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드베르그릭의 내정(??) 사정
* * *
천 년 만에 이룬 재회를 축하하는 연회는 늦은 밤까지 계속 되었다.
그간 서로에게 쌓인 이야기는 밤하늘의 별만큼 무수히 많았기에, 끊이지 않는 대화 속에서도 못다 하고 밤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노움의 눈물정을 운영하며 있었던 온갖 어려운 일들.
마도 공학을 연구하며 이룩한 자랑스러운 성과들.
맥켄지 시티에 정착하며 만난 인상적인 드워프들.
특히 네로멜티아에게서 천 년 전의 휴미안 침공에 대한 배신자 이야기가 나왔을 때엔 모두가 격노를 참지 못해 살기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마왕 친위대 콰르텟의 일원이라는 자가 섬겨야 할 주군과 지켜야 할 나라를 배신하다니… 그를 감시하지 못한 저를 벌해주십시오!!”
“그게 니콜라스 네 잘못은 아니지. 그 녀석은 이미 죽었기도 했고, 너무 신경쓰지 마.”
“게르딘 이 놈…!!!”
니콜라스의 안광은 폭발적인 빛을 발하며 타올랐고 그의 주먹은 손에 잡히는 건 모조리 으스러뜨릴 기세로 부들부들 떨려왔다.
네로멜티아는 그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차분한 음성으로 그를 달래 주었으나, 오히려 그는 배신자의 이름을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드워프의 수치다!! 아무리 욕구에 솔직한 드워프라도 명예와 정도가 있는 것인데!!!”
그런 희대의 배신자가 자신과 같은 종족이라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던 리겐하르트.
그의 안면은 시뻘겋게 혈기가 돌고 있었고, 그의 이마엔 굵은 핏줄이 불뚝거리며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진작 알아 봤어!!! 그 망나니 같은 놈!! 백 년 묵은 돈주머니 밑바닥에 부스러기 같은 고약한 놈!!! 신념이라곤 나사 한 알 만큼도 없는 놈이 직책에만 욕심이 있어서 콰르텟 자리를 덜컥 받아 들였을 때부터 알아 봤다고!!!”
“멜키스 공! 그자에게 콰르텟의 일원을 권한 건 나였소!! 나의 실책이오!!!”
“그래!! 그렇구나!! 너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었지!! 정작 사람 보는 눈은 없는 주제에!!!”
분노하며 욕설을 내뱉는 멜키스의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실태를 책망하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는 니콜라스.
자신을 책망하는 니콜라스에게 오히려 동조를 하면서도 차마 그를 힐난하지 못해 갈 곳 잃은 분노를 표출하는 멜키스.
그리고 상황에 끼어들지 못한 채, 가시 돋힌 의자에 앉은 기분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넬라넬라.
네로멜티아는 그 혼란스러운 자리 가운데에서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모두 진정 좀 해라!!! 시끄러워!!!”
엄밀히 말하면 두 마디였다.
타닥 타닥 타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지던 연회가 한참을 무르익어 벽난로의 장작이 불씨가 은은한 숯으로 변할 즈음이 되어서야 향후 일정에 요구되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래. 지금 국왕은 어떤 녀석이야?”
사적인 이야기를 접고 본격적으로 공무를 위한 대화를 나누려는 움직임을 보인 네로멜티아.
리겐하르트는 그녀의 분위기를 즉시 감지했고, 그 역시 만취한 듯 달아오른 감정을 차차 가라앉히며 네로멜티아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드베릭 록 하이젠버그(Deberic rock Heisenbug). 선왕이신 드로겐하임 왕의 아들이지.”
“… 역시 그랬나…….”
“뭐야, 알고 있었나?”
“대충은. 골든 팰러스가 온통 황금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걸 보고 예상은 했는데…….”
네로멜티아의 기억 속 드베릭 왕은 상당히 젊은 드워프였었다.
천 년 전에 드로겐하임 왕을 만나러 방문할 때 종종 보았던 그의 아들.
그 당시 고작 천 년을 조금 더 산 정도의 나이였기에 왕위를 물려 받기는 한참 이르다 판단 되었었고, 네로멜티아는 맥켄지 광산을 방문할 때만 해도 드로겐하임이 직접 자신을 맞이할 거라 생각했었다.
리겐하르트가 오천 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고, 멜키스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사천오백 년을 살아오고 있으니 당연히 드로겐하임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의 향년 사천삼백 하고도 팔십오 세.
예상보다 일찍 가버린 드로겐하임은 네로멜티아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천 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비로소 부활했으나 재회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버린 벗.
베아트리스의 아버지 로널드 거트만에 이어 두 번째의 비통한 작별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공무를 위해 정보를 논하는 자리에서 굳이 사사로운 감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촉촉해지는 음성을 애써 삼키려 했다.
“그렇지! 네가 봐도 그렇지!? 그 돈귀신 놈!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골든 팰러스에 금칠로 뒤범벅을 하다니!! 선조령들께서 불같이 화를 내실 것이야!!!”
“그래! 리겐하르트 말이 맞지! 이름이 골든 팰러스라고 진짜 황금 궁전인 줄 아는 멍청한 놈!!”
마음 깊이 불만이 가득했던 모양인지 리겐하르트는 네로멜티아의 이야기에 적극 동조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에 이어 멜키스 역시 리겐하르트에 못지 않은 노기를 드러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들이 보이고 있는 것은 드베르그릭의 백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국위(國?) 훼손에 대한 분노였고, 영원토록 보존해야 마땅할 문화 유산을 훼손당한 데에 있어서 당연히 표출되는 장인으로서의 분노였다.
“리겐하르트 공. 멜키스 공. 아무리 그래도 현 국왕이신 분께 어느 정도는…”
“그 입 다물게!!”
“모르면 가만히 있어!!!”
아무리 얄미운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위치와 직책을 생각하라 조언할 참이었던 니콜라스는 두 노인에게서 동시에 퍼부어지는 일갈을 모두 받아 내야만 했다.
그의 자줏빛 안광은 횡으로 길게 찢어지며 힘없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아래로 축 늘어진 모양으로 변해 그가 주눅이 들었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행여나 누가 들을 까봐 걱정이 돼서…….”
좋은 뜻에서 점잖게 상황을 다듬으려 했던 니콜라스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애처로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나눌 수 있는 사담(??)이라면 무척 우습고 재미있는 광경이겠으나, 네로멜티아에게 남겨진 밤의 시간은 짧았고 얻어야 할 정보는 많았기에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방향의 장면이었다.
“하아… 그래. 하여튼 그 녀석이 왕이란 거지? 자질은 좀 어때? 제 아비에게서 배운 건 있어?”
“말도 마라! 국정은 뒷전이고 금화 쌓는 일에만 바빠서! 세금 걷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도대체 이해가 안됩니다, 마왕님! 어디 다른 나라하고 무역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왕국 내에서 뭔가 값진 물건을 살 수 있는 시대도 아닌데! 대체 금화가 왜 그렇게 중요하답니까!!”
단 한마디를 물어봤을 뿐인데 또다른 종류의 노기를 드러내며 언성을 높이는 두 노인 드워프.
그간 불만을 꾸역꾸역 쑤셔 담아놓고 있었던 모양인지, 기다렸다는 듯 역정을 내며 앞다투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드베르그릭은 지금 귀한 거라고 해 봐야 먹을 거 입을 거로 끝이라고! 아름다운 예술품이나 품질 좋은 공예품 그리고 잘 벼려진 명검! 다 소용 없는 세상이니 당장 먹고 자고 노는 게 제일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런 와중에 모든 농장을 국유화 시켜 버려서! 음식을 파는 거리의 상인들도 국가에서 배급받은 식재료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국왕이 필요한 건 다 소유한 셈인데 도대체 그에게 금화가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네로멜티아는 드베르그릭의 내정(??) 상황이 비로소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무려 마왕이라는 존재가 방문했음에도 금화를 세기 바빠 얼굴도 비치지 않은 채 만남을 다음으로 미룬 어처구니 없는 존재.
12신들과 양극단에 서서 테라리스의 균형을 팽팽히 유지하는 루이나의 여신조차 안중에 없을 정도로 멍청한 존재.
황금빛 유혹을 이기지 못해 탐욕에 집어 삼켜져 명예가 영락(??)해버린 볼품 없는 군주의 국정 방치였다.
“유능한 드워프들을 모아서 자기 멋대로 죄다 한자리씩 앉혀 두고서 자기는 놀기 바쁘단 말이야! 그놈들도 직책 하나씩 얻었을 때는 좋아했지! 다만 보상은 거의 없고 일만 과중하니 명예 하나만 바라보고 잠을 아껴가면서 일을 해야 한단 말이야! 누가 좋아하겠냐고 이걸!”
“결국 직책을 얻은 녀석들은 둘 중 하나입니다! 음흉하게 뒷주머니를 차고 썩어버리거나! 명예를 지키며 일하는 노예가 되어 버리거나!”
앞선 리겐하르트의 말은 요점이었고, 뒤에 이은 멜키스의 말은 핵심이었다.
결국 국왕은 놀고 먹으며 세금 모으기에만 빠져 있으니 국정은 뒷전에 두고 방치 중이란 이야기였고, 국왕의 빈자리를 다른 유능한 신하들이 어떻게든 방도를 모색해가며 억지로나마 왕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현재 맥켄지 시티의 백성들은 모든 식량을 왕국의 권한 아래 배급받는 처지였으나 멸망이 가득한 테라리스의 상황을 비교해 본다면 가히 번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생명을 유지할 제대로 된 조건들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테라리스의 환경 아래 깨끗한 공기와 충분히 갖춰진 식량 그리고 보장된 안전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드베르그릭은 충분히 축복받은 환경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공은 국왕의 아래에서 잠을 줄여가며 필사적으로 일하는 정직한 신하들의 것이었다.
“드베릭 녀석은 정말 아무 것도 안 해? 국정에 참견 조차도?”
“그런 게 전혀 없다니까! 그저 인사 결정권만 휘두를 뿐이고 하는 게 없어!”
방임의 극치를 보이는 드베릭 왕에 대한 분노를 연거푸 토해내는 리겐하르트.
그러나 네로멜티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네로멜티아는 무언가 확신이 생긴 듯, 싱긋 웃으며 혼잣말에 가까운 의견을 내어놓았다.
“흐흥. 머리는 좀 굴러 간다는 건가?”
“무, 무슨 소리야! 아무 것도 안 한다니까!?”
더없이 형편없는 왕을 조금 높게 사주는 네로멜티아의 의견에 리겐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발끈해 버렸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보이고 있었고, 분위기가 전혀 달라질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리겐하르트의 반응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기에, 네로멜티아는 간략한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정말로 게으르고 멍청한 거였으면 인사 결정권까지 남의 손에 맞겼겠지.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신하 하나에게 모조리 일임했을 거야. 그런데 ‘자기 멋대로’ 인재들을 등용했다? 그건 좀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상온에 오래 두어 미지근해진 맥주였으나, 리겐하르트의 양조 솜씨가 워낙 뛰어난 탓에 풍미가 살아있어 여전히 흠 잡을 데 없는 술의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네로멜티아는 장난기가 살짝 도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짠 거야. 왕이 국정을 엉망으로 하면 신하와 백성들의 손에 끌려 내려오기 마련이지. 그러니까 미리 설계를 한 거야.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않을 법한 인물들 중에서 가장 유능한 이들로 신하들을 채운 거지. 그게 신념을 가지고 정직하게 일하는 신하든 부패해서 자기 잇속 챙기기 바쁜 신하든, 결국 각자 나름대로의 사정으로 배신하지 못하면서 어떻게든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인물들로.”
“그, 그건 좀 과대평가가 아닌가…?”
“그래. 거기서 끝이면 우연히 판이 잘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식량 자원을 국왕 소유로 틀어 쥐었다며. 멍청한 폭군들은 국가의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들지. 아니면 아예 방치하던가. 그런데 드워프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방 구역과 채굴권은 건드리지 않았잖아? 대신 생명과 직결되는 식량 딱 하나만 틀어쥐고. 그럼 어떻게 될까?”
리겐하르트와 멜키스는 조금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보는 눈치였으나 네로멜티아가 이야기 하는 게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것은 이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니콜라스와 넬라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유롭지 못한 식량 사정에 대해 불만은 쌓일지언정 배고픈 건 아닌데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에 대해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은 주어지니 불만이 폭발하지는 않겠지. 결국 드워프들 대부분이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 세금을 위해 금광석을 캐서 금화를 주조해야 한다는 제약은 존재하겠지만. 리겐하르트 너도 자유롭게 주점을 운영하고 있고 말이야.”
“아아아!!!”
리겐하르트와 멜키스는 비로소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는 듯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거의 경악에 가까운 반응이었고, 크게 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 놀라는 것은 니콜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철저한 외부인인 넬라넬라만이 어렴풋이 감을 잡은 정도였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네로멜티아는 그 상황에서 쐐기를 박았다.
“식량 장악조차 우연이었고 그 녀석이 멍청하고 게으른 국왕이었다면 이미 식량의 운영권은 야심 넘치는 신하 하나가 가져가 버렸을 걸? 식량이야말로 현 시대 최고의 생존 가치고 빼돌려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딱 좋은 재산이니까. 식량 운영권을 그 녀석이 지금까지도 굳건히 쥐고 있다는 건, 자신이 뭘 가져야 하고 뭘 지켜야 하는 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소리야. 드워프들 살아가는 걸 보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도 아니니 나름대로 신경 써서 운영하는 모양이고. 이렇게 최소한의 장악으로 국가 전체에 민심을 잔잔하게 유지하고 있는… 머리 좀 굴릴 줄 아는 녀석인데…….”
“…!!”
“어쩌다 보니 우연히도 자신의 안위에 유리한 신하들로만 등용 됐다는 이야기가 신빙성이 있을까, 아니면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니 자신에게 유리한 녀석들로만 골라서 등용했다는 이야기가 신빙성이 있을까? 물론 증거는 없지만 말이야.”
네로멜티아의 말에 자리의 모두가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반응이 꽤 정적이었던 넬라넬라마저도 눈을 반짝이며 무언의 찬사를 눈부시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조금 듣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왕의 지성에 감탄을 금치 못해 호흡마저 떨려오는 모습이었다.
네로멜티아는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더 남겼다.
“아예 멍청한 녀석보다는 어설프게 똑똑한 녀석이 더 읽기 쉬운 법이지. 언제나 그랬듯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