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낭만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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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오우거에 필적하는 거구를 자랑했던 흑철의 갑옷은 신장이 오백 멘톨에 달해 있었다.
오우거 부족 중 가장 거대한 체격을 자랑하던 오운에 비하면 일백 멘톨이 모자란 정도였으나, 오백 멘톨이라는 신장은 오우거들의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덩치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넬라넬라도 전혀 무리 없이 드나들었던 노움의 눈물정 정문을 있는 대로 허리를 숙인 채 들어왔으니 그의 거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오크들 중에서도 작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던 이백 멘톨의 넬라넬라로서는 그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선 올려다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흑철의 갑옷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그레이트 헬름의 내부는 온통 시커먼 어둠 뿐이라 그 내부가 보이질 않았고, 눈빛은커녕 안면의 형상조차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그저 갑옷 내부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 나온 것으로 상대가 남성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으나, 멜키스 공(?)과의 만남이 늦어 이제야 주군을 영접하게 되었음에 용서를 구합니다.”
“편하게 해, 편하게. 모르는 아가씨 있다고 분위기 잡지 말고.”
오백 멘톨에 달하는 거구의 남성이라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음색.
오히려 엘프족의 음유시인이라면 더욱 잘 어울릴 그의 음성은 다소 가늘고 높았으며, 매끄럽기가 세이렌(Seiren)에 견줄 정도였다.
그런 미성(美?)을 가지고서 정중한 예를 다 하고 있으니, 오백 멘톨의 시커먼 갑옷만 아니었다면 동화나 로맨스 소설에 나올 법한 기사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고개를 저으며 핀잔에 가까운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으하하하하하!! 아리따운 레이디의 앞에서는 잔뜩 멋을 부리고 싶은 것이 남자의 본성 아니겠습니까! 물론 주군께서도 그 아리따운 레이디이십니다만!”
“그 날개 돋힌 거 같이 가벼운 입은 여전하구나.”
마왕성의 크로포드를 보는 듯 정중하고 점잖은 말투는 씻은 듯 사라지고, 무척이나 경박하고 방정맞은 말투로 변해버린 갑옷의 남성.
심지어 충성스러운 기사같던 모습도 사라지고, 주군에게까지 추파를 던지는 얼빠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철걱!
쿠웅!
그러나 경박스러운 모습을 지워내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을 가슴에 얹어 두는 것으로 귀족적인 인사의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육중한 갑옷의 이음새 부분들에서 철걱거리는 금속성이 울려 퍼졌고, 거구의 무릎이 지면에 닿자 목재로 이루어진 바닥이 부서질 듯 굉음이 울려 퍼졌다.
“찬연한 영광이 함께하는 고귀한 루이나의 여신이시여. 마왕 직속 친위대 ‘콰르텟(Quartet)’. 니콜라스 스트라스버그(Nicolas Strasburg) 천 년의 세월을 넘어 경배드리나이다.”
신장 오백 멘톨에 달하는 거구는 무릎을 꿇고 앉았음에도 높이에 차이가 생겼을 뿐, 여전히 네로멜티아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노움의 눈물정이 리겐하르트의 뜻에 의해 어떤 종족이든 들어올 수 있도록 건축되지 않았다면, 그는 이 주점의 밖에서 인사를 해야만 했을 것이었다.
“그래, 반가워. 잘 지냈지?”
“이 몸은 소멸하지만 않았다면 언제나 똑같지 않겠습니까!”
“후후. 그렇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주변의 인물들을 대할 때 격식을 따지지 않는 네로멜티아도 마왕으로서 최소한의 위엄은 지킬 줄 알았다.
그렇기에 천 년 만에 마주한 신하를 보고서도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그녀의 음성에서는 마음 깊이 흘러나온 환희가 배어 있어 그녀가 내심 얼마나 반가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주군의 곁에 계신 아름다운 레이디께도 인사드립니다. 콰르텟의 니콜라스 스트라스버그라고 합니다.”
“오, 오크군 소속 공병대장, 넬라넬라라고 합니다.”
“으으음! 넬라넬라! 무척 기품이 넘치고 사랑스러운 이름이군요! 레이디께서 지니신 싱그러운 매력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
일말의 주저없이 매끄러운 화술로 달콤한 칭찬을 늘어 놓는 니콜라스.
너무나도 노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혹시나 추파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법도 했으나, 니콜라스의 음성에서는 티끌만큼의 흑심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기에 그가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증명이 되어 기분 나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치!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카디널 로즈! 건강한 야성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한 송이의 들장미! 으으으음!! 헤븐리 필러의 만년설을 뚫고 피어나는 눈송이 꽃 스위노스 로즈도 그대보다 깨끗하진 못할 테지요!”
“잘한다! 더 칭찬해!!”
“하으으…!!”
기분 나쁘지는 않으나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넬라넬라는 니콜라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견디기 버겁고 부끄러워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오히려 흔쾌하게 니콜라스의 칭찬 세례를 부추기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넬라넬라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고개를 처박을 듯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고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아하하하. 정말이지 너를 보면 언제든 유쾌해진다니까. 덩치 큰 손님이 하나 더 있다고 해서 누구인가 궁금하던 차였는데, 그게 너였다니 놀라운 걸? 어떻게 된 거야?”
한껏 웃으며 쾌활한 분위기를 즐겼던 네로멜티아는 슬슬 웃음을 지우며 니콜라스에 과거 행적을 묻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의 악극(??)을 공연하는 듯 운율까지 타며 넬라넬라의 미모를 칭송하던 니콜라스 역시 주군의 질문에 따라 장난기를 지우고서 이야기의 본론에 접어들었다.
“주군께서 승하(??)하셨던 그 비극의 날. 주군의 명령에 따라 마왕군의 간부들은 전부 피난민을 대피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지요. 메탈 윙(Metal Wing)공은 그나마 주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지켰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에게는 그 시련이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니…….”
“그 녀석이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마력 장벽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었어. 그 녀석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백성들을 지킨 거야.”
“오오! 그랬었군요…!! 정말이지… 그의 희생이 값진 결실을 맺게 된 것 같아 진심으로 슬프면서도 감격스럽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는 아릿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천 년이나 지난 이야기지만 비통함이 전하는 마음의 통증은 여전히 가슴 깊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동료의 희생이 값진 결실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니콜라스는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진정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기에, 니콜라스는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크로포드 공을 필두로 대부분의 백성들은 바르커스 화산 방향으로 피난한 모양이었습니다만, 헤모니겐트에는 다른 이종족도 많으니 그들을 규합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피난 시킬 인원들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드워프들의 피난을 맡은 것이 저 니콜라스였지요.”
“… 드워프 공방은 마왕성 남방 지구였으니…….”
“네. 북부로 피신하던 크로포드 공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무리였으니 그대로 이 곳 맥켄지 광산까지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드워프들을 맥켄지 광산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 주군을 돕기 위해 마왕성까지 다시 달려가 보았으나… 마왕성은 이미 철저히 파괴되었고… 포로들은 모조리 끌려가 버린 뒤였더군요. 주군 또한…….”
니콜라스는 격앙된 감정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 하는 듯 했으나, 이 이야기가 얼마나 비통한 과거인지는 모를 인물이 없었다.
더군다나 니콜라스의 그레이트 헬름 내부에서는 자줏빛의 선명한 안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크게 분노하고 있는 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인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자신의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니콜라스의 섬뜩한 분노에 자신의 체온마저 얼어붙는 느낌이라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고 말았다.
“후후후. 마왕성에는 뭐 하나 건질 게 없는 잔해 뿐이었고, 휴미안의 군대도 뭐 하나 건질 게 있나 아예 각잡고 주둔한 모양이었기에 맥켄지 광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드워프들하고 천 년을 함께 지냈지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쾌활한 모습으로 돌아온 니콜라스는 이야기를 하던 도중 넬라넬라를 바라보았다.
넬라넬라를 향해 내밀어진 그레이트 헬름의 내부에서 은은히 타오르고 있었던 자줏빛 안광.
온통 어둠 뿐이라 다른 건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일렁이는 듯한 안광만큼은 정확히 보였으니 넬라넬라는 자신이 본 게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분노하고 있을 때에는 마치 불길이 타오르는 듯 안광이 실체를 가지고 구현된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당황스러웠던 것이었다.
“레이디 넬라넬라! 드워프들은 굉장하답니다? 이들은 몹시 유쾌하고 무척 솔직합니다. 친구가 되면 이들만큼 마음이 놓이는 이들도 드물지요! 물론 욕심이 과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자들도 있습니다만… 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느 종족이나 그런 자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알 것 같습니다….”
넬라넬라는 네로멜티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으니 니콜라스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한 것이었는데, 니콜라스는 넬라넬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해 주는 모습을 보이자 무척 기뻐하며 말과 웃음을 폭포와 같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오!! 역시! 총명한 혜안이 남다르십니다! 으하하하하!! 우스운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릴까요? 독자적인 인공 태양을 만들어 개인용으로 팔아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지닌 녀석이 있었는데! 마도 공학의 산물인 그걸 어떻게 물리적으로 개발해보겠답시고 인(?)을 있는 대로 긁어 모아 터뜨렸다가 그대로 자폭해 버렸답니다! 으하하하하하!!! 플라스크가 인의 열기를 버티니까 안전할 줄 알았다나요? 그 녀석이 그날 수염도 홀라당 태워 먹었는데 아직도 맨들맨들한 그대로랍니다!!! 으하하학!! 으힉!! 으하하하하하!!!!”
“아… 네… 아하하…….”
오백 멘톨의 거구를 지닌 수다쟁이의 언어적 집중포화를 견디기 힘들었던 넬라넬라는 어설픈 대답과 어설픈 웃음으로 그의 이야기에 맞춰 주었다.
넬라넬라의 눈빛은 마치 죽은 자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영혼을 잃었고, 그저 흥미롭다는 듯한 대답을 어설픈 모양새를 하고서 기계적으로 찍어낼 뿐이었다.
“그래서 그 녀석 별명이 베이비 모리스입니다!! 남성 드워프들은 수염이 없으면 아기 취급을 당하니까요!! 으하하학!! 그런 거구를 해가지고 베이비…!! 으힉!!! 으햐햐햐햑!!!”
“아하하… 재미있어라…….”
“그래서 어느 날은 그 녀석이 거나하게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친구들이 모여서 그 녀석을 홀라당 벗겨 가지고 기저귀를 채웠지 뭡니까하하하하!!! 입에는 쪽쪽이도 물렸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기겁한 그놈이 쪽쪽이를 빼려고 했는데 자면서 너무 빨아댔는지 쪽쪽이가 이 사이에 껴가지고 빠지질 않고하하하하하하!!!!”
“저런… 아하하…….”
넬라넬라는 네로멜티아를 바라보며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사실 이 감당하기 버거운 수다가 시작되자마자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는데, 니콜라스의 말이 너무 빨라서 눈빛을 보내는 그 잠시의 시간 동안 이야기 하나가 끝나 버릴 지경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생긋 웃고만 있었다.
마치 한 번 겪어 보라는 듯한 짓궂은 미소.
심지어 그 장난기 넘치는 미소는 리겐하르트 역시 동일하게 짓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나마 표정이 달랐던 것은 멜키스였으나 그는 그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정신을 다른 곳에 놓고 있는 중이었다.
넬라넬라는 네로멜티아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화제를 돌리기로 결심했다.
“니, 니콜라스님께서는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그 투구라도 벗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순간의 정적.
니콜라스는 그토록 수다스러운 입을 다물고서 조용히 넬라넬라를 바라보았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던 상대가 한 순간에 정적을 유지하면 아무래도 듣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긴장감이 들기 마련이었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 것인가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는 것 역시 넬라넬라에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나 이내 니콜라스는 폭소를 뻥 터뜨리며 이전보다 더욱 큰 웃음소리를 보였다.
“으하하하하하하!!!! 이거 걸작이구만!!!!! 으히하하하하하하!!!!!”
다소 높고 매끄러운 미성을 해가지고서 극히 경박스러운 웃음을 보이는 니콜라스에게 넬라넬라는 문득 그의 목소리가 아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움의 눈물정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웃음이란 이름의 굉음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서, 니콜라스는 잦아드는 웃음과 함께 자신의 그레이트 헬름을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앗…!!”
순간 넬라넬라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다가 입을 틀어 막아 버렸다.
흑철의 풀 플레이트 아머 위에 일렁이는 자줏빛의 불꽃.
당연히 머리가 존재해야 하는 장소에는 그저 이질적인 불꽃만이 몽환적으로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아무래도 소개를 미흡하게 드린 것 같군요. 레이디 넬라넬라께 사죄드립니다.”
“…!!”
탁자 위에 내려 놓은 그레이트 헬름을 슬쩍 넬라넬라의 방향으로 돌린 니콜라스.
그레이트 헬름의 내부에서는 여전히 자줏빛의 안광이 은근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본디 비어 있어야 할 투구의 내부에 안광이 타오르고 있었고, 심지어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의 눈처럼 그 모양이 희미하게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냉기를 지닌 명계의 불길을 닮아 있었다.
허상과도 같이 희미하면서도 상대의 영혼에 그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키는 시퍼런 불과 닮은 것이었다.
“저는 리빙 아머(Living Armor)랍니다.”
니콜라스의 자줏빛 안광이 횡으로 길게 가늘어진 채 천천히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영혼의 냉기가 자리한 안광이었으나, 전해지는 감정은 오히려 따스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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