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드베릭 록 하이젠버그 (3)
* * *
드베릭 왕은 네로멜티아를 내려다 보며 대화를 나눌 작정이었다.
본래라면 서로 동일한 눈높이에서 마주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했으나, 굳이 알현실을 만남의 장으로 택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심지어 엄밀히 따지자면 마왕은 드베르그릭의 국왕보다도 한참은 높은 존재.
마왕이란 존재가 12신들과 마주하는 루이나의 권좌이니만큼 한 종족의 국왕 자리란 것은 비교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낮은 위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드베릭 왕은 자신이 마왕을 내려다 보는 상황을 택했다.
그렇기에 마왕에게 의자조차 주지 않고, 자신만이 세 계단 정도 높은 위치에 올려진 옥좌에 앉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마왕은 서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고, 그러고도 자신을 올려다 봐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것이라 생각했다.
드베릭 왕의 예상은 처참히 빗나갔다.
그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상황은 도리어 자신이 마왕을 올려다 보아야 하는 위치를 만들어 버렸다.
어디선가 허공에서 떨어진 거대한 석판은 하나의 거대한 연단과 같았고, 그 위에 자신이 앉은 황금의 왕좌보다도 더욱 위엄이 넘치는 코르니움의 옥좌가 나타난 것이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보석도 일절 없이 흑철로만 이루어졌음에도 양각된 상징들이 하나하나가 정교한 명장(名?)의 손길로 세공된 웅장한 예술품.
그것은 이미 옥좌나 왕좌를 넘어 제좌(??)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마왕이 그 자리에 앉자 드베릭 왕은 고개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짐의 자리를 준비하지 못한 것 같길래, 직접 마련해 보았다만. 마음에 드는가?”
“…….”
“부끄러워 할 것 없다. 아무래도 짐에게 걸맞은 자리를 만들기에 너의 역량으로는 부족했었던 모양이니.”
“그건…!!”
“아니라면. 혹여 ‘일부러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라는 건 아니겠지? 대지의 자녀들인 호탕한 드워프가 그런 옹졸한 짓을 할 리가 없을 텐데.”
드베릭 왕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네로멜티아의 말을 무언의 긍정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상대가 자신의 자리가 없다며 화를 낸다면 뒤늦게 천천히 준비를 해 주며 한참을 세워둘 계획이었다.
그저 자신의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서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멍청해 보일 모양새이니 드베릭에게는 이상적인 결과였다.
또는 상대가 이 불합리한 상황을 애써 무시하며 점잖을 떤다면 그것 또한 괜찮은 결과였다.
결론적으로 자신은 높은 왕좌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상대는 아래에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대화를 나눈 셈이니 성공적인 상황인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의 위치보다 더 높은 단상을 마련하고, 자신의 왕좌보다 더욱 웅장하고 위엄있는 옥좌를 꺼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뭐라 반박하거나 발끈해 버린다면 칼자루는 상대에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마왕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걸맞은 자리가 준비되지 않아 스스로 마련했다는데, 그것에 불쾌함을 표했다가는 상대가 자신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길 원했다는 속내를 만천하에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외교 상대를 기세 싸움에서 누르기 위해 옹졸한 방법을 사용하여 박대하려 든 왕의 모습보다는 왕위를 물려받고 나서 처음 겪는 외교이기에 다소 서투른 이유로 미처 제대로 된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왕이 그나마 나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허허허… 이거 인사가 늦었군… 짐은 드베릭 록 하이젠버그. 이 나라 드베르그릭의 국왕이라네.”
“플러피 피글렛.”
“…!!”
플러피 피글렛(Fluffy Piglet)은 돼지의 종류 중 하나였다.
성장을 마친 성체도 손바닥 위에 올려둘 수 있을 정도로 작았고, 심지어 대부분이 지방과 두꺼운 가죽이어서 만지면 뭉실뭉실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일품이었기에 애완 돼지로써 높은 인기를 자랑하던 소형종 돼지였다.
물론 아무리 귀여운 동물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돼지라고 부른다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드베릭 왕이 경악하는 것은 그것이 모욕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억은 나느냐? 네가 어렸을 적 네 아비가 너를 부르던 애칭이었지. 드로겐하임 녀석이 너를 너무 귀여워해서 그런 사랑스러운 애칭까지 붙여 줬었다만.”
“…….”
“네가 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기에 기억이라도 잃은 줄 알고 내심 걱정하여 언급해 보았는데. 어찌 기억은 무사히 잘 살아있는 모양이로구나.”
드베릭 왕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행여 마왕의 눈에 자신의 분노가 들킬세라 주먹을 아주 작게 떠는 소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마왕이 신하들 앞에서 드베릭 자신의 아버지인 선왕 드로겐하임에 대한 친분을 간접적으로 어필했기에, 마왕에게 하대를 고집하며 기 싸움을 벌일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서로에 대한 상하 관계가 더욱 명확해지는 순간이었기에 드베릭 왕은 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 오랜만입니다……. 네로멜티아님…….”
“흠.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 말투이긴 하지만… 짐은 관대하니 너그럽게 넘어가 주도록 하지.”
‘마왕 폐하’라는 호칭은 끝까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기에 그저 ‘님’이라는 존칭을 붙여 존대하는 것으로 대응한 드베릭 왕.
분명 잘 모르는 타인이 보아도 예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말투였으나, 네로멜티아는 오히려 존대가 나오긴 했으니 됐다는 식으로 여유롭게 넘어가 주었다.
“너는 상당히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구나. 살도 토실토실 오른 것이 잘 먹고 지내는 모양이고… 황금의 궁전에 온갖 보물들로 치장을 하고 있으니. 현재의 테라리스에서는 누리기 힘든 호사일 테지.”
그저 단순히 안부를 묻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쉬웠으나, 네로멜티아는 드베릭 왕을 에둘러 질책하는 것이었다.
죽음의 비가 내리고 대지가 썩어가는 처참한 세상에서 제 한 몸만 생각하며 사치를 일삼는 그릇된 통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왕도(王?)에서 벗어난 왕에게 낯이 부끄러워지는 불편한 훈계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드베릭 왕은 마왕이 전하는 쓴소리가 불편하기만 할 뿐이었고, 도리어 어떻게든 마왕의 기세를 깎아내리기 위해 머리를 굴릴 뿐이었다.
“궁전을 구경하신 모양이십니다. 오시면서 예술품들도 보셨는지요. 혹여 벽에 걸린 그림이라던가…….”
드베릭 왕은 왕궁의 복도에 걸린 그림들에 대한 감상을 듣기 위해 굳이 스스로가 그것을 언급하며 대화를 유도했다.
분명한 목적이 존재하는 말이었으나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 없이 언급만 한 것이니 상대가 세상 그 누구더라도 목적이 간파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언급된 그림들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이 끝난 이가 상대라면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왕궁의 주인에게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더군.”
네로멜티아에게서 나온 한마디는 드베릭 왕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오히려 드베릭 왕에게 수치를 주는 말에 가까웠다.
드베릭 왕은 드워프 화가들을 불러 모아 최대한 좋은 그림을 그리도록 지시했으니, 분명 좋은 평가를 받는 일에는 이상이 없을 것이었다.
하루 만에 급히 그린 그림일지라도 드워프 화가들이 그린 그림인 만큼 미술에 전문적인 소양이 없는 이상 드워프가 아닌 이종족들에게는 충분히 명작으로 보일 수 있는 그림일 것이 틀림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에게서 나온 말은 모든 내막을 알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감상이었다.
네로멜티아가 미술에 대해 전문적인 소양이 있다면 급조된 그림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는 것이었으나, 자신이 보기에도 그 급조된 그림들은 퍽 고풍스럽고 멋스러운 예술들이었으니 그 그림들의 완성도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드베릭 왕은 네로멜티아가 그림의 완성도를 보고 내막을 눈치챈 것이 아니라, 유화 물감이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 눈치챈 것이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왕궁의 주인에게 어울리는 작품.
네로멜티아는 그 한마디로 드베릭 왕의 자존심을 가차없이 구겨 버린 것이었다.
하루 만에 급조된, 결코 명작이라 부를 수 없는 그림이 자신과 어울리는 작품이라 말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조롱인 셈이었고, 더욱 깊게 생각해 보자면 겉모습만 그럴싸 할 뿐 별다른 가치도 없이 왕궁에 머무르는 존재라고까지 해석될 수 있는 상당히 날카로운 말이었다.
드베릭 왕은 네로멜티아의 뼈가 있는 말이 혹여 우연히 나온 것은 아닐까 싶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재차 유도해 보려고 했다.
“… 드베르그릭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입니다만…….”
드베릭 왕의 조심스러운 한마디에 네로멜티아는 잠시의 침묵을 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드베릭 왕의 눈을 바라보았다.
혹여 자신의 속내가 들키는 것은 아닐까 싶어 드베릭 왕은 네로멜티아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기 힘들었으나, 어쨌든 드베르그릭의 엄선된 화가들이 그린 것은 맞는 말이었으니 자신은 거짓을 말한 건 아니라고 속으로 재차 되뇌며 애써 용기를 끌어올렸다.
네로멜티아는 피식 잔웃음을 보이며 드베릭 왕의 이야기에 답을 해 주었다.
“그래. 네 아버지 드로겐하임 왕도 시대의 칭송을 받는 명군이었지.”
“…!!!”
지금 전해진 한마디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왕궁 복도에 장식된 그림을 그린 화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전혀 관련이 없는 선왕에 대한 이야기로 답을 했다면 오로지 답은 하나뿐인 것이었다.
네로멜티아는 드베릭 왕이 파놓은 계략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네로멜티아의 말은 내막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대화의 흐름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대답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나, 당사자인 드베릭 왕에게는 하나의 날카로운 송곳과 같은 치명적인 공격인 셈이었다.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급조된 어설픈 그림을 그렸듯이, 시대의 명군 드로겐하임도 어설픈 왕을 낳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
드베릭 왕은 마왕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며 떨리는 시선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걸? 네 아버지를 칭찬했건만 정작 아들인 네 낯빛은 썩은 감자같이 어두워지는구나. 조금 더 기뻐해도 좋다만?”
“크윽…!!”
“푸흡…!!”
아무렇지도 않게 드베릭 왕을 염려하는 듯 말하며 미소짓는 네로멜티아.
드베릭 왕은 한층 더 당황하며 이를 꽉 깨물기까지 했다.
이제는 자신의 난처해하는 감정마저 들켰다는 생각에 신음을 흘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사전에 네로멜티아의 설명을 들어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넬라넬라는 자신이 파놓은 계략에 자신이 당하며 표정을 형편없이 구기는 드베릭 왕에 대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려버렸다.
드베릭 왕은 네로멜티아의 뒤에 서 있던 넬라넬라의 작은 웃음을 들었으나, 도저히 그것을 지적할 수 없었고 발끈하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파놓은 음흉한 함정에 대해 공표를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드베릭 왕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들끓는 감정을 다스리기에 바쁜 와중, 네로멜티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미소를 지운 채 진중한 표정을 하고서 화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사적인 대화는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드베르그릭의 국왕, 드베릭 록 하이젠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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