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드베릭 록 하이젠버그 (1)
* * *
아스타리스 대륙 최대 규모의 광산인 맥켄지 광산.
광산치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광활한 대공동(大??)의 가운데에 해당 광산의 이름을 딴 맥켄지 시티가 존재했다.
멸망의 아래에 시름을 앓는 테라리스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휘황찬란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드워프들의 지하 도시.
그리고 그 중심에 맥켄지 시티의 찬란한 휘광을 증명하는 왕궁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본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예술적 건축물로써 이름이 높았었으나, 현 국왕 드베릭의 명 아래에 황금으로 뒤덮이게 된 골든 팰러스.
그 황금빛 일색으로 빛나는 사치의 왕궁 앞에 네로멜티아와 넬라넬라가 나타난 것은 인공 태양이 생성되며 아침을 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짐은 헤모니겐트의 마왕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다. 드베르그릭의 국왕 드베릭 록 하이젠버그를 만나러 왔다.”
드워프들의 우람한 체격에 꼭 맞도록 제작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문지기 둘이 네로멜티아의 신원을 확인하자마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신원불명의 방문자에 대한 경계를 위해 서로의 창을 교차하여 앞길을 막았었으나, 마왕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이름은 일개 병사들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창을 곧추세우며 방문객의 앞길을 터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 한마디에 무턱대고 방문객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창을 치워 버렸으나 간곡한 설명을 통해 상대의 배려를 구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감히 병장기 따위로 존귀하신 분의 앞길을 가로막은 점 사죄드립니다…!”
“괜찮다. 심려치 말 거라.”
“결례인 줄은 아오나… 조금만 저희의 입장을 헤아려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실지요…. 신원 확인의 절차도 필요하고… 저희가 윗선에서 받은 전달 사항 역이 없었기에…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할 듯합니다!”
조금 탐탁지 않다는 듯 네로멜티아의 눈썹이 살짝 휘어지자, 드워프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궈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래. 그러도록 하거라. 짐은 관대하니 너희의 난처한 입장을 헤아리지 못할 것도 없지. 그러나 너무 기다리게 하지는 말도록.”
“가, 감사합니다!!”
마왕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은 고개를 숙여 정중하면서도 절절한 안도가 느껴지는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내 두 병사 중 하나가 왕궁 내부로 뛰어 들어가며 소란스럽게 외치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마왕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이는 듯이 외쳤으나, 그 소리가 너무 컸기에 바람 소리가 많이 섞인 고함같이 들려 당연하게도 네로멜티아에게 너무나 잘 들리는 것이었다.
“겨, 경비대장!! 대자아아앙!! 비상!! 비상입니다!!!”
헐레벌떡 뛰어가며 필사적으로 소식을 알리는 드워프 병사의 모습이 싫지는 않았기에 네로멜티아는 슬쩍 미소를 지었으나,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음성으로 넬라넬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우선 경고 하나.”
슬며시 웃으면서도 다소 부정적인 말을 속삭여오는 네로멜티아에게 넬라넬라는 의문이 들었다.
넬라넬라가 의문을 가질 거라는 사실을 진작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네로멜티아는 그 이유를 간략하게 이어서 설명해 주었다.
“전날 마왕이 방문했다가 국왕을 만나지 못한 채 그냥 돌아가야만 했다면 적어도 마왕이 다시 방문할 것에 대비하여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 놨어야 했는데 정문의 경비들조차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건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정중한 대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야.”
“…!!”
“사실 이런 제스처는 어제의 문전박대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났지. 별다른 일정이 없음에도 나를 만나지 않았고, 심지어 만남을 미루는 데에 있어서도 약속을 따로 잡으려 들지 않았어. 하물며 왕궁 내에 객실을 내어주지도 않은 채, 우리가 왕궁 밖에서 숙박하도록 방치했지.”
넬라넬라는 이런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해 본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기에, 네로멜티아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일생에 외교라고 해봐야 이웃 마을의 오우거 부족장 오운을 만나는 것이 다였기에, 이런 식으로 사소한 상황 하나하나가 상대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정치적 암투에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드베릭 녀석은 나와 기 싸움을 하고 싶은 모양인걸?”
“아, 아무리 일국의 왕이라고는 하나… 폐하께서 훨씬 드높으신 존재이신데…”
“여기서 발끈했다간 고압적인 마왕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겠지. 그저 골든 팰러스의 미흡한 대처에서 발생한 사소하기 그지없는 실수인데도 너그럽게 대처하지 못한 옹졸함이라 포장되어 대중에게 공표될 거야.”
넬라넬라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까지 홀대를 받으면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는 경우인데도, 화를 냈다가는 역공을 받아 명예에 흠이 나고 만다니.
드워프들과 긴밀한 사이를 만들어 가며 힘을 키워야 하는 헤모니겐트의 입장에서 드워프 백성들의 민심을 잃는다는 것은 드베르그릭과 아예 척을 지면 모를까 함께해야 할 미래의 행보에 큰 오점을 남기는 치명적인 상황인 것이었다.
아직 만남조차 성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토록 살벌한 공방이 오간다는 것 자체가 넬라넬라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섬기는 마왕이야 실수가 없는 완벽한 존재이니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반면 자신은 정치적으로 아는 바가 전무한 일개 숲속의 토박이이니 자신의 실수로 말미암아 마왕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까 겁이 나는 것이었다.
“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왕 폐하! 드베릭 록 하이젠버그 국왕의 시종장 마르티노 몬소, 이 모자란 노인이 마왕 폐하를 성심성의껏 모시겠나이다!”
골든 팰러스 내부에서 헐레벌떡 뛰어온 것은 전날 보았던 드베릭 왕의 시종장 마르티노와 경비대장으로 추정되는 드워프였다.
전날 보였던 강경한 태도와 달리 마르티노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정중한 태도로 일관한 채 네로멜티아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경비대장이 뒤따르며 호위를 하기 시작했고, 뒤늦게 도착한 드워프 병사 스물 정도가 경비대장의 지시하에 전방과 후방으로 흩어져 긴 호위 대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토록 훌륭한 호위께서 계신데 호위병을 추가하여 죄송합니다. 그저 마음 상하지 않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경비대장은 보는 눈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대의 생각대로 유능한 호위가 있으니 별로 필요하진 않겠으나, 이것이 드베르그릭의 정중한 환대라 생각하여 흡족하게 생각한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만나기 전부터 강한 적대가 느껴지는 드베릭 왕과 달리 경비대장은 무척 강직하고 진실된 인물로 보였다.
척 봐도 일말의 거짓 없이 국왕과 국가에 충성을 다하며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공무를 집행할 수 있는 이상적인 군인.
상대에게 아첨하지 않고 홀대하지도 않으며, 그저 외교에 따른 예우를 철저히 다할 뿐인 완벽한 공무 집행이었다.
그는 네로멜티아가 느닷없이 화를 내며 뺨을 친다 하더라도 언성을 높이긴커녕 티끌 만큼의 불편함도 내비치지 않은 채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경고 둘.’
“읏…!”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서 네로멜티아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넬라넬라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모습에 경비대장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 보았으나, 넬라넬라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렇지도 않다는 눈빛으로 그를 안심시켰다.
네로멜티아는 주변의 호위들과 마르티노를 의식해서 음성 전달 마법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귀를 통하지 않고 곧장 청각 신경에 전달되는 음성이라는 건 넬라넬라에게 있어서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것이었다.
‘이 복도에 걸린 그림들 보이니?’
‘들… 리십니까…?’
‘응.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내게도 전달이 되니까 편하게 생각해.’
네로멜티아의 음성이 들리긴 하는데, 자신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지 잠시 난감했었던 넬라넬라는 생각만으로 자신의 말을 전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았다.
다행히 넬라넬라의 추측대로 해당 마법은 쌍방 통행이었기에 넬라넬라의 이야기 또한 네로멜티아에게 잘 전달이 되는 듯했다.
네로멜티아가 언급한 벽면의 그림들.
황금의 액자로 장식된 온갖 그림들이 호화로운 황금의 궁전을 더욱 사치스럽게 꾸며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엇 하나 멋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고, 개중에는 마왕성의 아티스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그림들도 있었다.
‘무, 무척 멋지고… 훌륭한 그림들처럼 보입니다…….’
‘그 반대야, 넬라.’
순간 넬라넬라는 자신의 생각과 완벽히 다른 네로멜티아의 이야기에 놀라 다시 한번 그림들을 살펴 보았다.
천천히 걸어 나아가며 지나치는 수많은 그림들.
자신이 무언가 놓친 것이 있는지 안력을 돋우며 더욱 자세히 살펴 보았으나, 아무리 보아도 멋지고 훌륭하다의 반대되는 개념을 찾기 힘들었다.
‘넬라는 혹시 유화 물감이 마르는 데 얼마나 되는 시간이 걸리는 지 아니?’
넬라넬라는 온갖 종류의 그림들 사이에 포함되어 있는 유화 그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석판화, 소묘, 암면 조각화, 수채화.
온갖 종류의 그림들이 장식된 골든 팰러스의 복도는 모든 그림 예술을 총망라한 하나의 예술관과 다름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바로 유화(?).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종류의 그림들이 오히려 네로멜티아의 이야기에 언급되자 넬라넬라의 추리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유화 물감이 마르는 시간.
넬라넬라에게는 없는 지식이었다.
‘최대 2년 정도가 지나야 비로소 완전하게 마르는 것이 유화야. 그런데 지금 벽에 걸린 유화들은 많이 촉촉하지? 왕궁을 황금으로 뒤덮을 정도로 사치를 좋아하는 왕이 그려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림을 대놓고 장식해 둔다고? 그림에 진정한 가치가 내려지려면 세간에 알려져 평가를 받으며 인정을 받아야 하니 적어도 1년으로는 모자라겠지?’
‘… 아…….’
네로멜티아는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복도의 끝을 응시했다.
복도의 끝에 위치한 왕의 알현실.
온갖 보석들이 박혀 장식된 황금의 문.
‘나도 예술을 평가하는 눈이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이건 그저 그런 작가들이 어제 갓 그려낸 유화임에 틀림이 없어 보여. 물론 그저 그런 녀석들도 드워프인 만큼 평범한 이들에게서는 충분히 감탄을 이끌어 낼 수 있을 수작을 그려낼 수 있었겠지만, 드베릭이 의도한 바는 결코 좋아 보이지 않네.’
슬쩍 미소를 짓는 네로멜티아.
마르티노는 그 미소를 보고 네로멜티아가 만족하고 있다 생각해서 기분 좋은 미소로 답을 해오고 있었으나, 네로멜티아의 곁에서 긴밀한 관계까지 이루어 본 넬라넬라만큼은 그 미소의 진실을 엿볼 수 있었다.
네로멜티아의 아름다운 미소 이면에는 명백한 적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전해지는 네로멜티아의 음성에서 그녀가 가진 은근한 불쾌감이 함께 전해지고 있었다.
‘누구한테 시비를 걸어온 건지 보여 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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