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러스테리아의 실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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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보고서들이 수북이 쌓여 산을 이루고 있는 집무실.
그 가운데에 하얀 드레스 셔츠의 간소한 차림으로 정신없이 정무를 보고 있는 크로포드가 있었다.
자신은 서류가 아닌 적과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기사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고 있지만, 애초에 이런 중대사를 처리할 만한 여건의 인물이 없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지적으로 뛰어난 인물은 마왕군 내에도 몇이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업무에 바쁜 상황.
러스테리아는 마왕 직속 비서관으로 주군이 처리하는 업무를 보조하고 있었고, 아티스는 제대로 된 국정 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재무 대신으로서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겉보기에는 그저 식당 하나를 운영하는 정도의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나, 깊게 들여다보면 식량 자원을 관리하는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베리베리는 카보니 숲의 영지 관리를 홀로 맡고 있어 자신보다 더욱 바쁜 처지였고, 넬라넬라 역시 마왕성의 재건 계획이라는 가장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어 마찬가지로 바쁜 상황이었다.
헤스티니아는 마도 공학을 위시한 온갖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를 총괄하고 있었고, 카디스텔라는 헤스티니아를 돕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영지인 크림슨 캐슬의 관리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군이 마왕군 중요 간부인 자신에게 마왕성의 관리 총책을 맡겼으니,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이 막중한 임무를 벗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한때는 염려스럽기도 했으나 의외로 마왕성의 내정은 잘 굴러가고 있었으니 적재적소에 인원을 배치한 주군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기사인 내가 이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했는데… 역시 주군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모양이다. 역시 지혜의 결정, 지고한 분…….’
네로멜티아는 단지 ‘크로포드 정도면 똑똑한 녀석이니까 언더 바르커스도 운영해 봤겠다,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정도의 가벼운 생각을 가지고 임무를 배정한 것이었으나, 크로포드는 네로멜티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간파하고 신묘한 지성을 가지고 인사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언더 바르커스를 운영하던 업무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관리 직책에 임했으나, 점차 세력이 늘고 마왕성이 재건되어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자 크로포드는 자신의 능력에 확신이 서질 않아 그다지 자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기사인 자신이 이런 중책을 맡아도 되는 것일까, 혹여 큰 실수를 범해 주군께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을 하던 나날이 있었으나, 크로포드는 의외로 모든 업무를 어떻게든 잘 소화하고 있었고 그런 자신의 생각지도 못한 능력에 그 자신이 놀라는 중인 것이었다.
“바쁘신 와중에 실례하겠습니다.”
“아, 들어오십시오.”
크로포드의 집무실 밖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오며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집무실에 들어선 이는 노쇠한 고블린인 아티스.
아티스는 크로포드의 허가에 따라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부하 고블린들을 시켜 자신이 준비한 서류들을 크로포드의 책상 위에 올려두도록 지시했다.
노쇠한 아티스 대신 무거운 서류를 들고 온 것으로 보이는 두 명의 고블린들은 서류의 무게가 상당하여 무척 힘이 들었던 모양인지 이마에 맺힌 땀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서류가 산을 쌓고 있었던 책상 위에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서류를 올려 두려고 애를 쓰는 고블린들에게서 직접 서류를 받아 자신의 앞에 내려놓은 크로포드.
자신들이 들고 온 서류를 직접 받아 들어준 크로포드에게 두 고블린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이건… 무엇입니까?”
“오호호호호! 이것이야말로 마왕성! 아니 헤모니겐트의 백성들 손에서 일궈질 자발적 발전의 기반입니다!”
간단명료한 자신의 질문에 아티스가 무척 추상적이고 시적인 대답을 건네오니 크로포드는 의문만 더욱 커지는 느낌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던 크로포드는 재차 질문을 하기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을 택했고, 서류의 첫 번째 페이지를 대강 훑어보았다.
“… 화폐… 입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화폐 생산을 준비하려 합니다!”
아티스가 가져온 서류를 몇 장 더 살펴본 크로포드는 자신의 생각보다 상당히 규모 있는 계획서에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운영 과정으로 서술한 보고서 따위가 아니었고, 하나의 큰 계획에 들어서는 제안서인 셈이었다.
아티스는 화폐를 생산하고 본격적인 유통을 진행할 생각인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써는 화폐를 사용할 정도로 물자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미리 준비하는 겁니다! 거기다 지성을 가진 존재라면 자신에게 물건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든 능히 쓰기 마련이지요.”
크로포드는 현재 마왕성에 식량 생산을 위한 인력과 재건 공사를 위한 인력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와중이라 곤란하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으나, 아티스는 무엇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마왕님께서 장인의 종족인 드워프들을 찾아가셨지요?”
“… 그렇습니다.”
“그건 분명 그들을 헤모니겐트에 영입하려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 네. 그건 분명히… 그렇습니다…….”
아티스는 어느새 강론하는 학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 자신이 그린 미래 계획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계획을 제시하며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선 그에 기반이 되는 설명이 필수였기에, 아티스는 주의해야 할 요점을 하나씩 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화폐를 생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재료가 되는 광석일까요? 드워프를 영입하게 되면 금속을 얻기 수월해지니 지금이 적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지만 논점은 아닙니다. 화폐는 모름지기 국가에서만 생산할 수 있어야겠죠?”
“아…!”
크로포드는 아티스의 이야기에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화폐의 일관된 정밀함.
그 누구도 쉽게 위조하지 못할 복잡한 완성도가 필요한 것이었다.
“복잡한 패턴을 넣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화폐에 동일한 형태로 양각되어야 하며, 국가 전체에서 두루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야 하지요. 그런 생산 기술은 평범한 대장간에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장을 만들어야 하지요!”
“아, 그래서 드워프가…!”
“바로 그겁니다! 지금 당장은 물물교환만으로 물자의 순환을 이룰 수 있다고 하지만 곧 마왕성의 규모는 순식간에 커질 겁니다. 그때까지도 물자를 주먹구구식으로 굴려선 곤란합니다. 국가가 모든 물자의 유통을 관리할 수 있는 제어책이 필요한 셈이지요. 그러니 화폐는 미리 준비되어야 하는데, 화폐를 생산할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크로포드는 아티스의 혜안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고블린이 가진 최대 수명의 끝을 달리고 있지만 나이를 따지자면 고작 오십.
오십 년이라는 짧은 세월 속에서 아티스가 쌓아 올린 지혜는 무척 경이로운 것이었다.
자신의 주군보다도 이백 년이나 많은 세월인 육천 년을 살아오고 있는 크로포드 자신조차 이러한 것은 맹점이었다.
더욱 많은 물자를 생산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생산된 물자를 제대로 굴려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티스는 그런 난제를 유통과 교환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해결해 줄 화폐라는 수단에 주목했고, 이미 그것을 어떻게 생산하여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까지 계획을 마친 것이었다.
“뭐, 여기서 대화로 모든 것을 설명해서야 계획서를 작성한 의미가 없으니 자세한 내용은 서류를 차근차근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끌끌끌.”
“잘 알겠습니다.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아티스님.”
자신의 주군이 드워프를 만나러 간 상황에 맞춰 드워프들을 이용하여 마왕성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적절한 계획을 작성해 온 아티스.
크로포드는 자신 역시 곧 합류하게 될 드워프 장인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드워프 장인이 마왕성에 합류한다면 당연히 넬라넬라가 맡고 있는 마왕성 재건 계획에 활용될 것이라 생각해 자신의 관할 안에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으나, 아티스의 계획을 듣고 마음이 달라진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무척이나 바쁜 인물들이었기에 아티스는 그만 말을 줄이고 집무실을 나서려 했으나 문득 의아한 소식 하나가 들려온 것이 떠올라 화제를 돌려 대화를 이어 나가게 되었다.
“그나저나 비서관님께서 사라지셨다면서요?”
“아, 네. 어제 아침부터 주군께서 러스테리아님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행방이 묘연한 까닭에 넬라넬라님만을 대동하고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아티스는 고개를 몇 번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무언가 잘못된 낌새가 보인 것은 아니었고, 이변이 뚜렷하게 드러난 것도 아니기에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으나 크로포드도 어느 정도 염려는 하고 있었던 상황.
그런 와중에 아티스가 해당하는 문제를 콕 짚어 들어오니 크로포드는 무언가 대처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비서관님이 지금 무얼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 찾아보긴 해야겠다 싶습니다만.”
“그럼 러스테리아님의 위치를 수색할 인원을 파견하겠습니다. 어제 하루는 몰라도 오늘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평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와중, 불현듯 두 사람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틀 동안 러스테리아를 목격한 이가 전혀 없다는 것.
혹시 러스테리아는 마왕성의 영역 안에 없는 것이 아닐까.
전능한 마왕인 네로멜티아라면 마력을 감지해서 러스테리아의 위치를 곧바로 특정할 수 있었을 테니, 네로멜티아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면 그리 큰일은 아닐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럼 아예 밖으로 벗어난 것도 아니란 이야기니 수색 범위는 더욱 좁혀지는 것이었다.
“저는 언더 바르커스에 인원을 파견해 보겠습니다.”
“그럼 저는 베리베리 남작에게 카보니 숲의 수색을 요청하도록 하지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러스테리아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마왕성의 동조 수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왕군의 간부가 셋이나 엮이게 되는 이 대대적인 수사는 그에 걸맞은 위엄은 없었고, 마치 미아 찾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만이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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