명분으로는 드베릭 왕과의 거래에서 정당하게 얻어낸 가축들을 마왕성으로 옮긴다는 이야기였으나, 네로멜티아는 카디스텔라에게 따로 지시할 사항이 있어 그녀를 이끌고 이 장소까지 동행한 것이었다.
드워프를 얕잡아 보던 카디스텔라조차 그들의 번성한 산업 규모에는 순수하게 감탄을 하고 있었고, 네로멜티아는 자신이 지시할 사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농장에 관심을 보이는 카디스텔라를 보며 잘됐다는 듯 내심 반가운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제부터 예정된 가축들을 확보해 마왕성으로 옮기는 작업을 할 거야. 우선 카디스는 그 어떤 드워프에게도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주의해.”
“그거야 쉬운 일이지. 어제 밤에는 더 대단한 일도 해냈잖아?”
“오늘은 이 농업 구역에 모든 가축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에 대해 추산하는 거야.”
“나는 추산 정도가 아니라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도 있는데? 나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 거 아니야?”
“오히려 반대야. 너무나도 유능한 우리 여제님을 이런 단순한 임무에 시간낭비하게 둘 수 없으니까, 대략적인 규모와 위치만 파악해서 귀환한 뒤에 네 뱀파이어 하인들을 부리면 되잖아. 정확한 정보는 그들이 모으면 되는 거고, 우리 여제님은 그렇게 아낀 시간에 마왕성에 산재해 있는 중요한 업무를 마저 해결하시면 되는 거고.”
“으윽… 결국 부려먹을 생각으로 가득한 거잖아…….”
분명 네로멜티아가 내린 지시는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으나, 현장에서 마왕이 직접 지시하는 중요한 책략을 손수 이행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끼고 있던 카디스텔라는 또다시 따분하고 재미없는 마왕성의 갖가지 업무들 속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자존심이 강하고 제멋대로에 예측 불허의 감정 변화를 지닌 카디스텔라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던 네로멜티아는 조용히 카디스텔라의 귓가에 그녀가 달가워 할만한 이야기를 속삭였다.
“일이 잘 해결되면 상을 줄 거야.”
“…!!”
카디스텔라의 안면에 가득했던 불만의 감정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잔뜩 찌푸려져 있었던 눈살은 활짝 펴지고도 모자라 눈까지 번쩍 뜨였고, 삐죽 나와있던 그녀의 입술은 쏙 들어가다 못해 입이 벌어지는 진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평범한 이들에게 상이라면 물질적인 부분을 생각하기 마련이었으나, 네로멜티아와 카디스텔라의 사이에서는 야릇한 교감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설마설마 싶어 기대감에 잔뜩 부푼 모습을 보이며 네로멜티아를 바라보던 카디스텔라.
연인으로서의 순수한 감정을 감추지 못해 표시가 날 정도로 드러내고 있는 카디스텔라의 모습이 퍽 귀여웠던 네로멜티아는 슬며시 웃으며 그녀의 기대에 쐐기를 박아 주는 것이었다.
“지난 번처럼 제멋대로 구는 건 안 되지만, 정도를 지키겠다고 약속한다면 마음껏 해도 좋아.”
“햐아아아아아…….”
네로멜티아는 분명 얼마 전에 함께 보냈던 뜨거운 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잔뜩 흥분해서 폭주해 버린 카디스텔라가 네로멜티아를 송곳니로 마구 찔러가며 최음의 마력을 밀어넣었던 사건.
그 결과 네로멜티아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저항을 택하며 카디스텔라의 손에 일부러 놀아나 주는 상황을 선택했으나, 이후 네로멜티아와 베아트리스의 짓궂은 보복으로 카디스텔라는 처참하게 실신해 버린 것이었다.
그 뜨겁고 거칠었던 밤을 언급했다는 것은 결국 네로멜티아가 내건 상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 바로 간다! 내가 진심으로 나서면 어떻게 되는지 기대해!”
스르르르륵!
잔뜩 흥분한 카디스텔라는 혈기가 극도로 타올라 안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면서 진홍빛의 안광이 번뜩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심장이 터질 듯 설레게 만드는 연인으로부터의 포상.
카디스텔라는 몸이 잔뜩 달아올라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뒤 그림자가 되어 자취를 감춰 버렸다.
네로멜티아는 추가로 더 지시할 사항이 있어 대화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었으나, 카디스텔라가 빠른 임무 해결을 위해 저돌적인 자세로 사라져 버려 다소 벙찐 표정을 짓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남은 지시 사항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 카디스텔라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그녀가 이성을 되찾게 되었을 때 차차 전달하면 될 일이었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이었다.
“실례합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는지요?”
“용건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무려 천 년 동안 데모니안이란 종족을 본 일이 없으니 분명 외부인이신데, 드베르그릭의 백성들조차 허가받은 이들 외에는 접근이 불가한 제한 구역에 발을 들이셨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체포할 수도 있습니다.”
네로멜티아가 뒤늦은 웃음을 지으며 카디스텔라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즈음, 농업 구역의 경비로 추정되는 병사 한 쌍이 다가와 네로멜티아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의 왕국 드베르그릭에서는 드워프의 가치관에 따라 최고의 가치를 자랑하는 물자 중 하나가 블랙 캐틀이었기에 그것을 지키는 경비 역시 삼엄할 수밖에 없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방문자에 대한 경계심은 높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굳이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하며 이들의 의심을 풀어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품속에서 의기양양하게 문서 하나를 꺼내어 내밀 뿐이었다.
그것은 마왕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에게 드베르그릭의 국왕 드베릭 록 하이젠버그의 이름으로 빅 보어 50마리와 블랙 캐틀 40마리의 이양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문서였고, 문서의 하단에는 국왕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상황이었다.
평생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은 어마어마한 사건에 두 드워프 병사는 입을 쩍 벌리고서 문서를 주의 깊게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마왕의 출현이라던가 엄격한 관리와 보호를 받는 가축들의 대량 반출이라던가 굳이 짚어 본다면 따지고 들 것이 너무나 많았으나, 결국 병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칙명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국왕의 직인이 위조된 것은 아닌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모양이 일치한다면 그것은 분명 국왕의 직인이 확실한 것이었고, 네로멜티아가 내민 문서의 직인은 그들이 알고 있는 국왕의 직인과 흠 잡을 데 없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그럼 모든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사실이라는 말이었다.
“전능하신 마왕 폐하께 결례가 많았습니다! 부디 뜻대로 하시길!”
네로멜티아는 모든 결례를 용서한다는 듯 싱긋 웃으며 예를 다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드워프 병사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다.
네로멜티아는 약속된 가축들을 차원 마법 ‘게이트(Gate)’를 이용해 안전하게 옮길 계획이었고, 이 일이 성공한다면 네로멜티아가 세운 책략은 안정기에 접어드는 것이었다.
번져나가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던 네로멜티아는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웃음을 몰래 흘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웃음이 어찌나 나빠 보이는지 다른 이들에게 마왕은 사악하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 주기에 딱 좋아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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